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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고난의 길 (요 19:17~18, 26~30) - 고난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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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요 19:17~18, 26~30)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데로 가셨다. 그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라고 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아서, 예수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에 세웠다.……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그 뒤에 예수께서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아시고,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기에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해면을 그 신 포도주에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가 꿰어 예수의 입에 갖다 대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서, “다 이루었다” 하고 말씀하신 뒤에, 머리를 떨어뜨리시고 숨을 거두셨다.]

• 슬픔의 길
조금 전 찬양대가 부른 곡의 제목은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슬픔의 길’ 혹은 ‘고난의 길’, 곧 주님께서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오르시던 바로 그 길을 뜻합니다. 이 곡은 멜로디와 가사가 다 심금을 울립니다. 좋은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웅성거리며 한 불행한 사내의 행진을 가까이서 보려고 서로 밀치는 사람들, 창자루로 그들을 밀어내며 길을 여는 군인들의 위압적인 목소리, 그 소란의 한 복판에 채찍질 당한 등과 가시 면류관이 씌워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상한 흥분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고 외칩니다. 주님은 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나요? 비아 돌로로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왕이신 그리스도, 구세주께서 어린양처럼 오셨지만,
그는 당신과 나를 위한 사랑으로 그 길을 걷기로 결정하셨지요
갈보리에 이르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힘든 길을....”

• 십자가 위의 일곱 말씀
오늘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이지만,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인류에게 남기신 일곱 마디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오늘의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말씀들이야말로 예수 수난의 신비를 오롯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처형자들은 아무런 연민도 업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후, 십자가를 똑바로 세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지금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 정신조차 몽롱해질 지경입니다. 훈련받은 대로 일을 처리하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처형자의 옷을 나누어 갖는 군병들, 조롱의 뜻으로 머리를 주억거리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나 구원하여라'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음모를 꾸며 기어코 예수를 없애게 되었다고 득의의 표정을 나누는 지도자들…. 십자가 앞에 서있던 군상들은 바로 하나님을 등진 인류의 모습 그 자체였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무력한 약자에게 고통을 가하며 희희낙락하는 저 가련한 군상을 바라보던 주님은, 당신이 겪는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느낍니다. 마침내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 구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23:34)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한때 금강산의 유점사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던 시인 김달진(1907-1989)은 십자가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의 사형!/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김달진, <<山居日記>>, 세계사, 98쪽) 

주님의 좌우편에 있던 강도 중 하나가 주님께 구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23:43)

참으로 장엄한 대답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요6:3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일제시대에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낙인찍힌 이들처럼 로마 식민 통치자들에 의해 강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꿈은 임박한 죽음과 더불어 속절없이 스러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까지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예수님에게서 죽음을 넘어서는 삶을 발견한 것일까요?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존재가 새로운 존재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너무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이의 모습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열린 눈과, 그를 잃어버린 어린 양으로 맞아들이는 주님의 마음이 만나 구원사건을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십자가 아래 기진한 채 서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셨습니다. 어쩌면 어머니는 예수님이 태어난 지 여드레째 되는 날 성전에서 만났던 시므온이 했던 말을 되새기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눅2:35)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파리해져가는 어머니. 그의 곁에는 망연자실한 채 서있는 사랑하는 제자가 서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19:26, 27)

주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지만, 어머니를 염려하는 ‘사람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혈연을 넘어서는 사랑의 관계가 가능함을 믿었고, 또 그런 삶을 제자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이가 내 어머니요 형제자매라 하셨던 주님이 아닙니까?

아, 그런데 지극한 고통이 밀려옵니다. 육체의 아픔보다 더한 아픔,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주님은 한 평생은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서 살아온 나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빛으로, 능력으로, 말씀으로 아들의 삶 속에 현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27:46)

16세기에 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표현대로 ‘어둔 밤’이 그의 영혼에 내린 것입니다. 낯설고, 고독합니다. 아무도 그의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이 외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테러로 말미암아 가족을 잃은 사람들,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평생을 살아온 고향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 감방과 수용소에 갇힌 외로운 사람들, 부드러운 말 한 마디를 염원하는 사람들, 미래의 희망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 억압 속에 살고 있는 여인들, 외로운 노인들…그 수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주님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절대적인 고독의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완강합니다. 하지만 십자가 아래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조차 주님께는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물과 피가 쏟아지면서 주님은 입은 바짝 타오릅니다. 그의 입에서 물기조차 머금지 못한 소리가 비어져 나옵니다. 

목마르다.(요19:28)

이 말씀은 그의 몸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을 드러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4:14) 하신 주님께서 목마르다 하십니다. 사람들이 달려가 해면에 신 포도주를 듬뿍 적셔서 우슬초 대에다 꿰어 주님의 입에 갖다 댑니다. 호의일까요? 짓궂은 장난일까요?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은 지금도 목이 마르시다는 사실입니다. 용산 철거민 참사로 목이 바짝 타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학살극 때문에 목이 타고, 가난한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는 세태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주님의 타는 목을 해갈시켜 드려야 할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요19:30)

마침내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보냄을 받은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당신의 일을 다 마치셨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는 단어는 목적을 완수했다는 뜻입니다. 보냄을 받은 자로서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님은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놓았습니다. 그의 찢기신 몸은 새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입니다. 그의 손에 난 못자국은 용서와 치유와 화해의 샘입니다. 주님은 이제 마지막 숨을 모아 최후의 말을 합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눅23:46)

여전히 하나님의 침묵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신뢰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존재 전체를 아버지의 품에 봉헌합니다. 이보다 큰 신뢰는 없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우리에게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판화가인 이철수는 한 노 성직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해야 할 일이니 한다고 생각해야지, 이겨야 한다,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런 생각은 않아야 해. 이기려 드니 상처 입고 마음 상하고……그렇지 않은가”(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습니다>>, 69쪽)

그렇지요? 주님은 그런 계산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해야 할 일이기에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 이후에도 인류의 고난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 주님은 지금도 그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 길을 걷는 것이 구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들려주신 말씀은 우리 삶의 소명이기도 합니다. 이 한 주간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소망하십시오. 고난과 구원의 신비에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인생을 경축하며 살아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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