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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를 져야할 때 (요 12:23~30) - 고난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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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져야할 때 (요 12:23~30)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영광을 말씀하시면서 한 알의 밀알로서의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라고 기도하였는데 고난의 십자가를 짐에 대하여 예수님도 인간적인 고뇌를 느끼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 마음이 괴로우니 ...” 라고 한 민망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타랏소’ 라는 단어로 ‘불안하다’ ‘흔들린다’ ‘고통스럽다’ 라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심리적으로 갈등하고 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한 갈등의 순간에 예수님은 이 때를 면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 때란 어떤 때입니까?
바로 십자가를 져야 하는 때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때를 면하여 달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피하여 안 지고자 하는 의도에서 드린 기도가 아닙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느끼는 십자가의 깊은 고통과 심리적 갈등을 그렇게 표현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왜냐면 바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이것은 위대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때를 위해서왔습니까? 
바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때 그 때를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예 처음부터 십자가를 지실 것을 생각하고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때를 위해 오셨고 그 고난의 때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생각하였습니다. 
즉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영광의 때가 왔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자신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결코 그 때를 놓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요 12:28절의 기도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러한 기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영광의 때 이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그 때입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어떤 고난의 십자가를 졌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바로 우리에게도 허락되어있습니다. 
일찍이 바울 사도는 고후 1: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그리고 빌 1:7절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한 자들을 언급하면서 그들 모두가 은혜에 참여한자가 되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우리는 십자가의 때가 우리에게 왔을 때에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영광의 때가 왔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하는 말입니다. 일찌기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 핍박자들에게 끌려가서 협박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나오면서 오히려 즐거워하였다고 행 5:4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주를 위한 고난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한 십자가를 아무나 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일에 합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 말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끌려가서 고난을 받은 것을 어떻게 이해하였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위해 능욕 받는 일에 자격이 있는 자들로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으로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한 십자가를 기뻐하는 사람들이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입니다. 
마 25:23절에 의하면 심판 날에 주인이 칭찬하는 청지기는 주인의 맡긴 일에 충성한자들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지어다”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말에 우리는 귀를 귀우려야 합니다. 
주인은 그들이 얼마의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칭찬을 받은 것은 분량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작은 일에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받은 칭찬과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받은 칭찬이 동일하고 그어떤 숫자적인 표현도 없다는데서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일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 남들이 귀찮아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남들이 거뜰떠 보지도 않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쉬운 일들이 아닙니다. 고난과 핍박 그리고 엄청난 인내와 헌신이 각오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분이 무명으로 천 만원의 건축 헌금을 내셨습니다. 
저는 그 분이 낸 천 만원이라는 액수의 헌금이 귀해서 라기 보다 그분이 쓴 기도제목이 너무 귀해서 마음이 감격스러웠습니다. 그의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자가 되렵니다.”였습니다. 
천 만원이라는 돈은 적은 것이 아닙니다. 
무명으로 드렸기에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교회의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스스로 거룩한 부담을 느끼면서 그것으로 주님이 기뻐하신다면 주님의 즐거움에 자신이 참여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실 때 주님의 그 즐거움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린 자신의 세속적, 육신적 영광을 위해 주님을 희생시키지 맙시다. 
주님처럼 고난의 때가 왔을 때 기꺼이 십자가를 집시다. 그러면 그것이 주님의 영광이 되고 주님이 영광을 누리실 그 때 우리를 그 잔치에 초대하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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