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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기쁨 (행 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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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행 8:1~8)
 

왜 우리 교회는 해마다 총력 전도를 합니까? 

1. 영혼구원은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성장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이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2. 총력전도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입니다. 
‘해야지, 해야지’하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여 미뤄온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겨울이 다 지나가서 옷장 정리를 하긴 해야 하는데.......’하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여 미루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구제품을 수집한다.’는 캠페인을 계기로 겨울옷을 정리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캠페인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를 하긴 해야 하는데.......’하면서도 기회를 잡지 못하여 마음에 부담감을 안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총력전도는 이런 분들에게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3. 총력전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전 교회가 새롭게 체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지만 오늘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복음을 전할 때 충만히 임하십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교회에 주시는 축복입니다. 
심령이 컬컬한 분들은 전도하십시오. 전도하면 나도 살고, 남도 살고, 교회도 삽니다. 
성령은 복음사역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을 강열하게, 실제적으로, 구체적으로 체험하려면 복음전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에 겨울철이 되면 친구들과 함께 불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불놀이를 하다가 옷을 태웠고, 불이 너무 크게 번져 어른들로부터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논둑이나 강둑에 불을 놓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불을 옮겨 붙이다보면, 나도 모르게 불이 너무 넓게 번질 때가 있습니다. 
그 불길을 잡느라고 혼이 난 적이 많습니다. 
이때에 잔디에 붙은 불을 끄느라고 다급한 마음에 소나무 가지를 꺾어 불길을 때리지요. 
그러면 불길은 사위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똥이 튀는 대로 더 멀리 더 넓게 퍼져갑니다. 
여러분도 이런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씨를 가진 성도들을 때려서 흩으심으로 온 세상 만방에 복음을 전파하시고 계십니다. 
1절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흩어진다’는 말씀은 헬라어 동사로 ‘디아스페이로(diaspeiro)’인데 ‘분배’를 뜻하는 전치사 ‘디아’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이로’의 합성어입니다. 
이 말은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목적으로, 복음의 씨앗 된 성도들을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신 것입니다. 

행1장8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부탁하신 대위임장이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일을 감당하도록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숫자적으로도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루에 3,000명의 그리스도인이 더하는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숫자는 자라서 5,000명이 되게 하셨고, 또 더 많은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들은 당연히 그 힘을 가지고 유대와 사마리아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데 소극적이었을까요? 

① 예루살렘교회는 자기 교회의 부흥과 발전에 만족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격려하고, 교제하고, 신앙생활 하는데 만족했습니다. 
“이 정도면 딱 적당하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다” 
“우리들끼리 이해하고, 우리들끼리 사랑하고, 우리들끼리 잘 지내고, 우리들끼리 잘 해보자” 
② 저들은 예루살렘의 복음화가 끝난 다음, 다른 지역에 관심을 가지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③ 유대인인 저들은 이방인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복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 축복의 복음을 나누기 위하여 흩어지도록 몰아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핍박’이었습니다. 

선교 역사를 뒤돌아보면, 복음을 받아들인 민족과 국가가 그 복음을 다른 민족에게 전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쇠퇴시키거나 침입을 받게 하여 복음을 흩어지도록 했음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AD375년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프스산 너머 북유럽의 광활한 선교지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찬바람 맞아가면서 알프스 산맥을 넘기보다는 따뜻한 지중해 해변에서 안락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훨씬 더 좋았기에 주님의 지상명령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과 AD 410년 로마는 북쪽 야만족인 비시고트족, 오스트로고트족, 반달족 등에 의해 침략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에게 선교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이교도들이 기독교 국가를 침입함으로 복음을 흩었습니다. 
그 결과 피동적이긴 하지만 복음은 서유럽 전체로 전파되었습니다. 
음미해보아야 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개인이 잘 될 때, 교회가 잘 될 때, 나라가 잘 될 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잘 되게 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우리는 사명자입니다. 
4절을 봅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쌔" 
‘두루 다니며’라는 말은 ‘가는 곳마다’라는 뜻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핍박을 피하여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도망을 쳤다면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끽 소리 한마디 못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맞습니다. 
그러나 4절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어떻게 도망 다니는 사람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숨어 있어야지 ‘두루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복음 때문에 도망 다니는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사명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은 아무리 어렵다하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사명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봐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 상황 속에서 사명자로 우리를 파송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생활이 어려워 파출부로 일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가 내가 이 꼴이 되고 말았는가?’라고 한탄하고 실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사명자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사명자로 파송하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고백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믿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의 마음속에 큰 감동으로 다가 온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자는 누구의 명령을 받드느냐에 따라서 그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직장인으로 외국에 파견되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입장이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여기 왔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입장은 ‘범부’에 불과합니다. 
‘나는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 위하여 여기 왔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입장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애국자’가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여기 왔다’고 믿으면 그 사람의 입장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대사’가 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명을 받들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자입니다. 

2. 우리는 환영받는 자입니다. 
5-6절을 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는 말은 ‘그의 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더라.(they all paid close attention to what he said.)'는 뜻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어디를 가나 배척을 받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환영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그들의 말씀을 좇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행18:9-10절에 보면,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명할 때 많은 배척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증명할 때 많은 박해를 받으니 실망도 많이 됐겠지요!  
‘이젠 다시는 이곳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날 밤에 주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바울은 모두에게 배척받은 것으로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너의 복음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단다.” 
“아니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단다.” 
“아니다!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단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말하면 혹시 그 사람은 귀찮게 여기지 않을까?’ 
‘내가 말하면 아마 그 사람은 입장이 곤란해질 거야’ 
‘배울 만큼 배우고, 사회생활도 할 만큼 한 사람에게 믿어라 말라 얘기하는 것은 점잖지 않는 짓이야’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이끌어줄 손길을 기다리는 자가 많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소식을 갈망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많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끔씩 참석합니다. 
50대 중반의 친구들은 대부분 퇴직하여 수입원이 없습니다. 
건강도 3-40대만 못합니다. 

펀드에 들어놓은 적은 돈은 반 토막이 나고 말았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 뭐든 선뜻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의 학자금, 부모 부양 등으로  돈은 많이 필요합니다. 
친구들은 고백합니다. 
“붙들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뭔가 듣고 싶어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적지 않습니다. 

3. 당신은 기쁨을 선사하는 자입니다. 
7-8절을 봅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짧은 구절이지만 그 당시 의학으로는 아니 지금의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들입니다. 
현대의학이 귀신을 내어 쫓을 수 있나요? 현대의학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나요? 
치료가 어려운 질병들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지만 치료가 불가능했던 질병들을 몇 가지 나열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구원’이란 ‘-로부터 구하다’ ‘-로부터 건져내다’ ‘죄로부터 구해내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구원의 내용을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구원이란 죄를 용서받고 의인되는 것을 말합니다. 
엄청난 일이지요? 
2) 구원이란 삶의 두려움-질병에 대한 불안, 내일에 대한 염려, 자녀에 대한 걱정, 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합니다. 
시121:5-7절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3) 지옥으로부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은 이 말이 실감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그 순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소중함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성에 큰 기쁨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기쁨이 없겠어요? 
이런 횡재가 어디 있겠어요? 
오늘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TV, 라디오, 휴대폰, 인터넷, 신문을 통하여 넘치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기쁨을 주는 소식은 얼마나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큰 기쁨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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