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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또 다른 우리의 모습 (마 21:6~11, 27: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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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우리의 모습 (마 21:6~11, 27:22~26)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1984년, 체코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발표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인 이 소설은 인간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그리고 인간과 역사와의 관계를 특유의 지적인 문체와 난해함으로 심도 있게 풀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소설의 결론은 이미 그 제목에서 충분히 나타났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비록 그가 육체와 영혼, 삶의 의미와 무의미, 시간의 직선적 진행과 반복,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부정과 긍정, 그리고 우연과 운명 등, 다양한 영역의 극과 극을 비교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그가 하려고 한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참으로 가볍기 짝이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사람이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참으로 가볍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금방 웃었다가 금방 울고, 금방 한숨을 푹푹 쉬다가 금방 노래를 흥얼거리고, 금방 아파 죽겠다고 끙끙거리다가 금방 나다니고, 금방 어느 사람이 싫어 원수 같다고 하다가 금방 그 사람과 웃으면서 농담을 하고 …. 사실 우리 사는 모습이 대부분 이렇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의 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어릴 때 어머니께서 자주 쓰시던 “졸갑스럽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것이 표준말이더라고요! 그 의미는 ‘매사에 진중하지 못하고 가벼워서 작은 일에도 펄펄 뛰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이지요. 그런데 ‘종려주일’과 그 후 한 주간 즉 ‘고난주간’에 예수님 앞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가벼운 존재, 즉 쉬 변하는 존재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 자체와 처신의 가벼움을 보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들만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의 모습은 오늘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서요! 

2. 무리들의 상반된 모습

1) “호산나” 외치는 모습(21:6~11)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 성지주일(聖枝主日), 혹은 수난주일(受難主日)이라고도 하는 오늘은 4세기부터 지켜온 기독교의 전통적인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지요.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전 날 예수님께서 머무셨던 베다니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다니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그의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 삼남매가 사는 곳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당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이 사실인가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하여 베다니로 몰려들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종려주일 전에 베다니에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베다니에서 하룻밤을 묵은 예수님께서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가시자, 이미 베다니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고, 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혹은 원래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성 안에 있다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부터 성 밖으로 나와 예수님을 기다리다가 맞이했습니다(요12:12~13). 즉 그날 예수님을 중심으로 뒤따르던 무리들과 맞으러 나온 무리들의 수가 엄청났다는 말인데요. 학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의 수가 대략 27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이 엄청난 순례자들로 인하여 예루살렘과 그 주변 성읍들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북적거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손으로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입으로는 “호산나”를 외치면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이 외친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 있는가 하면, 또한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여!”라면서 예수님을 환영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호산나”라는 말에는 ‘폐하 만세’라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한 데는 그 당시 이스라엘 최근사(最近史)에 있었던 ‘마카비 장군’이라는 걸출한 인물 때문이었는데요. 그가 셀루쿠스 군대를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왕으로 등극한 그때를 추억하면서, 예수님이 그와 같은 왕으로 오셨다는 의미로서 그렇게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즉 무리들은 죽은 자를 살려내시고 오병이어로 굶주린 백성을 먹이신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여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하고서 이런 대대적인 환영을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수의 환영 인파와 예수님을 환호하는 소리가 얼마나 컸든지 10절은 “온 성이 소동했다”고 합니다(10). 여기서 “소동하다”는 말에는 헬라 원어로 “지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의 입성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그 인근 지역에 마치 지진이라고 일어난 듯 하였고, 사람들의 중심 또한 흔들릴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은 무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도에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행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성경 스가랴서 9장의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말씀에서 어린 나귀와 전쟁을 위한 말을 비교했습니다. 만약 메시아가 말을 타셨다면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칼과 창을 능숙하게 다루는 왕의 모습이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왕은 왕인데 겸손함과 낮아짐으로 왕권을 행사하는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나귀를 타신 왕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통하여 진정한 왕이 되신다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의 진의(眞意)는 무리들만 몰랐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을 엄청난 무리들이 환영하는 것을 보고서 대단히 흥분했습니다. 그들은 ‘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니 예수님은 정말 로마를 물리칠 다윗과 같은 왕이심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기록은 하지 않았지만 종려주일 당일, 가장 흥분하고 날뛰면서 환호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지 않을까요? 아무튼 무리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제자들이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드디어 주님께서 구원을 이루실 때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선포하게끔 군중들의 환영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오늘의 첫 번째 본문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라고 외친 이 무리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을 목격하고 확인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무리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본 바리새인들은 대단히 낙담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19절,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낙심할 정도로 예수님께서 대대적인 환영 인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지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무리들을 잘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렇게 환호했던 무리들이 며칠 못가서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2)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치는 모습(27:20~2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지 5일 째 되던 날,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그 즉시로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새벽에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로 끌려가서 신문(訊問)을 받으셨습니다. 공회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간 이유는 ❶ 사형을 내릴 권리가 자신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❷ 그리고 또, 설사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소한다고 할지라도, ‘신성모독죄’ 만으로는 로마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사형에 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범’으로 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치인들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고 치밀하고 계산적입니까? 빌라도는 그동안 예수님에 대해서 보고를 받았고, 그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자신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억지를 들어줄 수도 없었지만, 자신이 다스리는 곳에 어느 정도의 자중지란(自中之亂), 즉 유대인 내부의 갈등이 있으면 그 내부의 갈등 때문에 로마나 총독에 대한 불만이 중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가 말한 심상치 않은 꿈 이야기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의 신문(訊問) 과정을 거치면서 그가 매번 내린 결론은 예수님에게는 죽일만한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흥분한 무리들을 달래기 위하여 몇 대 때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그 협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생각해 낸 것이 예수님을 풀어주되 합법적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마침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중 한 명을 석방시켜주는 이른바 ‘특별사면제도’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21). 하지만 무리들은 대제사장들의 충동을 받아 당시 민란을 꾸미고 사람을 죽여 체포되었던 바라바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의외였습니다. 그렇게 큰 해를 끼치지 않은 예수보다 유대인이나 로마인 모두에게 해를 준 바라바를 풀어달라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하고 무리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22). 유대인들과 협상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형을 줄여보려고 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22). 사형 중에도 가장 무거운 형벌을 그들이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는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물었는데요(23). 이 말은 ‘너희도 알고 나도 아는 대로 이 예수는 죽일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더욱 큰 소리를 지르면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23). 우유부단하고, 또 로마로 돌아가 더 높은 자리에 이르고자 하는 욕심을 가진 빌라도는 더 이상 무리들의 외치는 소리를 거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에게는 채찍질을 하여 십자가에 못 받도록 형을 선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라”고 외친 이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이들은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을 뒤따르거나 앞에서 맞이하면서 “호산나”라고 외친 바로 그들입니다. 그야말로 조변석개(朝變夕改), ‘아침에 바꾼 것을 저녁에 또 다시 바꾸는 인생들’, ‘그 성질이나 태도가 변덕스러운 사람들’, ‘어떤 목표나 계획이나 결정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자주 변경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지요.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변덕(變德)”은 ‘이랬다저랬다 잘 변하는 태도나 성질’을 말하는데요. ‘변덕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은 죽이 끓을 때 여기저기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방울을 만들었다가 금방 꺼져버리고 다시 방울을 만드는 것과 같은 모습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왕으로 환영하던 그 무리들이 불과 며칠 만에 변해서는 “죽여라”고 외치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이러한 모습은 그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설교 시작에 소개해 드렸던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말하고자 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진득하니 한결같은 마음과 태도로 살아야 하는데도, 이렇게 저렇게 너무 쉽게 변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도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하는 것,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두 본문에 등장하는 같은 무리들의 너무나 다른 모습에 놀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3) 진득하니 변하지 않으신 예수님

여러분, 혹시 “다중인격”이라는 병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1999년 7월 5일, 미국 워싱턴 대법원은 ‘빌 그린’이라는 사람에 대한 고등법원의 선고를 재심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린은 한 여성을 잔인하게 강간한 죄로 기소되었으나, 그가 ‘다중인격장애’라는 병을 앓고 있는 정신질환자로 판명되자 대법원은 재판을 다시 하라고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데이트라인>이라는 프로그램 진행자와 감옥에서 인터뷰를 했는데요. 인터뷰 도중 그는 여러 차례 각각 다른 인격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자세, 목소리, 억양, 말하는 스타일 등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수시로 변했습니다. 이것을 TV로 본 시민들은 그의 무죄를 요구했고, 피해 여성조차 그가 유죄 선고를 받는 것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다중인격에 대해서 최초로 다룬 소설이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지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1886)일 것입니다. 학문적 열정과 고매한 인격을 가진 지킬 박사, 그러나 자신이 개발한 약을 먹은 그는 사악한 하이드로 변해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나중에는 아예 하이드로 변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렇게 이 소설은 한 사람의 너무나 상반된 모습을 다룬 것인데, 이것이 현대에 와서 하나의 병으로 인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들은 아주 많으며, 이 병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 역시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다중인격이라는 병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종종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마다, 은혜받고 감동받을 때마다, 정말 주님께 부끄럽지 않는 멋있는 신앙인으로 살 것이라고 결단하고, 그리고 그 직후에는 그렇게 살 것처럼 보이다가도, 금방 변해버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종종 ‘다중인격장애’라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빨리 변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저와 여러분이 다중인격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본 이 무리들의 너무나 상반된 모습에 대해서 함부로 손가락질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쉽게 변하고, 시기와 장소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우리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렇게 쉬 변하고, 때로는 너무나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우리 자신을 고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오늘 예수님께서 주고 있습니다. 
❶ 첫째는 여러분 자신이 누군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히신 값으로 하나님께서 사신 하나님의 고귀한 자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 신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아는 것은 존재의 가벼움을 이기는 가장 우선적인 길이 될 것입니다. 즉 함부로 처신할 수 없는 사람임을 자각하라는 말입니다. 
❷ 두 번째는 여러분이 자신의 할 일, 즉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된 것을 알고 예루살렘으로 가셨고, 아무리 자기 곁에서 큰 소리로 환호하여 마치 지진이 난 것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그 반대로 흥분한 무리들이 죽이라고 외치고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일, 자기가 갈 곳이 분명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 주님이 살라하신 삶의 모습으로 산다면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3.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성도

말씀을 맺겠습니다. 현대는 변해야 산다고 말합니다.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면 살아남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헌신된 삶이요, 이 땅과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삶과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너무나 빨리, 그리고 쉽게 돌변해 버린 무리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도 여러분들이 이 무리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시간과 장소와 일과 대하는 사람에 딸라 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십자가를 향하여 뚜벅 뚜벅 걸어가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온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큰 소리로 자신을 향해 환호하던 무리들이 금방 돌변하여 자신을 죽이라고 외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이죠. 이제부터 여러분의 삶도 예수님과 같이 되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만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바로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종려주일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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