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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고후 5: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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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 (고후 5:13~15)


오래전 어떤 고명한 목사님이 고난주일 낮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저녁 예배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특별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미리 깊이 묵상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저녁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목사님은 촛불을 켜들고는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그림 앞으로 다가 갔습니다. 그는 먼저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이마에 촛불을 비추었습니다. 한참 뒤 그는 말없이 못 박힌 예수님의 손과 발을 촛불로 비추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에 찔려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옆구리로 촛불을 옮겼습니다. 이것이 그의 설교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참석한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번 주간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수난 주간입니다.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은 항상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을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가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주의해서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체 분량의 1/3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 주간, 십자가, 죽음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주석가는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복음서란 무엇인가? 복음서란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한 주간에 관한 모든 사건과 말씀을 기록한 연대기요, 그 나머지 모든 부분은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려 죽으신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1.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의 대가입니다.

우리가 죄 값으로 고통 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이 얼마나 잔인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여러분들도 이미 자주 들어서 잘 아시지요? 손과 발에 5-7인치나 되는 대못을 박아 나무에 매다는 이 형은 천인공노할 가장 잔혹한 고통을 안겨주는 사형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약 시대에 미리 내다보고 예언한 다윗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을 더 이상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고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인에게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 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5절에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2. 십자가는 내 대신 주님께서 당하신 수치의 대가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다음에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서 네 깃으로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군병들은 주님의 옷을 제비뽑기 하여 나눠가졌습니다. 주님은 완전히 발가벗겼습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그 발자국을 따라 걸어가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참혹한 수치와 모멸과 모욕을 당하셨는가를 감히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매질을 당하셨습니다. 얼굴에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으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왜 주님께서 이 같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셔야 했습니까?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도 죄를 범하자마자 금방 부끄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뭇잎을 엮어 가지고 하체를 가리고도 너무나 부끄러워 나중에는 숨어 버렸습니다.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아무리 철면피한 인간도 쇠고랑을 차고 포승에 묶이게 되면 차마 얼굴을 바로 들지 못합니다. 그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얼굴에 옷을 뒤집어씁니다. 이렇듯 죄는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우리가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천국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잠시 후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말끔히 제거해 주시는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우리가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3. 십자가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사랑의 대가입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남을 대신하여 죽어 준 사람이 있습니다. 독일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이 차례차례 가스실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이름이 불린 가요니체크는 독일군의 발에 매달려 사정했습니다. 자기는 젊은 아내와 갓난아이까지 있으니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한 신부가 나서서 군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자기가 끌려 갈 예정일이 언제인지는 몰라도 이 청년과 순서를 바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군인도 신부의 청을 받아들여 그날 신부는 죽었고, 가요니체크 씨는 연합군이 해방시킬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로마 교황청은 후일 이 신부를 성자로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1972년 10월 그 자리에 가요니체크씨가 초청돼 짧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잊을 수 없는 아침 신부님이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끌려가실 때,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알았습니다. 그 때 나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곁에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은 몇 년 전 화재 사건을 목격한 어떤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얼마 전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 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불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방화범과 저 자신을 비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지만 6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대신 살아남았다. 너는 어떤가? 너는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덕분에 지금 살고 있지 않는가? 지금 저 사람을 속으로 욕하면서 차라리 저 사람이 죽었으면 하고 있는데, 진짜 죽어야 될 사람은 너야. 너는 얼마만큼 떳떳한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그러다 보니 남을 욕 하던 것이 결국은 나를 욕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고후 5:14에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선택한 모든 사람을 뜻하고, 전 인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서 죽었고,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죄 가운데서 죽었고, 허물로 죽었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신 우리들의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완전히 죽고, 망하고, 영원히 파멸되었을 사람들입니다. 

사랑의 힘이란 대단합니다. 야곱은 라헬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7년간의 고달픈 머슴살이를 불과 수일밖에 안되는 것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3절에서 고백하기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미쳤다고 하던지 온전하다고 하던지 상관치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주님께 그의 몸을 드리고, 재산을 드리고,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드려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사랑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아니고, 바울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믿음이 자랄까요? 벧후 3:18에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믿음이 자랄 수 있습니다. 또한 엡 3:18-19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헌신, 우리의 충성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만큼 깊이 느끼고 깨닫느냐는 문제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작시자 E. 하윗(Hewit)은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사랑, 주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보답하며 살아야 합니까?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산 자들’이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우리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곧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주님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혹 우리 가운데 주일 날 한 두 시간 내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분은 없습니까? 그는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례를 받고 제직까지 되어서도 십일조 헌금 하나 아까워서 바치지 못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는 아직도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아직도 구속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아직도 사로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것이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의 고백이요, 다짐이요 결단일 것입니다. 내 대신 죽으시고 나를 구원해주신 주님, 그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포로가 되어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미칠 듯이 주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충성하고 헌신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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