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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일어나 기도하라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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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기도하라 (눅 22:39~46)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며,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일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또한 고난주일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난주간 한주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이 많기도 하고 그 모두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모질고 아픈 고난이었습니다. 이 일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예수님께서는 이 일들을 기도로 맞으시고 이기셨고 제자들과 우리들에게는 너희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일어나 기도하므로 다가오는 고난을 모두 이길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파스칼은 인간을 두 가지로 비유해서 정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거 모르는 분 없을 것입니다.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하다, 그 말입니다. 그저 조금만 삐걱하면 부러지고 깨지고 넘어지고 상처받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갈대같이 약한 존재이지만 인간이 소중한 것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맑은 이성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생각해봅니다. 

사람이 동물보다 못한데가 너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육체의 강인함과 힘만 본다면 인간보다 강하고 튼튼한 동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먹는 것도 사람은 하루에 세 끼 먹으니 이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런데 어떤 동물은 한 번 먹고 1년 삽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사람이 뭐 잘난 척하고 만물의 영장이다 하지마는 영장됨은 결코 육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그 속사람에 있습니다. ‘생각하는 갈대다.’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라 여겨집니다. 두 번째는 사람을 오르간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두 번째 비유는 여러분이 잘 모르실 것 같습니다. 

오르간을 대분해보면 일단 오르간이라는 기계가 있고 또 연주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오르간을 그냥 연주하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람입니다. 오르간은 바람을 넣어야 연주가 됩니다. 옛날 오르간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풀떡풀떡풀떡... 발로 밟아서 바람을 공급했습니다. 그래서 바람풍, 풍금이라 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도 옛날 것은 그랬습니다. 오르간을 치는데 옆에서는 한 사람이 계속 바람통의 손잡이를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 돌리고 있는 동안만 치는 것입니다. 그랬었는데 요새는 모터로 바람을 돌려서 공급합니다. 어쨌든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바람이 들어가지 않으면 오르간은 헛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생각합니다. ‘인간이라는 오르간이 있다. 이 오르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령의 바람이 들어가야 소리를 내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이 인간되는 것이다.’ 그런 영적 힘이 없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기 덩어리나 진배없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오르간과도 같다-파스칼은 이렇게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의 바람이 인간에게 계속 공급되고 역사될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된 자기모습, 자기능력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서 더 많이 기도하게 되시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영력이 갑절, 아니 칠배나 더하여 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몸 말.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한 사역을 이루시기 직전,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 시간에 겟세마네동산(감람산)에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그 기도하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너무 잘 알기에 오히려 그대로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 생애의 클라이막스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 생애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베들레헴에서 시작해서 그 끝까지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가장 소중한 결정적 시간이 눈앞에 왔을 때,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그때 예수님께서는 뭘 생각하셨는가-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알고 지나갈 것이 있습니다. 그래, 기도하셔서 어떻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바꾸셨습니까. 

원수가 무릎을 꿇었습니까. 가야바가 죽었습니까. 로마 군병이 망해 없어졌습니까. 결코 그런 상황적 변화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예수님, 위대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형편을 바꾸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라지셨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승리가 마침내 세상을 정복하는, 세상을 이기는 것으로 파급되어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십자가를 안 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집니다. 빌라도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그 능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결국은 나 자신, 내가 어떻게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끝을 맺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세상사, 엄청난 세상사건, 부딪히는 엄청난 일들... 무서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십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뜻 앞에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먼저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 학습법」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김동환군이 자기가정의 가정규칙을 말합니다. 딱 한마디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밥을 먹지 마라. 성경보지 않고는 공부하지마라.’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작은 책자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언제나 실패의 원인은 기도 없음에 있다.

’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업에 실패를 했을 때, 자본 때문이요, 이웃 때문이요, 정치 때문이요, 경제 때문이요, 기술 때문이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기도 없이 한 일은 반드시 실패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가 먼저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세상으로 기우는 우리생각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바로 그것이 기도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을 뵈었을 때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보름스의회에 끌려가 재판을 받습니다. 생사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때 그는 재판관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거기서 하늘을 바라보고 토해낸 유명한 외침이 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그렇게 외치며 루터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저도 한번 가봤습니다. 스투트가르트에 가보면 있는데, 누가 거기다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여기 서서 루터가 ‘오 하나님이여, 나 여기 섰습니다’하고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 어려운 시련을 그가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타락한 영국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순간이 중요합니다. 결정적인 시간일수록, 급한 일일수록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실 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이 무슨 응답입니까. 이 십자가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빌라도도 아니고 가야바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십자가라고 확실하게 사건을 정립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입니다. 그 생각, 그 결정적인 결론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면서 현실을 이해하시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거짓된 재판, 가야바의 음모, 가룟 유다의 배반... 아주 복잡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셨지만 그 병자들 다 어디 갔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지시는 일에 저들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았습니다. 3년이나 따라 다니며 그 많은 기적을 보고 체험하였던 제자들은 다 어디갔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다가도 화가 납니다. 이 사람들 지금 어디 갔나? 재판정에 나타나서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할 텐데...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동요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모순과 부조리를 통하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오히려현실을 넘어서서 믿고 현실을 넘어서서 소망하고 현실을 넘어서서 사랑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말씀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로마 감옥으로 갑니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 맹랑한 일에 원인도 모른채 로마 감옥까지 갔습니다마는 알고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이제서 안다고 간증하게 됩니다. 여러분, 현실이 막막합니까? 그 깊은 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기도 중에 깨닫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자기이해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나약함이, 그 인간적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보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는 말씀까지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뇌를 아주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예수님 자신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의 나됨의 모습을, 내 나약한 모습을 기도 중에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한 작가의 작품을 통해서 추리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마는 예수님의 고뇌를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 있습니다. 「Super Star Jesus Christ」라는 작품인데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작품입니다. 

그 내용 중에 오랫동안 기억되는 충격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외칩니다. ‘이 일은 당신이 시작했습니다. 나는 따라왔습니다. 이렇게, 이렇게 3년 동안 지내왔습니다. 내일 아침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데 Should I die? 내일 아침에 꼭 죽어야 하겠습니까?’ 간절하게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오는 조용한 음성을 듣고 예수님 대답하십니다. ‘I will die. 죽겠습니다. 그런데 무슨 보상이 있겠습니까? 나의 이 죽음에 대한 보상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말합니다. ‘나는 죽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은 그 작가의 상상력의 소산입니다마는 ‘Kill me, take me now before I change my mind.’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지고 가슴을 뭐가 크게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생명을 취해주시옵소서. 나를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 죽여주십시오. 내 마음 변하기 전에.’ 인간고뇌를 여기서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마는 그것은 뒤따른 사건일 뿐 결정적인 일은 겟세마네동산에서 끝난 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하는 순간 앞에 있는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위탁해버리셨습니다. 자기 생을 완전히 바쳐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되는 상황은 후속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여기서 그 순종이 결정된 후 엄청난 사랑을, 사랑의 능력을 공급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시게 됩니다. 소망하시고 믿으시기 때문에 그는 사랑하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맨 처음에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이 한마디는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어디까지나 추리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이놈들 두고보자’ 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놈들 심판날에 두고보자’ 하셨다면 이 한마디에 예수님의 거룩한 3년의 역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능력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사랑은 용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능력은 없습니다. 어떤 정황에 있더라도 높은 소망 중에 모든 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다 용서합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러는 순간은 메시야의 모습이 확증되는 순간입니다. 용서란 이렇듯 위대합니다. 가장 큰 사랑이 용서요 가장 큰 능력이 용서요 또한 가장 큰 신앙고백이 용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나에게도 이 기도가 있어야 할 순간이 아닙니까? 

마무리하는 말.

이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나처럼 기도하라. 기도해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해야 나 자신을 알고, 기도해야 앞에 있는 시험을 이길 수 있다.’ 예수님 친히 기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잠시도 깨어 있지 못하느냐,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저들은 어쩐 일인지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이제 원수들이 찾아올 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나가서 십자가를 지셨지마는 기도하지 않은 베드로는, 한번 만용을 부려 칼을 휘두르기는 했습니다마는, 어이없게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이 일 때문에 그는 일생동안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어찌 예수님을 모른다고 합니까. 저주까지 합니까. 왜 그리 됐을까요. 베드로의 실수가 어디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인 중의 깊은 원인, 결정적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문제가 있습니까? 기도합시다. 제가 아는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느날 사무실에 모여 앉아 신문에 난 기사들을 보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에 아이고 이런 끔찍한 일, 아이고 이런 일이 어찌... 하면서 모두들 걱정을 합니다. 이런 얘기들을 하니 이 목사님, 슬그머니 신문을 말아들고 나가십니다. 그래 뒤따라가면서 “어디 가십니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기도하려고.” 가만히 따라가보니 이 신문을 예배당 강대상에 죽 펴놓고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일이 있습니까?” 하면서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뭐 신문 보고, 방송 듣고 뭐 큰일났다느니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이러지 마시고 신문을 펴놓고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세대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내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로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내가 갈 길을 찾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고난주일에 언급해야 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한 주간 당하신 일이나 말씀이 너무 많습니다. 이루다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고 큰 일들 앞에서 기도하셨고, 기도하심으로 그 일들을 당하시고 승리하셨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내일부터 시작하는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어 깊이 기도하여 주님이 고난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어 승리하셨듯이 여러분들의 삶 속에도 승리의 기쁨이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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