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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남은 고난을 채우라 (골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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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고난을 채우라 (골 1:24)
 
 
성경말씀 중에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난해구절”이라고 부릅니다. 이 성경난해구절 가운데는 해석하기에 따라 큰 문제가 생기는 구절들도 있습니다. 교파가 갈리기도 하고 이단시비가 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 한 예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 중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표현이 문제입니다. 글자 그대로 보면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남아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모자라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부족한 것처럼 오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 천주교가 이런 입장을 취합니다.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적 고난이 불충분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의 남은 고난은 성도들의 고난을 통해서 보충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로마 천주교의 “공덕 축적설”이란 교리가 나왔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에서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를 구원하시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필요충분합니다. 바로 본문 앞부분 20절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단번에 화평이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요 19:30절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히 10:10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확실하게 선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을까요? 그 뜻은 무엇일까요? 또 하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궁금증을 가지게 해 줍니다.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가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하신 고난을 말하는가 아니면 신학적인 함축이 담긴 표현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려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하신 고난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직접 당하신 고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한 단서가 있습니다. 고후 1:5를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에서는 “의”(Tou)라는 소유격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격적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주격이 되어 그리스도가 직접 당하신 고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목적격 소유격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목적격이 되어 그리스도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고후 1:5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을 두 번째 목적격 소유격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쳤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해 넘치도록 고난을 당했다는 뜻이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같은 문법적 표현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위해 남겨진 고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고난을 당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찍이 이 점을 깊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행 9:4-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이니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바울이 회심할 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당신께서 박해를 당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할 때 주님께서도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곧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이 됩니다. 
이제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뜻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당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 할 때 고난은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철저하게 박해하는 참혹한 공산정권 치하에서만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저 이슬람 국가나 불교 국가에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 15:19를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당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몇 차례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제가 군에서 군종사병으로 근무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대 살림을 맡은 나이 많은 주임상사가 저를 노골적으로 미워합니다.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오면 보급품을 다 나눠주고는 제 것을 남겨놓지 않습니다. 휴가나 외출 순번도 표가 나게 제게 불이익을 줍니다. 한번은 사단 교회 방문 후 업무가 늦어져서 귀대가 보고한 것보다 조금 늦었습니다. 정말 제 평생 그런 모욕을 또 당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럴수록 이분에게 잘하려고 했습니다. 한 번은 휴가 귀대 때 이분에게 선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잘할테니까 저 좀 예쁘게 봐주십시오.” 이분 대답이 “나는 네가 싫다. 네 가슴에 달린 십자가가 싫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다만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답게 산다는 이유로 여러분에게 어떤 고난이 있습니까? 
고난이 구체적으로 생각이 나십니까? 어떤 고난이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바로 그 고난이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만일 아무런 고난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남들 앞에 예수 믿는 티를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남은”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남은 이라는 말은 헬라어 ‘휘스테레마’(Huisterema)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부족한 것들’, ‘결핍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필요한 것 가운데 아직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 정해진 것 가운데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은 고난’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할 고난 가운데 아직 남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고난에 대한 이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정해 주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채우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자기가 채워야 할 고난의 양 가운데 남겨진 부분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정해진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리스도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하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그 양도 정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저마다 겪어야 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은 우연히 어쩌다가 겪는 고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피하고 싶으면 피할 수 있는 고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고난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고난을 잘 겪어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주신 고난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것들은 다 잘하면서도 우리에게 맡겨주신 고난을 외면하거나 피한다면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한정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이 그 양을 다 채우면 고난을 끝내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고난의 양이 넘어서도 고난이 계속되면 그 때 주님이 친히 개입하셔서 견딜만한 힘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전 10:13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난당할 때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능히 감당할만한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가 그 고난을 끝내게 해 주십니다.

저는 아이라 스탠필(Ira Stanphill) 목사님이 작곡한 가스펠을 참 좋아합니다. 이분은 무려 400여곡의 가스펠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즐겨 부르는 곡들도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라는 곡입니다.
그런데 이 곡은 이 분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만든 곡입니다. 1949년 함께 찬양사역을 하던 아내 젤마가 시험 들어 넘어졌습니다. 죄악의 길에 빠지며 이혼을 당하게 됐습니다. 아이 양육권도 빼앗겼습니다. 졸지에 가정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감당키 힘든 고난 중에 스탠필 목사님은 주님께 엎드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 때의 간증을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이 노래의 제목이 “누가 내일을 주관하시는 지 안다네”(I Know Who Holds Tomorrow)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이길 수 있게 우리의 손을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일을 주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 중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의 손을 꼭 잡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라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말씀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과 당당히 맞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끝까지 이겨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게 맡겨진 고난이라고 판단이 되면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과 맞서야 합니다. 그리고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산악인 엄홍길씨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미터급 16좌를 완등한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고난과 맞서서 싸운 피나는 고통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85년 처음 히말라야 등반길에 올라가 참담한 실패를 겪고 물러섰습니다. 두 번째 도전에는 대원 한 사람이 죽어서 도중하차했습니다. 그 때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재도전하여 첫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1998년 안나푸르나 등정 길에서는 중상을 입고 등산 도중 한 발로 내려왔습니다. 다시는 등산이 어렵고 그저 걸을 수 있음에 만족하라는 의사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브스를 풀자마자 북한산 정상에 도전했습니다. 죽을 각오로 올라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해 1999년에 결국 안나푸르나를 정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런 도전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더욱 잘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고난이 힘겹고 어렵더라도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담대하게 맞서야 합니다.

본문 24절 앞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기쁨으로 받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고난이 교회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 1장을 보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위로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돼서 걱정했습니다. 특히 앞으로 복음 전파가 불가능해 지게 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게 되니까 오히려 복음 전파가 더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선 감옥에서 복음을 전해서 평소에 갈 수 없던 곳에서 복음전파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옥에 갇히니까 자기 반대파가 이 때다 싶어서 세를 확장하기 위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복음이 전해지니 좋은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 고난은 손해처럼 보입니다. 때론 패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더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신 바로 그 거룩한 절기를 맞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담당해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난을 성실히 담당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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