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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내가 가야 할 길 (눅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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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야 할 길 (눅 13:31~35)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인생의 교차로를 만납니다. 교차로에서는 어느 길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어느 한 길을 선택을 하고, 그 길로 발을 들여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인생의 교차로와 거기에 따른 중요한 결단을 해야 되는 또, 선택을 해야 되는 기로에 자주 섭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하나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나는 어떤 배우자와 결혼할 것인가, 또 나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여 한평생을 살 것인가, 이것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선택들이죠. 그러나 이 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 일생뿐만 아니라 영원을 좌우하는 영원한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선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영원한 운명의 귀로에 서서 자신의 가야할 길을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시간 함께 살펴보는 본문을 보면 일단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까 빨리 떠나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킵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자기 동생 필립의 부인이었던, 헤로디아와 눈이 맞아서 그를 자신이 아내로 빼앗았습니다. 이것을 세례 요한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자,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로 세례 요한을 처형을 시켰던 인물입니다. 그가 이제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참 고마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 3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의미 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영어 성경에 보면 “I MUST BE ON MY WAY" 이는 꼭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죽으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저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 죽으로 가시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여기 34절을 보면 주님의 심정이 어떤가를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에 품듯이, 얼마나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고 했느냐! 그러나 너희들은 원하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려고 하는 것은 본능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는 것은 그 새끼가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닭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나운 매가 병아리를 채 가려고 하면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숨깁니다. 그리고 수탉은 털을 세우고 매와 일전을 불사합니다. 매처럼 날카로운 부리도 없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지만, 매와 일전을 불사하는 것은 병아리를 지키려고 하는 본능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너희를 모으려고 했는데, 너희를 지키려고 내 한 목숨 죽어도 좋은 목숨으로 너희를 사랑했는데,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절한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거절을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호의를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진심을 거절 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자식에게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거절당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절당하는 것처럼 참담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은 자신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도성을 향해 가십니다.

눅 19:41절에 보면 마침내 주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막상 멸망당할 예루살렘이지만 당신의 눈으로 보니까 가슴이 미어 터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신 것이 3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한 번, 그리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있는데 그 때에 통곡하며 우신 것으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여기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는 장면입니다.

여기 ‘우시다’라는 헬라어는 ?클라이오(κλαιω, klaiw)'인데?“소리를 내어서 울다”, “통곡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음과 관련이 있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우리가 압니다. 주님께서 그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깨우쳐 주어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을 보고 우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 이 땅에 오셔서도 제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쏟으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아닙니까?

제가 지난번에 여행 중에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존큐”라는 영화인데 여러분도 한번 꼭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흑인 노동자 가정인데, 참 평범하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살 정도 되는 아들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그라운드에 쓰러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일하는 보험회사에 알아보았더니, 이 보험회사는 좋은 회사가 못되어서 아들의 병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7만불, 8만불 들어갑니다. 백방으로 돈을 빌리고, 가제도구를 다 팔고 해도 모자라기만 합니다. 대신 유일한 방법은 심장을 이식 받는 일인데, 그 수술 리스트에 올리고자 하면 7만 불을 내라는 것입니다. 수술비는 총 25만 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뛰어다니다, 뛰어다니다 안 되니까 결국 권총을 들고 병원 응급실 의사를 인질로 잡게 됩니다. 경찰은 이 사람을 사살하려고 하나, 사실 권총에는 총알이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소란 중에 경찰하고 대화하는 것이 방송사를 통해 연결되어 전국에 방송되고 맙니다. “아들아, 어떻게 잘 지내니. 아프진 않니? 아빠가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내가 분명히 약속할게. 너를 살릴 거야.” “아빠! 나는 아빠를 믿어요.” 전국에 방영이 되었습니다. 대책이 서지 않고 끝내는 경찰에서 저격수를 보내기로 하니까, 아버지는 드디어 결심하고 의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을 살리는 방법은 한 가지 방법밖엔 없는 것 같다고, 자신은 돈이 없지만 당신이 도와주면 가능한데, 자신이 권총으로 자살할 테니 심장을 꺼내어 아들에게 주라고...... 이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울리는지요, 비행기 안에서 울면서 봤습니다. ‘하나님, 저에게는 아직 저 사랑이 없네요.’ 회개를 했습니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자기가 죽겠다고 하면서 시술 대에 눕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감동 받아서 그 아버지를 말리는데, 의사도 자신의 명성과 재산이 다 무너져도 당신을 도와주겠노라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병원 당국자에 의해 마침내 아들은 수혜자의 명단에 올라가게 되어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아버지의 이 희생이 아니면 아들을 살릴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 역시, 이 더럽고 추악한 냄새가 나는 이 세상 한 복판에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나하나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뭐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나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나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나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찌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역시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고 살아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내 생명보다도 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내가 죽었노라. 그리고 지금도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셔도 우리는 별로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나를 사랑해야 되는지도 잘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그 큰 고통을 당해야 하셨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한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도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당신의 백성을 품으려해도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가 어떤 것입니까? 35절 상반절을 보세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예수님의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30여 년이 지난 후, 66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을 쳐들어 왔습니다. 그 때가 마침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는 주민들과 순례자들로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도 장군은 3일 만에 예루살렘 주위에 토성을 쌓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망을 가지 못하고 갇혔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무려 4년 동안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요세프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 당시 로마 군인의 잔인함이 어떤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당시 성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아사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내 바닥에 패대기를 칩니다. 이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도망간 유대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살던 장소를 찾지 못하도록 성전을 비롯한 전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고 합니다. 이 때 로마 군인들 사이에 돌과 돌 사이에 보물이 숨겨있다는 소문이 돌아 성전의 돌 하나 하나를 철저하게 들어내서 70여 차례에 걸쳐 철저하게 파괴되었습니다.?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미래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우시지 않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절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암탉이 자기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고 품는 것과 같습니다. 병아리는 암탉의 날개 아래서 보호받고, 날개 아래서 성장합니다. 암탉의 날개를 거절하고 벗어난 병아리는 생존조차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아침!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착실하게 출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우리의 고집입니다. 성경에서 문제삼은 고집은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고의적인 고집’입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인 고집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예 예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의 문을 닫고 있어요. 말씀이 안 들어옵니다.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절하는 것입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고의적인 고집의 결과가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루살렘 도시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우리 집이 파괴되는 것도 일이지만, 더 큰 일은 우리 인생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면 우리 인생은 황폐해 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것 하나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주님은 내 영혼이 방황 때에도, 내가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나를 여전히 품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아들 독생자를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피를 토하듯 외치잖습니까?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하신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그분 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는 정말 구제 불능인 사람들을 당신의 품으로 모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화의 길을 보여 주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I must be on my way!’!는 나는 가야할 길을 간다는 그 십자가는 부활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비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절해서 버려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도록,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절해서 황폐해진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없도록,” 이 일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우리에게 이 한 주간 너무도 엄청난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고난의 길을 말리는 사람들의 음성을 뒤로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하리니”하면서 이 죽음의 길을 간 그 길을 우리 역시 이 한 주간 온 성도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과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대 부분의 사람들은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일에 인생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명예도, 부도, 명성도, 성공도, 다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설령 내가 그것을 누렸다 할찌라도 바닷물을 들이키듯 갈증만 더 날 뿐입니다. 그러나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을 붙잡고 계신 주님입니다. 젊음은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인간적인 야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 앞에 마지막에 순결하게 서기 위해,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주 앞에서는 놓칠 수 없는 마지막 영광을 위해 세상 적인 잣대를 포기하는 자,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성도란 누구를 말합니까?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길을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언젠가 아프카니스탄에 선교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들다고, 고통스럽다고, 위험하다고 가지 않는다면 그곳의 사람들은 어떻게 복음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비단 배 목사님뿐이겠습니까?

WEC 선교회를 창설한 C. T. 스터드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의 옥스포드 출신으로 재벌가 집안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자 평생 복음을 위해 살기로 작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선교사로 살았고, 나중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그가 나이가 들어 임종을 눈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온 것 같다. 이제 돌아보니 즐거웠던 몇 가지 일이 생각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중국에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 가족들은 다 반대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결단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것,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즐거운 추억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이 있다.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좇으라.'고 나에게도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유산 받은 것을 선교를 위해서, 가난한 자를 위해서 다 흩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유쾌한 추억인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앞에 펼쳐질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두고 가는 것이 아까워서 눈을 못 감는 사람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까?

오늘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까지 우리에게 이 한 주간 너무도 엄청난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고난의 길을 말리는 사람들의 음성을 뒤로하고 “내가 가야할 길을 가야하리니”하면서 이 죽음의 길을 간 그 길을 우리 역시 이 한 주간 온 성도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매일 새벽에 하나님의 아들, 죄 없는 분이 양발, 양손에 못이 박혀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그 갈보리 언덕으로 나아오는 시간을 갖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내가 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인지 해답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왜 죄인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직도 예수 믿지만 죄책감에 끌려 다니며 신음하는 분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서 예수님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죄도 용서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 짐을 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 앞에는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의 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십자가에서 그것을 배웁시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배우자고요. 주님이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야하겠다며 가신 그, 십자가의 길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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