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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를 지고 (막 11:1~11) - 고난주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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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막 11:1~11)

 
오늘은 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종려 주일입니다.
이 종려 주일은 매우 역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리는 날입니다. 동시에 그 입성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받으셔야 했던 끔찍한 수난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지난 정권 내내 정권 교체를 바라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후보를 열렬히 지지했던 어떤 분의 글을 잠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방향입니다. 동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서쪽으로 가면 큰일입니다. 더욱이 험한 산을 오르는 등산객이 방향을 잃으면 조난을 당할 우려가 많습니다. 나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설악산의 정상인 대청봉을 향해서 백담사를 떠난 등산객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어디를 향해서 산을 오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안내자를 잘못 만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리더가 이렇게 방황만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대청봉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설악산 어디에서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그분은 왜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걸었던 기대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정말 그렇게 잘못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정부 여당만의 잘못 때문입니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솔직히 말해서 남이야 어찌 되든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너무 지나친 표현 같습니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한국 교회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그 옛날 선지자들이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하나님의 공의는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주님도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예배당을 갖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인들을 끌어모으는 일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배당 꼭대기에 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그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들이 이렇게 추악한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마당에 누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며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손에는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호산나는 히브리 말로 '간구하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얼마나 높은 것인가 하는 것이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를 로마의 압제와 탄압에서 해방시켜 주시오! 가난과 질병과 고통의 멍에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오!"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사람들만 그런 기대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곁에서 모시고 다녔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가시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앞에서 예수님께서 자기가 당하실 일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0장 33절, 34절 말씀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나름대로 약삭빠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마가복음 10장 37절 말씀입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새 임금으로 등극하시면 높은 자리를 자기들에게 달라는 말입니다. 제사는 안중에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 바로 그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제자들은 엉뚱한 요구나 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이 예수님을 통해서 재현될 것이라는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친히 보내신 메시아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타신 나귀 의 초라함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예수님의 다소 어두워 보이는 표정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릇된 욕망과 기대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겉옷을 벗어서 길을 말끔하게 덮었습니다. 마치 영화제에서 입장하는 배우들을 위해서 붉은 양탄자를 까는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위해서 최고의 대접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왕의 행차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의 기대도 완전히 저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화려한 박수갈채 속에서 시작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길의 끝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아시면서도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묵묵히 그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기 외에는 그 고난의 길을 갈 자가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 죽음의 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을 것 같으면 결코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환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둡고 좁은 길이라는 걸 분명히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 십자가 죽음의 길로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시며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무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오해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무지와 오해까지도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전혀 그들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똑같은 오해를 하며 주님의 걸음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이 마치 우리의 물질적 성공을 위한 것인 양, 우리의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인 양, 우리의 욕심 충족을 위한 것인 양, 그릇된 박수갈채를 보내며 기대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높은 자리를 달라고 뻔뻔스럽게 요구하던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호산나를 소리 높이 외치며 주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의 기대가 오늘 우리의 기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마음도 매우 무거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그 고난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코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의 길로 함께 가지고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의사였다가 기독교 작가가 된 A.J.크로닌 박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남들이 외면하는 광산촌에서 의사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산촌에 한 그리스도인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 간호사는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면서도 아무 불평 없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늘 웃으며 정성껏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크로닌 박사가 보기에 하도 안쓰러워서 그 간호사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지닌 가치만큼 여기서 대우를 못 받고 있어요. 그걸 알고 있나요?"
그러자 그 간호사가 대답했습니다.
"박사님, 제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할까요? 그분이 알고 계시고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된 것이지요. 박사님, 저는 그냥 제가 살아 있고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수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주님의 십자가는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영광과도 거리가 먼 것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주님이 걸으신 그 고난의 길은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낮고 천한 자리로 향해서 주님은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현장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지금 그 음성을 듣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만을 따르기로 다짐하는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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