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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자신을 낮추라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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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낮추라 (마 21:1~11)


1. <상처 입은 치유자>(헨리 나우웬 저)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왕자가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오자.” 오랜 세월이 흘러 네 명의 왕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첫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이 있다.” 
둘째 왕자도 말했습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막내 왕자도 질세라 말했습니다. “나는 사자가 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자의 뼈였습니다. 네 명의 왕자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자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죽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이 쌓아놓은 현대 문명의 바벨탑에 인간 스스로 깔려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인간은 각처에 퍼져 나름대로의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대홍수를 경험했던 인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겸손한 자세로 생활을 시작해서 차츰 생활이 안정되어 갔습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인간은 ‘서로 힘과 지혜를 모으면 더 이상 미약한 존재가 아니다. 서로 뭉친다면 얼마든지 홍수같은 재앙을 막을 수 있다.’ 며 흩어져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없이 한 자리에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합니다. 창세기11:3-4입니다.

(창11:3-4)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인류가 서로 하나가 되어 돕는 정신은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된 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서로 말한 내용을 보면 하나되는 중심에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바 ‘바벨탑’을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날려보자”는 말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자신들의 이름을 날려보자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천사로 창조되었다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했다가 땅으로 쫓겨난 사탄과 맥을 같이 하는 말입니다. 이사야14:12-13입니다.

(사14:12-13)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아니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하나 되는 것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보다는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인간의 교만입니다. 바벨탑을 쌓기 위해 “벽돌을 단단히 구워내어 돌을 대신하자”는 것은 바벨탑 사건 당시 문명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합니다. 그들의 발달된 지혜와 과학이 당대 최고의 ‘마천루’(摩天樓) 건축에 동원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지식이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어떤 경우, 어떠한 분야에서도 땅에 떨어진 사탄, 무너져 내린 바벨탑과 그 운명을 같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며 교만으로 유혹했던 사탄이 지금 이 시대에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높이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잠 18:12) 사람이 망하려면 먼저 교만해지지만 존경을 받을 사람은 먼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Before his downfall a man's heart is proud, but humility comes before honor.)”  


2.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으로 오신 예수께서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며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요13:15-17)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골고다 십자가로 향하는 첫 행보가 되는 예루살렘 입성에 예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시고 가시는”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을 배우라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고 살면 삶에 안식을 누리고 인생을 쉽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잠시 기분이 좋은 듯 하지만 외줄 타는 것처럼 위태하고 헤어 나오기 힘든 삶에 빠지게 됩니다. 널리 알려진 격언 중에 “얻었는가 싶으면 그 순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항상 겸손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귀하며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은 스가랴 선지자로 통해 예언하신 하나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본문 4-5을 보겠습니다. 

(마21:4-5)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겸손이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유명한 실화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흑백 인종 차별이 법적으로 정당화되던 때의 얘기입니다. 한 흑인 교회에서 고난 주간 성만찬식을 거행하면서 특별한 행사를 계획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정신을 본받아 누구든지 자기가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례(洗足禮) 행사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중에는 백인 판사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흑인 여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주인인 백인 판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로서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흑인 교회에서 시행하는 세족식 광고를 듣고 참석하겠다고 신청한 것입니다. 

세족식이 거행되던 날 흑인 교회를 찾아온 백인 판사는 흑인 여종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었을 뿐 아니라 그 검은 발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 백인 판사의 놀라운 행동을 지켜보던 교인들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마르다는 내 집 종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내 아들딸을 돌보았으며 내 자식들의 발을 씻어준 고마운 사람입니다.” 

이 백인 판사의 행동은 곧 빅뉴스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백인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했습니다. 흑백 차별을 당연시하는 사회에서 백인 판사의 행동은 품위에 어긋난 짓일 뿐만 아니라 백인들에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결국 내정되었던 대법원장 자리가 취소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판사직도 박탈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흑인 교회의 목사가 판사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하였을 때 그는 오히려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판사직도, 이 사회의 어떤 지위도 죽어서 무덤 갈 때는 모두 먼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세상의 먼지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감사가 더 중요합니다.” 

인종에 따른 차별, 이념에 따른 차별, 종교에 따른 차별, 빈부에 따른 차별, 성별에 따른 차별 이 모두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다 똑같은 자녀라는 평범한 진리가 인간의 삶 속에서는 그대로 지켜지기가 너무도 어렵습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평범한 진리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행동에 옮겼던 그 판사는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파장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행했습니다. 세상의 지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장보다 자신을 낮추어 섬기라, 겸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세족식을 행하신 후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체면손상을 불사하고 노예처럼 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말을 고상한 신학적 용어로 <성육신>이라고 하지만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엄청나게 치욕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가졌던 분으로서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천사보다도 훨씬 더 낮은 데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히2:9). 

전지전능하시고 광대하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은 체면이든 수치이든 그 어떤 멸시 천대를 다 받는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을지라도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생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자신과 이웃을 구원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겸손해야 기도가 응답되고 겸손한 사람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예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18:9-14입니다. 

(눅18:9-14)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바리새인은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토색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또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런데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죄인들이나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의롭게 살고 있다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은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죄인으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내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심정으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두 기도를 두고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에 내려갔느니라.”(14절)고 말씀하심으로써 교만한 바리새인의 기도는 열납되지 아니하고, 겸손히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에게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필요치 않았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사랑으로 용서해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기도한 세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폴란드의 세계적 천문학자, 지동설 주장자였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 때문에 사형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문에, “주 하나님, 저는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은혜를 원치 않고, 바울에게 베푸셨던 자비를 원치도 않습니다. 다만 주님 십자가상에 함께 못 박힌 오른쪽 강도에게 베푸셨던 긍휼을 원하나이다.”라고 쓰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겨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 그 결론으로 14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를 높이는 것이고 세리의 기도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는 기도는 자기 자랑이지 기도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마치자 예배가 열납되고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성전에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대하7:14-16)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 내가 이제 이 성전을 주시하고 이 곳에서 드리는 모든 기도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성전에 나와 겸손히 기도하시므로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솔로몬에게 약속된 축복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B.C. 1070년경 사무엘 사사 시대에 엘가나라는 레위 지파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아내 둘이 있었습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요, 또 한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습니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브닌나는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하여 그녀를 몹시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날이 갈수록 브닌나는 더욱 한나를 비웃고 조롱하며 심지어 학대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태의 문을 닫기도 하시고 열기도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고 성전에 나가 통곡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삼상1:1-20) 

한나가 이렇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하나님 앞에 나가 그 마음을 쏟아 놓자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기억하시고 응답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닫힌 태의 문을 여시고 아들을 낳게 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사사 사무엘이었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한대로 성전에 보내 사무엘을 평생 하나님께 바치고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사무엘 상 2:1-10입니다.

(삼상2:1-10) 주께서 나의 마음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있습니다. 원수들 앞에서도 자랑스럽습니다. 주께서 나를 구하셨으므로, 내 기쁨이 큽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은 없습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 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 보시는 분이시다....주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주님은 사람을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유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한나가 고백한대로 하나님은 태의 문을 여시기도 하시고 닫히게도 하시며,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도 하시고 부유한 자를 가난하게도 하시며,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기도 하시고 높은 자를 낮추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를 높인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B.C. 570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었습니다.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할 때, 항상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다니엘만이 그 꿈을 해석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게 되면 권좌에서 들로 쫓겨나 7년 동안 사람의 마음을 갖지 않고 짐승의 마음을 갖고 하늘의 이슬을 맞고 땅의 풀을 뜯으며 짐승처럼 짐승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고 자기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나라를 주시며 그가 원하시면 가장 천한 자도 왕위에 앉힌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열 두 달 후에 느부갓네살 왕이 왕궁 옥상에 올라 바벨론 성을 바라보며 교만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큰 바벨론 성은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 내가 내 능력과 권세로 건설한 이 나라의 수도가 아닌가!” 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의 왕권은 너에게서 떠났다. 네가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7년 동안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누구에게든지 그가 원하는 자에게 나라를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같은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느부갓네살 왕은 즉시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은 하늘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은 독수리털처럼 되었으며 내 손톱은 새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다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겸손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는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나라는 대대로 지속될 것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시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뜻대로 행하시니 그의 뜻을 거역하거나 그가 행하시는 일을 물어 볼 자가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지금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높이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다. 그는 진실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시다.”(단4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 원하십니까? 자신을 낮추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십자가 예수를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인생의 본분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겸손하여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며, 겸손한 기도마다 응답되어 막힌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시는 축복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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