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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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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 (눅 19:28~40)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있었던 일을 전하는 복음서의 증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것은 거기서 붙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일을 앞두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다른 때와는 달리 특별히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 불과 삼 킬로미터도 안 되는 마을에 다가가셨을 때 제자 중 두 사람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신 것입니다(본문 30-31절). 두 제자는 가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습니다.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본문 32-34절).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아하게 여기게 할 만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 모든 일어날 일들을 예견하시고 적중시키실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수님의 초인적인 능력으로 인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수님께서 그 새끼 나귀의 주인과 미리 다 의논해서 준비시켜 놓으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가 보다 유의해야 할 문제는 예수님께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기를 원하신 뜻이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예언자 스가랴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왕이 겸손하게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슥9:9에서 그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스가랴의 예언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이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예언이라 여기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예언의 성취로서의 자기 자신을 만천하에 공포하려 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기는 하면서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요12:14-16에 보면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합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의 하나였던 요한의 솔직한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이 일은 오직 예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수백 년 뒤에 오실 예수님을 크게 기뻐하며 맞이해야할 왕이라 했고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신 분으로 높여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렇게 그를 영접했습니다. 제자들은 끌고 온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쳐 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고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깔았습니다(본문 35-36절). 겉옷을 길에 펴는 것은 승전하고 개선하는 이에게 깔아주는 카펫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승리하실 주님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 그를 따르게 된 모든 이들은 기뻐 예수님을 맞으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본문 37-38) 예수님은 찬송을 받으실 이시고 평화의 왕이시며 영광의 주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슥9:9와 이어지는 10절을 함께 다시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했습니다. 여기서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무력으로 전쟁하여 승리하는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예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런 왕으로 나타내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부르며 찬송하는 것을 듣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부르며 찬송하고 환호하며 영접하는 것은 불쾌하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유능한 선생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던 예수님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중이 예수님에 대해 열광하고 흥분하는 것은 자칫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독립을 외치는 군중봉기나 반로마 폭동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사태를 초래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항의하며 요구했습니다: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본문 39절)

예수님께서는 대부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메시야로 추앙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는 혼자 산으로 떠나가신 예수님이십니다(요6:15). 또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했을 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말씀하시면서도(마16:16-17)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마16:20) 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셨던 예수님께서 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면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왕이며 메시야로 찬송할 때 그냥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중지시키라는 바리새인들의 요구를 거부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본문 40절) 그러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자신을 그렇게 알게 하시는 것이 그가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신에 대한 군중의 열광이 반로마 군중봉기로 이어지고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진압을 초래할 소지가 없어졌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태를 막을 다른 대책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군중이 당신을 따라 반로마 독립투쟁을 벌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신을 향해 등을 돌리게 하시고 당신 자신이 홀로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이 피를 흘릴 유혈사태는 당신 한 사람의 십자가에서의 피로 막으실 계획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군마를 타시고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시고 겸손하게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모습의 의미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시의 그 열광적인 환영의 소리는 며칠 후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광기 어린 고함소리로 바뀔 것이었습니다. 그 군중의 돌변을 기이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예견하신 바였고 또 의도하신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상치 못했던 사태의 급반전이 아니라 예정하신 계획의 진전이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만세전부터의 하나님의 계획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주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죄인처럼, 강도처럼, 혹세무민하는 선동가처럼, 실패한 혁명가처럼, 신을 사칭한 사기꾼처럼, 거짓 예언자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었지만 그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참 평화의 왕이시며 영광의 주이심을 미리 분명히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의 위로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곧 이어질 고난주간 때문에 허탈감과 낙심을 안겨주는 주일이 아니라 고난주간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주일이 되어야 합니다. 종려주일을 고난주간에 앞서 가짐으로써 미리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와 그 복된 결과를 깊이 깨닫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참 평화의 왕이시며 영광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열심히 외치며 전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싫어하고 반대하며 중단을 요구할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주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하심으로써 참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 모두의 참 왕이시며 주이시고 구원자이심을 확증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껏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다짐하는 이 종려주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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