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험이 있을 때 어떻게 하나? (약 1:1~18)

  • 잡초 잡초
  • 397
  • 0

첨부 1


+설교 제목 - 시험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설교 본문 -  약 1:1-18
+설교자 - 마경훈 목사

시험을 쳐보면 학생들의 실력이 나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시험을 치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미국한인교회에 영문과 나온 부목사님이 계시는데, 영어를 좀 하는 척해서 미국인 손님이 왔을 때 통역을 하라고 불렀더니, "저는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습니다."하며 도망을 가더랍니다. 영문도 모르고 영문과를 나왔으니 영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분의 영어 실력이 들통 난 것입니다. 

캐나다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영어를 좀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분 교회가 교회당이 없어 캐나다의 한 교회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자기 교회 주최로 그 지역의 노인들을 모셔서 행사를 하는데, 목사님이 개회 예배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해서 교회로 가니, 캐나다 목사님이 뜰에 계셨습니다. 서로 가깝게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캐나다 목사님께 성경봉독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었는지 에배시간에 캐나다 목사님이 나와서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한국 목사님이 설교 통역을 해야 했습니다. 영어를 잘한다 해도 설교 통역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목사님의 수준이 설교 통역을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할 수 없이 통역을 하는데, 어떤 말씀은 들리고 어떤 말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네가 설교 준비한 대로 해라.' 하는 깨달음이 오더랍니다. 그래서 캐나다 목사님은 영어로 자기 설교를 하고, 한국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자신이 준비한 설교를 했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 앞이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우리 교민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의 재미난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래도 우리가 미국 시민인데 이래서야 되겠나? 이제 우리 서로 영어로만 말하자.”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밖에서 "딩동!"하고 벨을 울렸습니다. 안에 있던 할아버지가 물었습니다. "who(후)꼬?" "me(미)랑께." 그 목사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영어를 잘 모르고, 또 통역은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배짱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준비해 온 설교를 그냥 했습니다. 박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멘! 아멘!” 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노인들이 “목사님이 그렇게 영어를 잘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난처하기도 했지만, 노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영어를 잘한다고 하니 그래도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나가니, 이것을 어떻게 합니까? 서울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후 캐나다에 유학 중인 학생이 떡 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목사님이 “어! 자네가 웬일이야?”라고 물었더니 유학생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용기 있으시던데요?"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얼굴이 고추잠자리가 되었답니다.

우리의 신앙이 좋은가 나쁜가는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시험을 당해보면 금방 들어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은 큰 시험이 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신앙이 좋지 않은 사람은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고 넘어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나 시험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 시험이 있는 것처럼 청년의 신앙이나 아비의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직분이 없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고 직분을 가진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이는 시험을 이기느냐 시험에 드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믿음의 형제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시험이란 크게 3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테스트와 유혹과 시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한 테스트도 시험이고, 사단이 믿는 자들을 타락시키기 위한 유혹도 시험입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로 인해서 겪게 되는 시련도 시험입니다. 
시험에 드느냐 시험에 들지 않느냐는 개인의 신앙의 척도에 따라서 다릅니다. 같은 일을 당해도 시험에 드는 사람이 있고 시험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을 가진 사람과 영적으로 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시험에 잘 들고 잘 넘어집니다. 장성한 신앙을 가진 사람과 영적으로 강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시험을 잘 견디고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 노는 것을 보세요. 평상시 잘 넘어집니다. 걸어가다가도 잘 넘어지고, 달려가다가도 잘 넘어집니다. 넘어져도 일어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어른들은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다 넘어져도 바로 일어섭니다. 

어린아이 신앙과 약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험에 잘 듭니다. 남들은 잘 이겨내는 것도 시험거리가 됩니다. 그리고 넘어져서는 잘 일어나질 못합니다. 전에 어떤 분은 교회에서 아이들이 떠든다고 시험에 들었습니다.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게 시험거리라면 그분이 이겨낼 시험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장성한 신앙, 단단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험에 잘 들질 않습니다. 신앙이 잘 넘어지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군대 생활할 때 열심히 전도했답니다. 훈련소 시절, 비가 와서 야외 훈련을 받지 못하게 되어 여섯 중대가 한 자리에 모여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앞에 나가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같은 내무반의 한 훈련병이 목사님을 많이 핍박했습니다. 한 번은 방독면을 쓰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사람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자기도 교인이었는데 자기를 전도한 청년회장이 아주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답니다. ‘이제 보니 교인들은 위선자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교회를 떠났을 뿐 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을 아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손해를 봅니다. 청년회장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사인 저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도 실수 할 수 있고,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도 실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를 붙잡고 매달리면 자기가 망합니다. 목사님이 실수하든 장로님이 실수하든 권사님이 실수하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넘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에 들든, 누구 때문에 시험에 들든 시험에 들면 자가만 손해입니다. 광야에서 시험에 들었던 사람들은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시험에 들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까? 그런 그가 하나님의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하니 모세도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이겨내십시오. 그러면 그만한 보상이 있습니다. 4절에서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말하고, 12절에서는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광야에서 시험에 들지 않았던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세도 들어가지 못했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가나안과 같은 신앙의 깊은 세계와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뻐하라(2절)

만약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면 나를 더 강한 신앙인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요긴하게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옛날에 목조로 만든 배는 돛대가 중요합니다. 바람이 불면 돛대에 부딪히고 바람의 힘으로 배가 빨리 가게 됩니다. 그런데 강풍을 만나는 경우에는 그 돛대가 부러져서 배와 화물뿐만 아니라, 선원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때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돛대에 결함이 있다면 큰 일 날 수 있기 때문에 배를 만드는 사람들은 강한 나무로 돛대를 만듭니다. 조선업자들은 강한 돛대를 만들기 위해서 높은 언덕의 정상에 있는 나무를 돛대감으로 점찍어 둡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바람으로부터 보호할 만한 주위의 모든 나무들을 베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나무는 사방에서 부는 바람과 싸우며 더욱 단단하게 자라갑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배의 돛대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하고 튼튼한 나무가 되면 베어서 돛대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선물과 엄청난 일거리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지킬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일들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당하는 시험이 사단의 유혹이라면 내가 하나님 편에 있다는 증거이기에 기뻐해야 합니다. 사단이 보기에 내가 자기의 적이니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적이라는 뜻은 내가 하나님 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험을 당하면서도 기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4절에 보니 우리가 시련을 당하면 온전하고 구비하고 부족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련 속에서도 기뻐해야 합니다. 

식물학자들은 바람이 세차게 불면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리는데 그 때 나무의 뿌리가 땅 속 깊이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나무가 평온할 때 성숙하고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큰 바람이 불 때에 오히려 그 바람 때문에 더 튼튼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은 언제 온전해 질까요? 우리 믿음은 언제 성장할까요? 평온할 때가 아니라 신앙의 어려움이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오히려 우리가 더 성숙해 집니다. 그래서 시 119:71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2. 인내하라(4, 12절)

제가 보니까 신앙생활에서 인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 면에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심지어 설교를 듣는 데도 인내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설교가 늘 은혜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습니다. 저는 저하고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주신 분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같은 사람의 설교를 1주일에 몇 번씩 듣습니다. 1년이면 제 설교를 수백 번 듣습니다. 이 중에는 제 설교를 수천 번씩 들은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신선하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그럴 것입니다.  그래도 인내하고 설교를 열심히 들으시면 여러분의 영혼에 유익이될 것입니다. 

몇 년 전 영국의 어떤 사람이 신문에 이런 글을 실었답니다. "내가 예수 믿고 30년 간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며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되는 설교는 없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에 시간과 전력을 다 쏟을 필요 없이 다른 것에 전력을 쏟으면 좋겠다. 30년 간 들어도 기억되는 설교가 없으니…." 이렇게 비꼬고 난 후 이런 저런 논쟁이 신문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 논쟁이 언제 끝났는지 아십니까? 

한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이런 글을 신문에 싣고 난 후부터였습니다. "나는 아내랑 결혼해서 30년간 살면서 3만 2천 번의 식사를 했다. 아내가 해 주는 밥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지금 생각하니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밥을 먹어서 내가 살아 있지, 그 밥을 먹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도 그 말씀을 먹었기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설교가 좀 신선하지 않아도 말씀의 은혜로 사는 것이니 인내하고 설교를 잘 듣기를 바랍니다.

인내는 헬라어로 ‘휘포메노’라고 하는데 ‘아래에 머문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는 자신을 낮춰야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내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살이 승리합니다. 운동선수 중에는 재능은 뛰어난데 훈련 중에 인내하지 못해서 대성하지 못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도 인내하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인내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 신앙생활도 승리하는 것입니다. 인내의 모범을 보인 사람은 노아입니다. 노아는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120년 동안 홍수의 징조는 전혀 없었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이라는 시간은 시험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인 테스트도 있었고, 마귀가 주는 유혹도 있었고, 방주를 짓느라고 고생하며 시련도 있었습니다. 노아는 120년을 변함없이 인내하며 하나님의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노아를 본 받아서 시험을 잘 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시험을 이겨낼 지혜를 구하라(5-8절).

어떤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해야 할지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해야 할지 모른다면 참 답답한 일이다. 이런 경우 기도하라는 것이다. 
제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좋아하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모세, 다니엘, 요셉, 여호수아 주로 구약의 인물들을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저는 바울은 왠지 저하고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모세와 다니엘을 특히 좋아합니다. 그들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으며 그 지혜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시험이 있을 때 그들처럼 기도하므로 승리합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구하는 것보다 풍성하게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5-8에 보면 기도하는데,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기도하면 산도 옮겨진다고 말합니다. 어느 농부가 아들과 함께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응답 하는지를 보려고 늘 그늘이 져서 텃밭에 채소들이 잘 자라지 못해 앞산의 그림자를 좀 옮겨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면 이루어 준다고 했으니 아들과 아버지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저 앞산의 그림자를 좀 옮겨 주시옵소서....” “믿습니다. 아멘.”하고 눈을 떠 보니 앞산도, 그림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기도하면 응답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한 한인교회에서는 기도로 산을 없앤 일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작은 산 하나를 사서 거기에 교회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의 흙을 없애는 일이 문제였습니다. 흙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팔면 되지만 필요로 하는 곳이 없으면 돈을 주고 버려야 하기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교회 건축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기도로 산을 옮기자고 해서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건설회사 사장이 찾아와서 산의 흙을 사고 그 회사에서 중장비까지 동원해서 흙을 치워주었습니다. 그 교회는 흙을 판 돈으로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지혜도 주시고 길도 열어주시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성도들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4. 낮은 자는 주님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9-11절).

낮은 형제가 자랑해야 할 자기의 높음은 주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주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상을 이기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부한 자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말은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나 인기나 권력은 마치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이나 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간 화려하지만 곧 시들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재벌들의 재물이 4대 이상 지속된 예는 10% 미만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연예인들의 인기를 보세요. 굉장한 인기를 누리는 것 같은데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권력도 10년을 넘지 못합니다. 태광실업의 박연차 회장을 보세요. 과거 권력에 붙어서 굉장할 것 같았는데 지금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형 노건평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자랑거리를 위해서 맹렬할 정도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종말을 맞이하고 영원한 세계 앞에서면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소설을 쓰는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집념이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고 또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는 일 외에는 전혀 눈길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쓴 소설은 꾀나 인기가 있었습니다. 잘 팔렸습니다. 그럴수록 자기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소설을 썼습니다. 돈도 꾀나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가만히 놀려두지 않고, 계속해서 부동산에 투자해서 자기의 재산을 증식해 나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몸이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결국은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아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간암 말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남은 삶이 불과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집까지 일부러 천천히 걸어오면서 처음으로 그는 자기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했던 말씀이 그렇게나 실감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전1:2의 말씀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정말 그 동안 살아온 모든 삶이 헛되게 느껴졌습니다. 집에 도달했습니다. 그저 눈물만 흐를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쳐다보아도, 그 동안 애써 장만해 놓았던 가구들을 쳐다보아도, 심혈을 기울여 써온 원고뭉치를 쳐다보아도 그저 눈물만 솟구칠 뿐이었습니다. 도무지 참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교회로 뛰어갔습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교회에 홀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면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님! 저의 생명을 연장해 달라고 구차한 요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큼은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남은 3개월 동안에 제가 무엇을 해야 저의 삶이 의미 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이 한 가지만큼은 꼭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애타게 기도하는 가운데 그에게 느껴지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동안 글을 쓰고 재산을 불리느라고, 그는 충분한 사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자기로 인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했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눈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다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억척스럽게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한 번도 자기의 재산을 값있게 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자기의 재산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하나님께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가족들을 위한 유산으로 분배했습니다. 유언장도 완성을 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글을 쓰는 일이라든지, 재산을 불려나가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틈나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3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의사는 틀림없이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났지만 생명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병원으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일부러 다른 병원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것이 웬일입니까? 간암이라는 것은 순전히 오진이었습니다. 너무 과로해서 간에 무리가 갔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휴식을 취하면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서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집사님, 얼마나 억울하세요? 어디 가서 이 보상을 받겠습니까?" 그 때 집사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목사님! 저는 제 생애 있어서 지나간 3개월처럼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저의 남은 삶이 얼마가 되든지 간에 저는 언제나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심정으로 살렵니다." 그 집사님이 세상의 부함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지만 영원한 세상을 대면하니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5.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라(13-17절)

13절의 시험은 유혹을 말하는데 유혹을 당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유혹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혹은 사단이 주는 것이고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처럼 우리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혹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분이 하루는 친구와 함께 자기 집의 개를 잡아먹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일론 빨랫줄로 개의 목을 묶어서 끌고 산으로 갔습니다. 산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개를 삶아서 뜯어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가마솥에 불을 지펴놓고 목을 졸라 개를 죽이려고 나일론 줄을 잡아당기니 개가 놀라서 발악을 하는 바람에 줄이 풀려 개가 도망을 갔습니다.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사람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개가 꼬리를 흔들고 팔짝팔짝 뛰며 그 사람을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얼마나 양심의 가책을 받았는지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개고기를 먹으면 개새끼다.’라고 다짐하고 그 때부터 개고기를 먹지 않았답니다. 자기가 죽이려 했던 개가 자기를 그렇게 환영해 주는데 어떻게 잡아먹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힘든 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고, 우리의 연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고 믿음을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확신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6. 자존감을 잃지 말라(18절)

사람이 어려움을 많이 겪다보면 자기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이 시험 중에 그런 생각을 할까봐서 18절을 기록한 것입니다. 18절의 내용은 시험 중에 있어도 신자는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가르쳐줍니다. 

씨멘즈(D. A. Seamands)박사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낮은 자존감이 우리에게 미치는 네 가지 영향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달란트비유에서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주인으로부터 받은 1달란트를 투자하지 않고 그냥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둘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은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렇게도 소원하던 가나안 입성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땅에 가보니 그 성읍은 견고하고 사람들은 거인들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마치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한 것은 낮은 자존감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이 우리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셋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일반적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비교의식, 열등의식을 품고 살아갑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키가 작다고 키 큰 사람과 함께 서 있기를 싫어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을 보고 ‘가방 끈이 길다고 대개 뻐기는데’라고 하며 괜히 질투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면, ‘어떤 사기를 쳐서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을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무식하게 그런 거도 모르냐?’는 말을 듣고 그냥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고, ‘그래. 나 무식하다! 무식한 놈의 주먹 한 번 맛볼래?’하며 달려듭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넷째로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됩니다. 모세는 처음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낮은 자존감 때문에 선뜻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할 수 있게 습니까? 백성들이 물으면 내가 무엇이이라고 대답하리이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입니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십시오” 무려 다섯 번씩이나 계속해서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사람은 자기의 학벌이나 경험이나 나이나 외적인 조건, 등의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일을 회피합니다. 

자신 존재 가치를 주님 안에서 인정하고 자기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요.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십시오. 세상에서 이 보다 더 높은 자존감을 갖게 만드는 신분은 없습니다. 주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