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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고상한 지식 (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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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한 지식 (빌 3:4~9)


어느 많이 배운 학자가 배를 타고 가다가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철학에 대해서 아시오?” 사공이 자기 같은 사람이 무슨 철학에 대해서 알겠느냐고 대답하자, 그 학자는 “그러면 당신은 인생의 3분의 1을 잃어버린 것이오.” 하고 조롱하였습니다. 그 학자가 이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문학에 대해서 아십니까?” 사공이 또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학자는 “그러면 당신은 인생의 3분의 2를 잃어버린 것이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한참 가다 갑자기 배에 물이 들어와 배가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사공이 급히 그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수영할 줄 아시오?” 학자가 수영할 줄 모른다고 대답하다 사공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잃어버리게 되었소.”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계십니까?” 만약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짧은 인생이 아니라 무한한 영원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영원한 삶에 비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인생은 정말 순간에 불과합니다. 철학도 모르고, 문학도 모르고, 수영할 줄 몰라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그는 정말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제가 많지 않은 나이인데도 주변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암으로 죽기도 하고, 최근에는 스트레스나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죽음은 아닐지라도 주변에서 암에 걸린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암은 마치 죽음의 사자처럼 느껴집니다. 이럴 때면 우리도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제가 생명보험에 들었겠습니까? 들지 않았겠습니까? 목회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보험에 드는 것은 어쩐지 믿음 없는 행위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보험에 들었습니다. 언제 들었느냐 하면 큰 교회에서 부목사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암에 걸려 심방을 자주 갔고, 많지 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보험에 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저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남은 가족들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장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처럼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이고 또 예기치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그 두려움은 절망과 공포 수준은 아닙니다.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생각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공포를 홀로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의지할 막대기나 지팡이도 없이, 위로하고 힘이 되어 줄 목자 하나 없이 홀로 걷고 있는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고 파선하여 곧 물에 가라앉는 배와도 같습니다. 그때 그 바다를 향하여 “잠잠하고 고요하라”고 외칠 수 있는 그 분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해 바다 위를 걸어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실 구세주를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소중한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한 분 얻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긴다는 고백입니다.

배설물로 여김

바울은 소위 할례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을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합니다. 실제 그들은 육신에 새긴 할례를 자랑하는 자들이었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들 방식으로 따져도 자신은 결코 꿀릴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5절과 6절에서 자신의 육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랑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유대인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이요 유대 율법에 충실했던 자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중에서도 베냐민 족속이라 합니다. 베냐민 족속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소속되었던 지파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을 사용하였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남왕국 유다를 이루었고, 다른 지파들과는 달리 그 순수 혈통이 포로기에도 유지되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합니다. 바울은 안디옥 근처의 다소라는 곳이 고향으로 알려졌습니다. 히브리인 이라는 것은 그 문화나 언어를 가리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 중에는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도 있었고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어와 헬라어 둘 다 능통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또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 합니다. 바리새파는 그 뜻이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가진 종파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제사장이나 레위인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율법에 철저히 능통했던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는 지식에서만 탁월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에 어긋나는 이단이라 생각했던 당시 교회를 열심히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울이야말로 예수도 잘 믿고 율법도 잘 지켰던 사람으로 여기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7절에서는 해로 여긴다고 했고, 8절에서는 배설물 곧 똥과 같은 오물처럼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발견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는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공로로 갑니다. 자기 출신이 자랑스럽고, 선한 자기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새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겸손하게 엎드린 자에게만 임합니다. 자기 자랑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님의 은혜만을 바라는 자에게 그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니 전에는 자랑스럽던 것이 이제 그리스도를 찾는 데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적은 차선입니다. 최악은 아무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비슷하게 좋아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제일 좋지만 육적인 소욕을 이루는 것도 싫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얻고, 명예와 지식을 쌓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합니다. 그러나 육신의 욕심에 취하다 보면 어느새 영적인 관심이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따뜻하고 안락한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딱딱한 바닥에 무릎 꿇기가 싫어집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부자 청년은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마치 이런 예화와 같습니다. 어떤 병사가 숲 속 밀림에서 적군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포로를 잡았다고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대장이 그 포로를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숲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포로가 가려하지 않습니다.” 몇 번 명령해도 오지 않자 소대장이 이번엔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러면 포로는 놔두고 너라도 돌아오라” 그러자 한참 있다 다시 이런 소리가 밀림 속에서 들리기 시작합니다. “포로가 저를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치 세상과 그리스도 둘 다를 좇다 세상에 포로가 된 형편과 같다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의식적으로라도 육신의 좋은 것들을 배설물 취급하려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들을 소중한 보물인 냥 끌어안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의 배설물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돈 버는 데 여념이 없어 주일도 잊고 주님 말씀 묵상하는 것도 잊고서 지냅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의 배설물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놀고 즐기는 데 정신이 없어 그리스도 안의 즐거움을 다 잊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학위와 지식의 배설물을 끌어안고 삽니다. 머리속이 세상 지식으로 가득 차 있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락한 생활과 지위의 배설물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따르는 데 방해가 되면 버릴 수 있어야 하는데 포기하지 못합니다. 우리 목회자들도 편안함에 빠지면 영적으로 무뎌집니다. 그 편안함에 취해서 그리스도와 관계는 더욱 멀어집니다.

그것들은 배설물과 같습니다. 우리 육신이 땅속에서 구더기와 함께 썩을 때 같이 썩을 것입니다. 우리 육신이 불에 타 한줌 재로 남을 때 함께 불에 타 공중에 다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지식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마치 보물과 같습니다.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전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삽니다. 그 안에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진주 장사가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이렇게 해도 사람들은 욕하지 않습니다. 왜?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전소유보다 보물이 더 값지고 진주가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계산을 잘해야 합니다. 손해와 이익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바울은 계산해 본 결과 예수 믿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며 오히려 더 고상하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이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다 버렸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 예수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비록 가난하고 그 인생에 고난이 많을지라도 예수를 소유한 사람은 부자입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과 명예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하여도 예수를 모르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대략 1억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세상에서 얻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명예는 어느 정도의 가치를 매길 수 있습니까? 영원한 것에 비하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한 1만원 정도 쳐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1억하고도 1만원 가진 사람하고 1억에서 1만원 부족한 사람하고 무슨 차이가 납니까? 정말 조금의 차이입니다.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이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를 소유하고 있느냐 없느냐이지 세상적인 가치를 얼마나 소유했느냐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1만원 때문에 죽고 사네, 믿네 안 믿네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다름 아니라 예수 한 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가치에 비하면 세상적인 풍요는 있으나 없으나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예수가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치 우리 주방에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그냥 특이한 돌맹이 정도 취급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한 젊은 신사가 아프리카 남단의 케이프타운으로 출장을 갔습니다. 근처의 한 가게에 들러 필요한 생필품을 살려다가 그 가게의 선반에 놓여 진 한 개의 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장! 저기 선반위의 돌은 뭡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가게 주인은 “네! 우리 아이가 저기 뒷산에서 주워 온 돌입니다. 버리기도 뭣하고 해서 그냥 거기에 놓아 둔 겁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신사는 그 가게 주인에게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혹시 제가 당신의 아이가 좋아하는 멋진 장난감을 하나 사 드릴테니, 저 돌맹이를 나에게 주시면 안 되겠소?”

“네! 뭐 그렇게 하지요. 안 그래도 귀찮았는데 잘 되었습니다.” 하며 가게 주인은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그 돌을 바꾸어 주었다고 합니다. 그 신사는 그 돌을 가방에 고이 담아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어느 보석 가게에 들러 그 돌을 150만 달러에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가게 주인이 가지고 있던 그 돌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석 가게 주인은 그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공하여 700만 달러에 팔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손에 쥐고도 자꾸 다른 데 시선을 돌리고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다이아몬드는 우리 안에 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보화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리스도를 얻고 발견됨 

바울이 그동안 추구해 왔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는 까닭은 이것들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 발견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평생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습니까? 진리를 위해 싸우고 그것을 지키는 일이었습니까? 물론 그런 것들도 소중했지만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인생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자기 사는 이유가 그리스도며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온통 그리스도라는 단어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무려 38번이나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 예수, 주 예수, 주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도 도합 19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3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운다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가 사셨던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 바울의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그 능력과 그 성품을 닮으려는 것이 바울 일생의 목표였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 선배들 또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모릅니다.  중세 때 캔터베리의 안셀름(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은 그의 『독백 Monologion』(1078)이란 책에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목마릅니다. 주님께 배고픕니다. 주님을 갈망합니다. 주님을 애타게 그립니다. 주님을 사모합니다. 
저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존재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습니다. 울고 통곡하며 전심으로 그리운 얼굴에 매달리고 또 매달리는 고아와 같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붙듭니다. 
유배의 고생을 인해 웁니다. 
주님의 임재에만 제 위안과 소망을 둡니다. 
영광스런 주님의 얼굴을 묵상하며 간절히 사모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예수 중독자’라는 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예수 중독자 되어야 하겠다. 
술 중독자는 술로만 살다가 술로 인해 죽게 되는 것이고, 
아편 중독자는 아편으로 살다가 아편으로 인해 죽게 되나니
우리도 예수의 중독자 되어 예수로 살다가 예수로 죽자
우리의 전 생활과 생명을 주님 위해 살면 주 같이 부활된다.
주의 종이니 주만 위해 일하는 자 되고 내 일 되지 않게 하자”

정말 이 분들의 고백을 보면 예수님이 단순한 이념이나 모델이 아니라 애인처럼 가장 사랑하는 님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하듯 예수님을 그리워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도대체 어느 정도입니까? 요즘 같은 물질 중심, 자기 중심의 시대에는 예수는 정말 값어치 없는 존재처럼 자신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는 악세사리 취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정되는 것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던 바울은 자신 또한 이 소중한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벗어날까 항상 자신을 경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잘 달려왔지만 중간에,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예수는 사라지고 자기 욕망과 세상의 자랑만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목회자들이 그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헌신하면 예수님만 좇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흥도 주고 이름도 높여주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세상의 자랑만 남고 우리 안에는 예수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를 팔아 성공을 산 것과 같습니다. 저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에 오랫동안 헌신했던 분들도, 또 한국교회도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만약 그 성공이 예수를 얻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 성공을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3장 12절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모두는 달려가는 인생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멈추거나 나태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목표에 다달아 그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기까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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