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님만을 섬기기 원합니다 (행 8:9~25)

  • 잡초 잡초
  • 935
  • 0

첨부 1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사도행전 8장 9-25절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령님께서 성경을 밝히 보여주시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 본문은 제가 만약 제 뜻대로 본문을 택하여 설교하라고 한다면 평생 한번도 택하지 않을 본문일 것입니다. 특별히 은혜롭거나 제 마음이 끌리거나 하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시몬이라는 마술사에 대한 기사인데, 간단한 에피소드같은데, 분량적으로 사도행전 8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큽니다. 무엇인가 담고 있는 교훈이 크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 이 본문에 담긴 너무나 중요한 메시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 본문을 자주 설교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이 여러분 마음의 아주 깊은 곳을 만지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 사람으로 빌립을 통하여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강한 인상을 받고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빌립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 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전도의 역사에 대하여 조사를 하러 온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에게 와서 돈을 줄테니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시몬을 심하게 책망하였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절)

본문을 읽으면 누구나 시몬이 잘못했고 별로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너무 심하게 책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시몬이 초신자라 잘 모르고 실수를 한 것은 아닌가? 그래도 나름대로 은혜를 갈망했던 사람인데 “망할지어다!” 라니 너무 심한 말을 한 것은 아닌가?

제가 만일“헌금할테니 성령충만을 받고 싶습니다.”하는 새신자가 있는데, 그에게 베드로처럼“당신의 돈과 당신이 함께 망할지어다!”했다면 교인들 반응이 어떨까요? 제가 성경적으로 잘했다고 칭찬하기 보다는, 어떻게 목사님이 그렇게 하실 수가 있느냐고 하실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성도님, 잘 모르셔서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성령 충만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시면 성령 충만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성격이 별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정말 은혜를 받아야 될 것이 바로 베드로가 왜 이렇게 화를 낼만큼 심하게 야단을 쳤는가? 도대체 마술사 시몬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성경에 아주 길게 시몬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몬이 초신자였기 때문에 잘 몰라서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명하였는데, 본문 어디에도 시몬이 회개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시몬이 정말 초신자라 잘 몰라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이라면 바로 무릎을 꿇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시몬은 성령을 받았을 것이고 이 문제는 별 문제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몬은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라고만 했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않았고 단지 베드로가 말한 저주가 임하지 않게만 해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본문을 계속 읽어봐도 베드로가 기도해줬다는 말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몬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경에는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는 더 이상 안 나오지만, 기독교 역사에 나오는 자료를 참고하면 시몬은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우연히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당시 누구나“아, 그 시몬”하고 알고 있었던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마음 중심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가 겉으로는 세례를 받았지만 실제로 예수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죄가 무엇일까요? 본문에 나타나기는 돈으로 성령의 역사도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귀신을 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전부 돈을 가지고 귀신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더 큰 것이지요. 돈을 주고 귀신을 부리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를 너무너무 싫어하십니다. 지독한 우상숭배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죄입니다. 시몬에게는 돈이 하나님 보다 더 컸습니다. 곧‘돈이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고 교회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을 귀신 섬기듯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너는 네 돈과 함께 망하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돈을 하나님 보다 더 크게 보는 유혹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아.”“교회 부흥도 돈이 있어야 돼.”하는 말을 부지 중에 내밷는 일은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설혹 그와 같이 보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정말 말은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돈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맞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돈 보다 못하게 생각하고 돈을 하나님 보다 위에다 두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그랬습니다.

영어에 simony라는 성직매매라는 단어가 있는데,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많은 부귀와 권세를 누릴 수 있어 돈으로 성직을 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대 교회에서 돈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려고 하는 것에 가장 많이 해당되는 것은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사려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택한 사람을 선거를 통해 세우기도 하는데, 그 선거에서 돈을 쓰는 것은 결국 성직매매와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인 성령을 간구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 중심은 오랜 마술사 생활로 인하여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21절)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23절)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악한 영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도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성령 받기를 사모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마술사 시몬에게 있었던 마음의 실체를 깨달아서 우리도 이와 같은 반열에 서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체험, 성령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성도일수록 마술사 시몬의 악독한 마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악독한 마음이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은 마음에 두기 싫어하면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은 간절히 원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고린도후서 6장 16-18절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후 6:16-18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며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회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돈 가지고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을 어떻게 가질 수가 있지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사모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능력은 얻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받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시몬의 악독한 마음이었습니다. 시몬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지만 그가 안수 기도를 받을 때 자기가 성령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자기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어서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눈을 뜬 것은 비교적 최근입니다.

19세기 영국 웨슬리 목사님으로부터 시작된 성령 운동은 1903년 웨일즈 부흥, 1904년 인도 부흥, 1906년 4월 9일 미국 아주사거리의 부흥, 1907년 한국 부흥으로 이러지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성령 운동은 우리 모두가 바른 신앙을 위해 성령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는 신앙 생활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운동이 성령 체험을 강조한 것은 옳았지만,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는 신앙의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악한 영의 시험에 쉽게 넘어지며, 절제하지 못하여 쉽게 교만해지거나 신비주의 신앙으로 빠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보다는 방언 받는 일 등 성령의 능력의 역사에만 더 열심을 내고 거룩한 성품을 가지는 일보다 치유의 은사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성령님은 소홀히 여기면서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 방언과 신유, 예언과 환상 등 은사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거짓의 영이 교회 안에 쉽게 침투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능력만 자꾸 생각하고 현상만 바라보니까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중요한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시기 원하십니까?
이것을 결코 적당히 생각하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작게 여길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구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성령님이 정말 내 마음에 오시게 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지난 금요일 성령 집회를 앞두고 부목사님들과 기도회를 할 때, 우리가 영적으로 묶여있음을 보았습니다. 부목사님들과 성령님으로부터 우리가 무엇에 묶여있어 성령 충만하지 못한지 묻자고 했습니다. 한동안 묵상 중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재미삼아 즐기는 일을 포기하기 싫어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령님이 포기하라고 하시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 예배 참석 인원이 많이 줄었습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야구 경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예배 시간하고 겹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되는데, 주일예배야 매 주일 드리는 것이고 야구는 한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신 분들은 정말 성령님을 모신 것이 맞습니까? 성령님하고 같이 야구를 보셨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먹고 사는 걱정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요즘에 그런 도전을 받는 분이 많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사람의 평가, 사역의 성공에 연연하는 마음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마음의 중심, 생각을 드리지 못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영접하는 것은 마음의 생각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신앙 생활하면 겉으로만 신앙 생활해도 됩니다. 화가 나도 표현하지 않으면 되고, 생각으로만 죄짓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마음의 생각까지 성령님의 간섭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에서부터 용서하고 사랑하는가? 성령님은 내 마음의 중심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생각까지 하나님께 다 드러내고 성령님의 간섭을 받으면서 불평, 분노, 음란, 거짓. 모든 것 꺾고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에‘나는 그렇게까지는 살 수 없어!’하는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자아에게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 중심에 오시는 순간에 내 마음의 보좌는 성령님이 앉으시게 되고 나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너무나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시는 것은 이제부터 마음대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리즈 하워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제 나의 시대는 끝났다. 성령께서 완전히 나의 통제권을 장악하신 것이다.”

이런 삶에 대하여 우리 자아는 강하게 거부합니다.‘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시는 것은 내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대로 잘 할께요. 교회도 나가고 십일조도 드리고 제가 할 수 있는대 까지는 잘 할께요. 내 속에 들어오지는 마세요.’성령님이라도 얽매인 생활이 싫습니다. 항상‘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나중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능력은 당장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은 부담스럽지만 성령의 능력, 성령의 축복, 성령의 치유는 원합니다.

제가 성령님께 제 마음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성령님께서 제 안에 있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1%라도 좋으니 제 마음대로 할 자리를 남겨주시면 안될까요?’ 깜짝 놀랐습니다. 제 마음에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제 안에 또 ‘너무 하시는 것 아닌가요?’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 안에 그런 욕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무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1%를 구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주님 되심을 거부하는 것이라, 내가 주인 됨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임하심을 거부하는 것, 일부라고 하지만 결국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능력, 복도 포기하지 못하고 자아도 붙잡고 있는 모습이 참 안타까왔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또 다른 소리가 외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100%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해요. 성령님 제 안에 오세요. 저를 다스려 주세요.’ 제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은 자아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자아는 힘들 것입니다. 자아는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혼은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오신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이 진정한 삶의 기쁨입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니 세상 재미에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인터넷 뉴스거리나 검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운동 경기에 인생 사는 재미를 거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빼먹고도 운동 경기 보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재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함께 여러분의 일을 함께 해보고 성령님과 교제해 보면 운동 경기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지나고 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큐티가 훨씬 재미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하영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휴대전화, 인터넷을 끊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연 할 수 있을까?’ 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축복을 경험하면서 훌륭히 극복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를 견디지 못합니다. 아무런 외부의 자극이 없을 때 외롭다, 우울하다,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어디론가 나가야하거나 무슨 일을 꾸며야 합니다. 휴대전화, 문자, 메일이 없을 때 TV에게로 도망가지 말고, 잠자지 말고, 그저 가만히 그저 조용히 있을 수 있습니까? 피하지 마십시오.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바깥으로 가지 말고 주님이 당신을 만지게 하십시오. 황홀한 시간입니다.‘주님은 나 같은 자를 위해서도 오셨구나.’하는 것을 놀랍게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교제, 이것이 즐거움이 되어야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책감, 죄값의 두려움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가장 만족스러운 경험임을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무엇을 할 것인가? 행성간 골프 시합을 할 젓인가, 달 위로 다리 놓는 게임을 할 것인가, 아니면‘단순히’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게 지겨워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천국 워크숍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주님을 알고 나면 성령님 주님만 원합니다. 

성령님을 친밀하게 알고 나면 성공 보다는 실패를 택하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책 한 권을 추천합니다. [오전 9시 성령이 임하는 시간] 이라는 데니스.J.베넷 신부가 쓴 책입니다.
  
1960년 4월 3일 주일 아침, 캘리포니아의 반 누이스에 의치한 성 마가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데니스J.베넷 신부는 젊은 부부의 도움을 받아 성령 세례를 간구하고 동료들의 안수 기도로 성령 체험과 방언을 하였다. 예배 시간에 성도들에게 그간 최근에 경험했던 놀라운 성령 체험에 대해 말했다. 그는 기도 중에 전에 전혀 배워 본 일이 없는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그가 이같은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말하자 부사제들과 성도들 중에 큰 반발이 일어났고, 그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교회를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교단을 떠나지 않고 시애틀에 있는 작은 교회인 성 누가 교회의 목회 청빙을 받고 다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교회는 성령의 각종 은사를 경험하면서 폭발적으로 부흥했습니다. 이후 모든 교파에서 이같은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게 되어, 기존 교파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서 활발하게 성령 운동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1963년 예일대학 캠퍼스에서 엘리트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은사 운동-방언을 비롯한 성령의 은사들을 체험했던 운동은 미국 내에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어, 타임지에서 이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성령님을 친밀히 알고 나면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게 됩니다!
오늘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 보좌에 임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분명히 가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주장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에 두려운 것은 성령님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부담스럽고 성령의 능력은 원합니다. 성령의 복은 원합니다. 그것은 마술사 시몬의 생각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을 때, 성령님은 언제든지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임하실 것입니다. 

“성령님, 성령님을 모셔들이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성령님께 내 인생을 맡기기를 원합니다. 성령님, 저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