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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 (막 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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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 (막 7:10~14)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명보다 사람의 전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고르반’입니다. 원래 고르반((????)이라는 히브리말의 뜻은 예물이나 헌물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에 사용되었습니다(레 2:1, 5). 그러나 장로들의 전통에 따라 이 말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로 잘못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곧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려 버렸다고 하여 불효의 핑계를 삼을 때 이 말을 썼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신앙의 근본은 저버리고 외식에 치우쳐 고르반적인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1. 하나님께 대한 고르반입니다.

‘고르반’이 본래의 신앙적인 뜻에서 이탈하여 불신앙적인 용어로 전락해 버릴 때 이 말이 범죄의 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핑계도 성립될 수 없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은 그런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맙니다.

1) 최초 범죄의 형식

인간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범죄를 하게 된 것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마귀와 결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행복한 삶을 지킬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1에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하였습니다. 이때 여자가 즉시 뱀의 질문에 반응하면서 의사가 통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여자의 눈에 그 열매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 그것을 따 먹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창 3:5-6).

2) 언약 당사자의 책임

아담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창 2:16-17).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대표요, 또한 오고 오는 인류의 시조가 되는 아담에게 주시는 명령이요, 언약입니다. 범죄의 과정이나형식을 볼 때 마귀가 뱀을 이용하여 여자에게 접근하였고 또 여자는 자기 남편에게 권해서 먹게 하였을지라도 그 전에 하나님과 아담과 사이에 성립된 계약이 우선됩니다. 따라서 그 모든 책임은 계약 당사자인 아담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후손에게 낙원에서의 복된 삶을 전제로 언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3) 핑계와 책임회피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범죄하였다는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하고 추궁하였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하나님과 여자의 핑계를 하였습니다. 여자도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하고 뱀에게 책임을 돌렸습니다. 핑계를 한다고 자기들의 책임이 면해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이유와 핑계를 대려고 하지만 그것은 참으로 비겁한 일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죄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사람에게 대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도리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될 본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눅10;27). 말로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본분을 못다 하면서 고르반이라는 말로 핑계를 하는 것입니다. 

1) 이웃 사랑에 대한 본분

요한1서 4:21에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모세의 계명을 조금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켰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자”라고 하였습니다(마 23:24). 그것은 그들이 율법에 따라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철저히 드리면서 그보다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다는 것으로 증거를 삼았습니다(마23:23).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될 신의와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율법의 더 중요한 것을 져버리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책임을 못다 하면서 고르반으로 핑계를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됩니다.

2) 이기심의 발동

아담의 첫아들 가인은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으나 자기와 자기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신 데 분노를 품고 그 동생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었을 때 그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나님께 반문하였습니다(창 4:4-9). 가인은 형제를 사랑해야 될 본분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동생을 쳐 죽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고도 거기 대한 잘못이나 책임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모른다고 시침을 떼었습니다. 여기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책임을 피하는 고르반적인 태도입니다.

3) 공정하지 못한 척도(尺度)

잠언 16:11에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저울이나 자(尺)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때와 자기에게 적용할 때 방법이 다릅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진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 진 사람을 옥에 가두는 것처럼(마 18:23-35) 자기가 받을 은혜는 당연하게 여기면서 자기가 베풀어야 되는 책임은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 성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은 모르는 척하고도 박넝쿨이 마르는 것을 보고는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끼면서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이 죽도록 버려두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물었습니다(욘 4:6-11).

3. 자신에게 대한 고르반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거나 자기의 사명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 어떤 구실을 만들어 자기를 합리화시킵니다. 이와 같은 고르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무엇에나 자기가 편리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1) 자기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과 주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어리석고 부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시 14:1). 사도 바울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 하였습니다(롬 1:28). 이들은 그 생각이 허망해져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실상은 어리석은 자라는 것입니다(롬 1:21-23).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겉과 속이 다르면서 고르반의 삶에 길들여진 사람은 누구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생활을 하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2) 선과 악의 기준이 흐린 사람입니다.

율법의 척도에 따라서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좋고 나쁜 것과 옳고 그른 것에 대하여 정확한 분별을 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매사를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고 그의 선하신 뜻에 따라서 생각하기 때문에 사려 깊은 판단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율법을 좇아 부모를 잘 섬겨야 되지만 부모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다 드려버렸다는 구실로 자기의 불효를 호도하는 사람은 거짓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고르반 스타일의 신앙에 젖어지게 되면 우선은 그게 편리하고 좋은 것 같으나 얼마 못가서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장자권의 명분보다 팥죽 한 그릇이 더 좋은 줄 알고 쉽게 내주었던 에서는 뒤늦게 후회하며 통곡했으나 돌이킬 기회가 없었습니다(히 12:16-17).

3) 사랑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을 빙자하여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나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앉아 음식을 잡수시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내세우며 손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부정하다고 죄악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근본인 사랑은 배제한 채 조문이나 형식으로 사람을 얽어매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세상에서 멸시받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하는 것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부모를 섬기는 것도 억지로 하는 의무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위여야 합니다. 사랑이 동인(動因)이 되면 ‘고르반’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롬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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