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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키자 (대하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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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감동시키자 (대하 1:1~12)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3무의 시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첫째는 무관심의 시대, 둘째는 무책임의 시대, 셋째는 무감동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 빼놓고 관심가질 일도 없고, 책임질 일도 없고, 감동 받을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극도의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대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가장 보편적인 표현이 '난 몰라'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시도하여 가족에게, 또는 이웃에게 말을 걸면 가장 흔하게 되돌아오는 답변이 무엇입니까? '몰라요'-아닙니까?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그것이 소위 파괴와 해체로 상징되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현대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시대의 특성 중에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무감동입니다. 감동받을 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감동받을만한 책이나 영화가 아주 드뭅니다. 감동받을만한 사건이 희귀합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감동받고 싶지 않습니까? 자기 아들까지도 내어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통하여 감동받고 싶어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솔로몬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탁월한 지혜와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셨습니다. 솔로몬만큼 권세와 부귀와 영광을 누린 사람은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만 특별한 복을 쏟아부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없는가? 찾고 계십니다. 솔로몬에게 복을 부어주신것처럼 복주시고자 감동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솔로몬의 예배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이 드린 예배의 어떤 점이 하나님께 감동이 되었을까요?

1. 솔로몬의 예배는 감사의 예배입니다.(1절)
  
다윗에게는 많은 아들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능력있는 자도 있었으나 솔로몬에게 왕위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왕위는 견고하게 자리잡게 되었으며 그의 세력과 나라는 심히 창대하게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여 주시기 때문이었습니다.(1절)  솔로몬은 형통이 자신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살펴주시고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드리고자 일어났습니다. 혼자만 예배드리지 않고 온 이스라엘의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재판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방백들과 족장들에게 명령을 내려 소집했습니다. 그리고 온 회중과 함께 여호와의 장막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본문을 읽으며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남보다 특별한 은혜를 입었는데 당연히 감사한 마음을 하나님께 표현해야지!'  그런데 특별한 은혜를 입고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구요. 큰 은헤를 받고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냥 넘기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사람들의 마음이 강팍하여져서 은헤를 입는 것은 내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내가 기대한대로 은혜를 입지 못하면 원망하는 세상입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고 절대권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였습니다. 사실 그 자리에 앉으면 누구든지 교만해지기 쉬운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내려다보면 내 위에 누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헤임을 깨달았습니다. 큰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러자 그 감동이 소멸되기전에 즉시 하나님께 온 맘을 다해 예배하고자 하나님앞에 나아갔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는 감동하셨습니다. 
  
기독교 사회학자요 설교가인 토니 캄폴로 교수가 친구 집을 방문했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의 친구에게 만 4살 먹은 딸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폭풍우치고 무섭게 번개 치던 밤에  딸이 2층 방에 혼자 있었습니다. 갑자기 2층에서 딸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 얼마나 딸이 겁나있을까 생각이 나서 아빠가 2층으로 급히 뛰어 올라갔습니다. 그의 딸이 창문 앞에 양 팔을 벌리고 선채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저를 사진 찍어 주실거지요. 멋있게 찍어주셔요" 그날 밤 그 친구는 자기 딸의 존재를 하나님이 보낸 천사처럼 느꼈고 그의 가족에게 그 두려운 밤이 잊기 어려운 행복한 밤이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캄폴로 교수 또한 자기 친구의 천진난만한 딸의 이야기를 통해 감사의 진정한 의미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교정할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폭풍우치고 뇌성 번개 요란한 밤을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 사진을 찍어 주시고자 플래쉬를 터트리시는 것으로 해석할줄 안 그 로맨틱한 소녀의 마음 그리고 어른들조차 두려워하던 그 밤 이 소녀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 "하나님, 감사해요"는 그 어떤 신앙 고백보다 위대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감사에 하나님은 오늘도 감동하십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감사로 드리는 찬양과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감동하십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헌금에 감동하십니다. 의무감에 드리는 예배도 좋지만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크게 감동시킵니다. 


2. 솔로몬의 예배는 최선을 드린 예배입니다.(6절)

성경은 '솔로몬이 놋 제단 위에 일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증언합니다. 천 마리의 번제에는 솔로몬이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잘 나타내 줍니다. 특히 주님에 대한 솔로몬의 진정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부자라해도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소를 잡아 각을 뜨고 태워서 드리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얼마나 번거로왔을까요?  그 이전에 그렇게 많은 소를 희생의 제물로 드린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조차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솔로몬이 남다른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솔로몬은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힘껏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이 하는만큼 적당히 흉내내는 제사보다는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다른 누구보다 더 크고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만큼 감사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무엇으로 감사할까? 그리고 이 여인은 고이 간직해온 옥합을 생각해 낸 것입니다. 아마 인생의 중요한 때 이 옥합속 향유를 사용하고자 준비해온 그녀의 소중한 자산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 향유의 가치가 300데나리온 이상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평범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치는 거의 일년 봉급에 해당하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머리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할 수 있는 헌신이었고 해야 할 헌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리석은 허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하며 감동을 표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허비요 지나친 헌금으로 비추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 아름다운 사랑의 예배였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예배드리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최소한의 시간만을 드리고 최대한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까?' '최소한의 물질을 드리며 최대한으로 큰 은혜를 받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그 방법을 고민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일본에 그리스도인 사회사업가였던 이시이 쥬지 선생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맹인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자기의 우울증을 호소하며 어떻게 밝게 사는 비결이 없겠느냐고 물었답니다. 이시이 선생은 그에게 "점자 성경을 읽을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읽지 못한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안마를 할수 있느냐?"고. '예'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는 나가냐"고 물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십일조를 드리냐"고 물었습니다. '못하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실천을 해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첫째, 안마해서 얻은 수익에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첫째 십일조를 드릴 것, 둘째로는 두 번째 십일조로 당신보다 더 불쌍한 이웃들을 구제하고 섬겨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가 한 달 후에 이시이 선생을 찾아와 "선생님, 제 일생에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행복감과 기쁨이 제 마음에 넘쳐 납니다."라고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시이 선생은 이 맹인에게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할 수 있도록 안내 한 것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헌신만이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지난 주간에 '목적이 이끄는 소그룹 세미나'를 참석했습니다. 많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도전은 미국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수준이 아니라 소득의 90%를 드리고 10%만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합니다. 릭 워렌목사님이 하나님께 최선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행동하자 하나님은 엄청나게 축복해주셨습니다. 지금 그분이 쓰신 책들이 수백만권이 팔려서 많은 돈이 인세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 헌금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만으로도 시험에 드는 분들이 많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든 것중에 하나가 헌금과 관련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부담스러워서 헌금설교를 할 수 있는한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어쩌다가 아주 짧게 몇 마디 하고 지나가도 꼭 걸립니다. '교회갔더니 목사님이 돈 얘기만 하더라 부담되어서 교회에 못 가겠다.'하며 교회에서 멀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눈치보느라고 최소한의 헌신만을 가르쳐서 여러분이 큰 복을 받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여러분, 최소한의 헌신과 헌금을 드리는 예배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외아들을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예배를 드리며 드릴 수 있는 최선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과 나의 능력과 나의 소유 한도안에서 어느 정도를 드릴 수 있는지, 얼마나 드려도 시험들지 않을 수 있는지, 얼마나 드려도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서 기쁘게 나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볼 때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떤 한인교회 교인들이 허구한 날 주일예배를 빼먹고 골프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이를 개탄하며 제발 주일날은 골프장에 가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지 않아 집사 하나가 주일날 골프장에 또 간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사람만큼은 하면서 믿었던 집사이기에 목사님은 너무도 화가 나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는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몸은 교회에 와있는데 마음은 골프장에 가 있고, 골프장에 가면 몸은 골프장에 있는데 마음은 교회에 가있으니 몸과 마음 중 어느 쪽이 교회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저는 몸보다는 마음이 교회에 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겨서 그만…" 
하나님은 어느쪽을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여 예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예배 한 번 잘 드리고 수지맞은 사람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부럽지 않습니까? 왕이 되었어도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은 세계 각국의 왕들이 소문을 듣고 와서 찬사를 아끼지 않은 왕입니다. 재물로나 재주로나 지헤로나 군사력으로나 지식으로나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왕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하나님이 아낌없이 부어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지 모릅니다. 예배의 자리는 감동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자리입니다. 예배의 시간은 복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눈에 띄는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풍성한 감사로 채우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풍성한 사랑을 채우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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