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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례 (마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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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례 (마 28:19)
 
 
‘은혜의 방편’인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성례’(聖禮)에 대한 전체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먼저 정리하고, 두 가지 성례 중에서 세례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플로렌스 공의회(Council of Florence, 1438-45)에서 성세성사(세례), 성체성사(성찬), 견진성사, 고해성사, 신품성사, 혼인성사, 종부성사를 성례로 인정했습니다. 1547년 트렌트(Trent) 공의회에서는 이 일곱 개의 의식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라도 성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성경에 있는 의식들을 빌려왔지만, 많은 의식들 중에서 은혜의 방편이 될 성례를 정하는 일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구약을 성취하신 예수님께서 지키도록 명령하신 거룩한 예식은 ‘세례’와 ‘성찬’ 뿐이라면(마 28:19-20; 고전 11:23-26), 그것만이 성례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명령 받은 것 없이 나름대로 정한 의식들을 성례처럼 존중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저주받아 마땅하지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성례들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베풀어질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그림자요 모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체요 원형이신 예수께서 오시므로 성례로서의 유통기한은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세례와 성찬만을 지킵니다. 그런데 할례와 세례는 정결해졌음을 의미하고, 유월절과 성찬은 구속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외적인 양태는 달라졌어도 성례에 내포된 의미는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골 2:11-12). 다만 신약의 성례가 그리스도를 더욱 밝고 충만하게 드러낸다는 차이 뿐입니다.

성례는 제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고, 믿음을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첫째로 말씀은 독립적이지만 성례는 말씀에 의존된 은혜의 방편이라는 점입니다. 성례에는 반드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례는 약속하신 말씀을 볼 수 있는 시각적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그 약속을 확인하고 확증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 성례가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떠나서 성례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은혜, 성례가 아니고서는 받을 수 없는 고유한 은혜란 없습니다.

둘째로, 말씀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성례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세례를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 평신도가 급하게 개인적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롬 4:9-10).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역시 세례를 받지 않았으나 낙원이 선언되었습니다(눅 23:43). 구약과 신약은 구원이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다만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성도는 성례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셋째로 목적과 대상에 차이가 있습니다. 말씀은 믿음을 발생시키고 강화시킵니다. 반면에 성례는 단지 믿음을 강화할 목적으로 주어진 은혜의 방편입니다. 성례가 믿음을 발생시키지는 못하기 때문에 불신자에게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고 견고하게 붙드는 은혜를 얻습니다. 이처럼 연약한 성도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일에는 성례가 대단히 귀하고 거룩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헛되이 혹은 가볍게 여기거나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례의 효력과 관련해서 로마 가톨릭은 성례를 받는 사람의 신앙과는 상관없이 성례를 ‘행하는 행위 자체로’(ex opere operato) 참예자의 영혼 속에 초자연적인 은혜가 주입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부 루터파에서는 성례 자체에 신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성례 자체에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힘이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 떡, 포도주’ 자체가 거룩하거나 신비한 효력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례를 베푸는 사람의 경건성에 따라 성례의 효력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성례의 효력은 그것을 은혜의 방편으로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며, 믿음으로 받는 자들 속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효력이 나타납니다.

로마서 4장 11a절에서 사도 바울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했는데, 표(sign)와 인(seal)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성례는 내적으로 받은 은혜의 외적인 ‘표식’일 뿐만 아니라 그 은혜를 확고하게 하는 ‘인장’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약속을 받은 사람이며, 그 언약을 계속해서 믿고 소망하며 사랑할 사람임을 표하고 인을 치는 것이지요. 세례는 죄 씻음 받았음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표하고 인을 치는 성례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고 명하신 말씀을 통해 제정되었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위격을 각각 언급해서 ‘성부의 그리고 성자의 그리고 성령의 이름’(the name of the Father and of the Son and of the Holy Spirit)으로 주도록 명령되었습니다. 세례의 시행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전제되었지요.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례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름“으로”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헬라어로 에이스(eivj)인데 ‘안으로’(into)라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연합시키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이 성도의 것으로 간주됩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새로운 관계로 들어간 것처럼, 세례는 유형교회의 회원으로서 그리스도께 연합된 새로운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세례가 새로운 존재로의 ‘입문’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한 번만 받습니다. 비록 건전치 못한 단체의 불경건한 지도자에게 세례를 받았더라도, 삼위일체를 부정하지 않고서 세례가 베풀어졌다면, 초대교회 때의 도나투스파나 종교개혁 시기의 재세례파들처럼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는 세례와 그분의 말씀을 가르쳐서 지켜 순종케 하는 것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분께로 연합되어 그분께 소속된 지체라면, 이제는 그분의 것이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지시하는 삶을 살려면, 옛 사람이 살아있어서는 안되기에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필요하지요. 세례 받는 자의 입장에서 세례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sign)하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도록 신앙을 확정(seal)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존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마땅할 것입니다.

세례가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과 긴밀한 관계에 있으므로 개혁자들은 세례를 아무나 베풀도록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목사가 집례 하도록 엄격하게 제한했지요. 목사가 더 경건하거나 더 우월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례를 바르게 시행할 수 있도록 말씀 맡은 자를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례는 교회가 공적으로 행할 은혜의 방편이므로 아무나 사사로이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교회가 함께 예배하는 자리에서 교회의 권위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세례에서 ‘물’은 죄의 오염과 죄책으로부터 씻겼음을 상징합니다(겔 36:25-26; 요 3:5; 고전 6:11). 그 물의 적용 방법과 관련해서는 물에 잠기게 할 필요가 없고 머리 위에 붓거나 뿌려서 베푸는 것이 더 옳습니다. 세례에 해당하는 헬라어 ‘밥티조’(baptivzw)는 성경에서 ‘담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씻다’ ‘뿌리다’라는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씻고 뿌리는 것을 구약의 정결 예식과 관련지으며(히 9:10, 13, 19, 21),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존재라 합니다(히 10:22, 24; 벧전 1:2). 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성취는 침례보다 성찬을 통해 더 잘 기념될 수 있습니다. 물세례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적용 측면, 곧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 주심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머리에 물을 붓거나 뿌리는 방식이 침례보다 더 적절할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은혜 언약의 표와 인이었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내용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유아들도 할례를 통해 ‘언약적 신분의 특권’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창 17:12). 신약에 와서도 이 원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은혜 언약의 시대가 열리는 오순절에 “이 (성령의)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행 2:39)에게 해당한다고 선언합니다. 빌립보의 간수가 믿었을 때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행 16:15)았다는 말씀에서, 유아가 배제되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신약의 성도도 아브라함의 언약에 기초를 둡니다. 은혜 언약의 원리가 바뀌거나 폐지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므로, 유아 할례처럼 유아 세례도 정당합니다. 물론 할례 받은 이스마엘과 에서와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던 것처럼 세례 받은 자가 반드시 중생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습니다. 야곱도 유아 할례를 받았겠지만 하나님의 참 백성이라는 지위는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 주어졌습니다. 유아 세례자 역시 스스로 분별력 있는 연령에 이르러 세례에 믿음으로 반응해야만 비로소 하나님 백성임이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자녀는 야곱처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와는 전혀 다르게 자랍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기도하며 찬양하지요. 언약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확실하게 누립니다. 이처럼 성도의 자녀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대적자로 드러나지 않는 한 불신자가 아니므로 세례를 줍니다.

세례는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 의미를 미처 이해하지 못할 교회의 자녀들도 장성해서 언약하신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언약의 부모들은 주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교훈할 수 있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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