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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1)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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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1) (행 11:19~26)


우리가 옛날에 많이 하던 게임가운데 여러 사람이 둥글게 앉아 귀속 말로 무슨 말을 전달하면 옆 사람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놀이의 흥미는 대개 마지막 사람에게 전달한 그 말을 크게 복창해 보면 처음 시작한 말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엉뚱한 말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전달 과정에서 처음 말한 사람이 의도하지 않은 의미가 첨가되기도 하고 삭제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자가 “사과는 건강에 좋습니다. 잊지 말고 가족과 함께 꼭 드세요 그러나 저녁에는 안 좋습니다. 저녁에는 절대로 아닙니다.”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한 바퀴 돌고 나니까 “사과하면 건강에 좋습니다. 잊지 말고 가족에게 꼭 하세요 그러나 저녁에는 안 좋습니다. 저녁에는 절대로 사과하지 마세요”가 되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누군가가 <사과는>하는 표현을 <사과하면>으로 바꾸는 데서 의미의 변질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영적 변질의 한 사례가 그리스도인이란 단어의 용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하면 가장 보편적 인식은 그냥 교회 나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될 때도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이 소아시아 수리아(시리아) 안디옥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4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 제국 치하에서 수리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지금은 터키 영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안디옥은 지중해에서 24km 떨어진 오론테스(Orontes)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중요한 상업도시이었으며 당시 이미 인구가 50만에 달한 곳으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스테반의 순교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성도들이 수리아 안디옥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안디옥은 새로운 선교의 중심도시가 된 것입니다. 순교와 박해는 복음을 저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의 중심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는 1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 도달한 이곳에서 안디옥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흥하는 공동체의 지도자인 바나바는 함께 섬길 동역자를 찾습니다. 

25-26절을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동안은 제자들, 성도, 형제들 이렇게 불리우던 이들이 이제 여기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일컬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크리스챤)이 말의 본래 어떤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정체인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라고 하는데 그리스도(Christ)라는 단어에 "~ian"라는 접미사(속한 사람)를 추가한 것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이 명칭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스스로 사용한 명칭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믿지 않는 자들 즉 불신자들에 의해 이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크리스티아누스라고 불리우게 했는가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26절에 이들이 바나바와 사울 두 지도자의 가르침을 1년 동안 본격적으로 받고나서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보실까요?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년간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받았을까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제자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제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제자’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따라가는 사람’(follower)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제자 훈련의 초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어떻게 그분을 따라 살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의 핵심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전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중세기 독일의 수도사인 영성 작가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n of Christ, Imitatio Christi)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고전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핵심은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함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 안디옥 시민들은 당시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이런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크리스티아누스,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부른 것입니다. 불과 1년 밖에 안된 이들이 이런 변화의 흔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목회 하면서 저에게 늘 신비롭고 경이롭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예수 믿고 교회 나온지 수십년이 된 분들 중에도 전혀 예수 냄새가 안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안디옥 교인들처럼 교회 나온지 1년밖에 안되었어도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늘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크리스티아누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한번 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행26:28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여기서는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왕(헤롯 대왕의 손자, 37-44년까지 팔레스타인 전체를 다스림)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오히려 그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전도하자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안디옥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라고 불리운 것도 거기서 그들이 모든 삶의 기회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었던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그리스도라는 말은 본래 ‘기름 부으신 사람’이란 뜻입니다. 구약에 보면 백성을 다스리는 왕,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던 제사장, 그리고 백성들을 진리로 가르치던 선지자, 이렇게 세 유형의 사람들이 기름 부으심을 받고 그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끊임없이 불완전한 왕과 제사장, 선지자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직접 기름 부어 주실 그리스도를 기다려 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초대 교회의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그들이 기다려온 그들의 왕이요 제사장이시오 선지자이신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가 구주이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그들은 전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그리고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안디옥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처음 예수의 제자들은 안디옥에 오기 전까지는 주로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 와서 그들의 삶은 획기적 전환을 경험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 삶의 안전지대를 뛰어 넘어 이방인들인 헬라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본문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중에는 한 평생 교회를 출석하면서도 아직 한 번도 안 믿는 이웃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본 경험이 없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들을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누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크리스티아누스 곧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꼭 세 번 나옵니다. 두 번이 사도행전에 나오고 한번은 베드로 전서에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란 단어의 세 번째 용례를 베드로 전서에서 살펴 보겠습니다. 

벧전4:16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그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삶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우는 명예를 선물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안디옥 교인들의 모습도 바로 그런 이미지로 등장하지 않습니까? 

본문이 시작되는 첫 구절 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더니” 아니 믿음의 박해로 그들이 흩어져 안디옥까지 오게 되었다면 이제 거기서는 조용히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박해로 흩어지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비단 복음을 증거 함으로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에 동참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지도자인 바나바를 따라 착한 삶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난의 와중에서도 본문은 안디옥 공동체의 지도자 바나바를 소개하며 제일 먼저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하지 않습니까? 

일찍 행전4:36에 보면 이 착한 지도자 바나바의 삶을 성경은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름 바나바는 그의 별명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필요, 공동체의 필요를 보고 자기의 자산인 밭까지 팔아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4절은 이런 지도자의 영향을 받으며 안디옥 교회에는 큰 무리가 더해지는 부흥이 일어났고 이런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란 명예로운 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이런 바나바 같은 격려와 위로를 소명으로 알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요구되지 않습니까? 입만 열면 이웃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자기체면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교인들로 인해 우리 공동체는 얼마나 자주 무거운 분위기로 변합니까? 그리고 이웃을 배려하기보다 언제나 자기 목전의 이익과 편의를 먼저 챙기는 무례한 사람들, 진실로 교회를 섬기기보다 교회를 이용하여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 교회 나오면서 주차 질서도 하나 지키지 못하고 주차 양보하나 제대로 못하는 이런 사람들로 인해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향한 신앙 공동체의 매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결국 가장 강력한 공동체에로의 회복은 교회안에 성도들이 먼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요즈음 자괴하는 마음처럼 안타까운 일이 정말 멋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는 얼마나 멋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까? 별명으로 얻은 바나바라는 이름처럼 이웃들을 만날 때 마다 격려하고 위로하던 사람, 공동체가 무엇을 필요로 할 때 서슴치 않고 자기 지갑을 열던 사람, 젊은 지도자 사울을 믿어주고 격려하고 세우던 사람, 때가 차면 미련 없이 물러설줄 알던 사람-정말 멋있지 않습니까?

한국 사회 수필문학의 역사를 만든 피천득 선생의 <인연>이란 책에 보면 “맛과 멋”이란 글이 있습니다. “맛은 감각적이지만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 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장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 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고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마지막 문단) 맛은 몸소 체험을 헤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맛에 지치기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피천득 선생의 이 글을 떠올리며 정말 이 땅에 멋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묻습니다. 정말 멋있는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들-어디에 계십니까?

지난 2004년 저는 우리 교우들과 함께 군 부대 침례식을 위해 백령도 섬을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백령도 최초의 교회인 중화동 교회를 방문한 이래로 그 교회 기독교 역사관 앞 마당에 세워진 그 교회 창립 멤버요 백령도 최초의 그리스도인 허득 성도의 유언을 새긴 비문을 자주 떠 올려 봅니다. 1894년 백령도 출신 관리 당상관이었던 허득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황해도 소래 교회(백령도에서 황해도 소래는 눈에 들어오는 가까운 곳)가 그 마을을 어떻게 바꾸고 변화시킨 소식을 듣고 감명을 받아 스스로 성경을 구하여 읽기 시작합니다. 1898년 9월 그는 마침내 마을 사람 모두를 모아놓고 자신이 깨달아 알게 된 성경 이야기를 하며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예수를 믿자고 설득합니다. 동리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만장일치로 다 예수를 믿자고 결의합니다. 그 날부터 저녁이면 이 섬 사람들은 사랑방 모임을 갖고 성경을 읽고 기도합니다. 목장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8년 10월 9일 그들은 황해도 소래교회 서경조 장로와 연락하여 백령도 중화교회 창립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1900년 11월 8일에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초청하여 세례 문답을 받고 허득을 위시한 7명이 세례 교인이 됩니다. 백령도는 그후 전라도 증도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범죄율이 없는 섬, 섬 사람 4,000여명중 약 80(증도는 2,000명중 90)가 예수를 믿는 섬, 이웃들이 서로 돕고 섬기는 또 하나의 낙원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의 출발선상에 허득이라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허득은 1902년 6월 3일 자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나는 이 유언이야 말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위대한 유언이었다고 믿습니다. 유언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예수 잘 믿으라” 그래서 그 교회 앞 마당에 비석에 그 비문이 새겨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고 한 경직 목사님도 말년에 남한 산성에 머무시며 방문하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꼭 들려주실 말씀이 없느냐고 하면 예외없이 조용한 미소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렇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역사속에 남긴 가장 놀라운 도전은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세상 떠 나는 날-이 말 한마디 자녀들에게 남기고 가면 좋겠습니다. “내 평생에 한 가지 예수 잘 믿고자 노력했다. 너희도 예수 잘 믿거라.”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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