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요 3:13~18)

  • 잡초 잡초
  • 506
  • 0

첨부 1


예수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요 3:13~18)


오늘은 사순절의 네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가장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하여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력 가운데 사순절은 여러 절기 중에서 매우 중요하며, 우리는 이 사순절을 잘 보내므로 경건과 영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가장 성숙하기를 원하시면, 사순절을 잘 지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광야로 물러나서 기도와 묵상으로 보내셨던 것을 본받아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40시간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다가 부활하시는 시간을 계산해보았는데, 약 40시간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무덤에 들어가 계셨던 그 시간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40시간은 금식하면서, 기도에 힘쓰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경건의 시간으로 40시간을 지키다가 기도 시간이 확대되어 한 달간 지키게 되었고, 니케아종교회의에서는 주일을 제외하고 40일간을 경건한 시간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부활절에 세례받기 위하여 예비자들이 보낸 경건훈련이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면서 참회와 자기 부정의 기간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한 평양노회는 2012년에 노회설립1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 책임을 맡고 있어 연로하신 증경노회장님들을 모시고 사업을 위한 간담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너무 연로하시고 신장투석 중에 계신 원로목사님이 노회가 100주년 사업을 한다고 하는데, 후배 목사님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휴대폰으로 말씀하시는데,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의 말씀만 하시는데, 휴대폰에 너무나 가까이 대고 힘을 들여서 크게 말씀하시는지, 왕왕거리기만 하지 무슨 말씀인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중요한 말씀을 부탁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목소리를 낮추어 적게 말씀해달라고 하고, 천천히 말씀하시라고 해도 제 말은 듣지 않고는 당신의 말씀만 하시고 끊었습니다.  그 분의 친구이신 다른 목사님이 간담회 시간에 전달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전화하신 내용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일생 목회하시고 물러나서 자신의 목회를 되돌아보니, 부끄럽기 한이 없었답니다.  설교라는 것이 철학과 윤리적인 설교요, 마치 사탕발림과 같은 설교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듣기 좋으라고 축복을 말하고, 무조건 잘 되는 것처럼, 그런 말씀이나 선포했습니다.  이제 다시 목회할 수 있으면, 예수 십자가의 구원을 선포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 이것만 선포해야 영혼이 살고, 많은 심령들이 예수 믿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피를 토하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을 개척하면서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고전2:1-2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 구원을 강조해야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의 영성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십자가의 복음을 먹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 하와가 범죄한 후로 죽음이란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죽음이라는 병균이 자리 잡고 온 몸으로 확산되어 치유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어있는데, 우리의 영과 육은 죽음의 병에 걸렸고, 죽음이라는 병균에 점령당하였습니다.    죽음의 증세가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모든 죄악과 질고와 환란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창조주 하나님만을 의존하면서 살아가야할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태도를 버리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면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사람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를 속박하고 억압하고 부자유하게 얽어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그 동산에 두시고 동산의 모든 실과는 따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창2:16-1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말하는 뱀의 유혹을 받아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따먹고, 자기의 남자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유대나라에서 여성들은 남자들에게 쥐어 살고, 매여 있어야 했습니다.  하와가 먼저 범죄하고 남자에게도 그 실과를 먹게하여 범죄하게 만들었다고 하여, 여성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것 또한 죄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죄가 더 많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원죄와 자범죄(실행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아담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죄,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자세요,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죄를 말합니다.  원죄는 자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닫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범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을 실행죄라고 합니다.  자범죄라고 하면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말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 행동으로 나타나는 죄가 있습니다.  생각의 영역에서 죄가 싹을 트고 말의 영역에서 죄가 자라고, 행동의 영역에서 죄가 커지게 됩니다. 죄는 생각에서 시작하여,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죄는 점점 더 커지고 무서운 죄악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죄는 미움, 시기, 분노 같은 것입니다. 말의 영역에서 남을 욕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됩니다.  사람은 말하면서 듣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행동으로 죄를 마무리합니다.  죄는 폭력을 낳습니다.   생각에서 그치는 죄보다, 말로 이어지는 죄가 더 무겁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죄는 사실 저 무겁고, 중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회에서 큰 죄를 말할 때에 전통적으로 7가지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만, 질투, 분노,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입니다.  다 큰 죄입니다.  다만 순서를 정하자니, 좀 더 우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부들이 생각할 때에 교만이란 죄가 가장 큰 죄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던 사람도 조금만 추어주면 교만해집니다.   조금만 잘했다고 칭찬해주면, 자기 설 자리를 벗어나서 교만해집니다.  

교만이 질투를 부르고, 분노로 이어집니다.    교만, 질투, 분노는 같은 선상의 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탐심, 탐식, 게으름, 정욕 이런 죄도 같은 유형의 죄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탐심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탐심이 탐식으로 이어지고 게으름으로 자리 잡고, 정욕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여러 큰 죄 가운데 탐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탐식이 무엇입니까?  음식을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음식에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중세에는 탐식을 5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너무 빨리 먹는 탐식, 너무 비싼 음식을 먹는 탐식, 너무 많이 먹는 탐식, 너무 오래 먹는 탐식, 너무 거하게 먹는 탐식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처음에 일곱 가지 죄를 체계화하였던 그리스의 수도사 ‘에바그리오’는 탐식을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꼽았습니다.  당시에 먹을 것이 늘 부족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배가 부르면 게을러지고, 나태에 빠지고, 정욕이 침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삼중적인 소외를 가져온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진정한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의존적인 관계를 정립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기쁘시게 하고,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진정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 나의 계획, 나의 의지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고, 분순종 하게 됩니다. 자기를 주장하면 자아를 잃어버립니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소외, 자아로부터의 소외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죄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깊이 숨어있는 죄를 들추어내고, 우리들이 죄인인 것을 시인하고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여러 죄악에 대하여 깊이 다룰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일생 떠나지 않는 그 많은 죄를 어떻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실존의 문제는 죽음이란 문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라먹다가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끝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래시계가 멈출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죽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력을 가진 존재인지,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은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으며, 정말로 짧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세기 100년 안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죽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사망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는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이다”고 했으며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아침안개와 같으며, 잠시 피었다고 시들어버리는 풀의 꽃”과 같습니다.  

우리들은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여야 하는데,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여야 합니다.  죽음도 나의 생애의 아주 소중한 순간이라고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생명의 새로운 변화에 불과합니다.  지금 나는 육신에 쌓여 살아가고 있지만, 죽은 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처럼 전혀 새로운 몸, 신령한 몸을 입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심판하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의 후손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4)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를 벌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8:23의 말씀에 아주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악인을 심판하고, 죄인을 정죄하여 지옥에 보내셔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고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구원받기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죄인을 반드시 심판해야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최후 최선의 방책을 계획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으므로 인류에게 죄가 들어 왔다고 하면, 한 사람- 의로운 한 사람, 죄 없는 한 사람, 인간을 대표하고 대신할 사람, 한 사람만 심판하여 죽게 하고, 모든 인간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 죄 없는 사람, 인간을 대표할 사람, 그리고 세상 죄를 다 짊어질 사람을 찾아보니,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각하기를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가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러나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 뿐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왔습니다.  그 분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삶을 사시고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이요, 우리의 죄 값을 치르고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형벌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죽음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 이사야53:6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에 “다 이루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상업적인 용어인데, 완불되었다, 빚이 갚아졌다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치르시고 이루신 것이기에 같은 죄를 가지고 두 번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처벌을 받겠다고 나갔더니 이미 완불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소중하게 받아들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죽음을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인생을 주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성경에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신뢰한다는 말이요,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에게도 있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만 믿습니다”라고 하니 하나님은 믿음을 그 믿음을 그의 의로움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성경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란 예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혀 내려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손을 주님에게 내어 밀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선물로 받기 원하시면 하나님 앞에 믿음이란 손을 펴서 내어 밀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주님만이 나의 주인이시며, 내가 믿고 신뢰하고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활하여 살아계시는 우리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호소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십시오. 

요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위하여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뱀에 물린 사람들은 다 구리뱀을 쳐다보라고 하셨습니다.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많이 물렸던지, 적게 물렸든지 지금 죽어가든지 구리뱀만 바라보면 살아납니다. 옛날 구리뱀을 바라본 사람은 구원받은 것처럼, 이제는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믿기만 하면 그는 구원받습니다.    옛날 구리뱀을 장대에 높이 매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아난 것처럼 지금은 영생을 얻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오늘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