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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저울 (단 5:1~9/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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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저울 (단 5:1~9/25~31) 


영국의 단편작가 '스티븐슨'의 작품 중에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 속에 보면 동네 사람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킬'이라는 의학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과부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보호자이며 자비의 아버지로 불리어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그를 인간 이상의 그 어떤 존재로 여기며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는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밤만 되면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나타나 온 동네를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흉악범은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성폭행하고, 약탈을 일삼는 등 온 동네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은 골머리를 앓던 끝에 경찰을 도와 그 '하이드'라는 흉악범을 잡아 동네의 화근을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한 밤중에 동네 한 복판에 있는 보안관사무실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몰려든 사람들 앞에 '하이드'라는 흉악범이 체포되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이드의 가면을 벗기는 순간! 온 동네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는 바로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지킬'박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단편 속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우리에게는 선하고, 바르게 살고 싶은 양심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적일 뿐 아니라 남을 짓밟고 올라서려는 악에 기우는 심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부에서는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양면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서도 세상 죄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하다가도 교만에 빠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 앞에 교만했던 대 바벨론 제국의 '벨사살' 왕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다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달아보니 함량미달이 되어서 그 날로 인생을 종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정확합니다. 오늘도 그 저울로 인생들을 달아보고 계십니다. 
 

1. 시대적인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가 고대서양역사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로마제국에 대한 역사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 당시 문화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시민이 된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알았고, 또 로마 시민권이라도 받게 되면 그것을 최고의 자랑으로 알았습니다. 
  
당시 로마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세네카'는 '나는 세 가지를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⑴짐승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 ⑵여자로 태어나지 않고 남자로 태어난 것, ⑶그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도 자랑스러운 로마제국에 태어난 것이 감사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로마 제국보다 더 위대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입니까? 바벨론입니다. 이 바벨론은 로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권위를 지닌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바벨론을 '바벨론 대제국'이라 불렀습니다. 
  
역사가들은 문명의 발상지를 바벨론 제국으로 보았습니다. 그 나라에 벨사살 왕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벨사상 왕의 생일날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벨사살 왕의 생일날에 전국 각지에서 각료들과 왕족들과 귀족들 일천 명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국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그곳에 다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잔치가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무희들은 요란한 춤을 추고, 벤드는 황홀한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초대받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나타내고 떠들고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때 흥에 도취된 밸사살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물론 장내는 조용해졌습니다. 벨사살 왕이 입을 열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이 축제를 빛내기 위해 우리의 선왕 느브갓네살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빼앗아 온 성전 그릇에 술을 마셔봅시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믿는다는 여호와의 신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신이라는 것을 보여줍시다. 아마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콧대가 납작해 질 것이요.'하며 교만을 떨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빼앗아온 금으로 만든 그릇들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술을 따라 마셔가며 잔을 돌렸습니다. 그 기물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되었던 성스러운 그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 속죄일 날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다루었던 성전의 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물에다가 술을 따라 마시고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 연회장 중앙 촛대를 세워둔 맞은편 '석고로 하얗게 칠해진 벽'에 몸통도 없는 뚝 잘린 손이 나타나더니 손가락으로 하얀 벽에다 빨간 글씨를 써 놓고는 자라져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벨사살 왕이 목격했습니다. 유대학자들은 그 손이 '가브리엘 천사의 손'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절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여기 '그때에'는 '여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술잔치가 다 끝났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잠에 곯아 떨어져 있을 때'가 아니고, 한창 지금 술잔치가 무르익은 그때에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실감나게 표현한다면 '나타났다'는 말은 '툭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벽에서 뭉클뭉클 하더니 사람의 손가락이 튀어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떠들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되었고 찬물을 끼얹은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을 것입니다. 
  
벨사살 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큰 소리로 술객과 갈대아 술사와 점쟁이를 불러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보이면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그로 나라의 세 째 치리자로 삼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지만 그 해석을 왕에게 알게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벨사살 왕은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들도 다 놀랐습니다. 
  
10절에 보면, 바로 이때 태후가 들어와서 왕에게 다니엘을 추천합니다.  그가 다니엘을 추천하는 이유는 다니엘을 영적인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부름을 받아 왕의 앞에 나오자 왕은 다니엘에게 글을 읽고 해석해 주면 나라의 세 째 치리 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2. 다니엘의 신앙의 양심은 어떠한가?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해석해 주기 전에 먼저 자신의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17절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예물은 왕이 스스로 취하시며 왕의 상급을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리이다." 
  
다니엘은 왕이 제시한 엄청난 상급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 해석을 하겠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다니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예언자의 사명이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사명보다 상급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상급에 따라 사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 한 분을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의 존재의미요 목적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유다 왕 여호야김 때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의 침입을 받아(B.C 598) 다른 귀족들의 자녀들과 함께 인질로 잡혀간 귀족 청년입니다. 
  
다니엘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은 그 이름의 글자 뜻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부끄럽지 아니하게 살았습니다. 
  
주경 신학자 '베이컨'은 다니엘에 대해서 첫째 도덕적으로 모범적이고, 둘째 인격적으로 모범적이며, 셋째 신앙적으로 모범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신앙적으로 타협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의 어느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군대의 장성들과 술자리를 하였는데 박대통령이 친히 장군들에게 술을 한잔씩 돌렸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한 장군은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술을 먹지 않습니다.' 라며 대통령의 술잔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장군이 술을 거절하자 대통령은 그 술잔을 장군의 옷에 부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장성들이 그 장군을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 박대통령은 자기소신을 밝히고 맡은 일에 충성하는 그 장군을 1계급 특진시키고 더 좋은 보직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을 두려워하면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타협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 
  
잠29: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또한 잠14:2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오늘의 다니엘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암울하고 어두운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이 시대의 다니엘을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2008년도에 우리 모두가 다니엘이 됩시다! /할/ 

 
3. 다니엘의 해석은 무엇입니까? 

다니엘은 황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권세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는 '세어보았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여러 해 동안 그의 날을 세어보시다가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정지 신호를 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선언하시면 인생들은 하던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합니다. 벨사살 왕이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날을 끝나게 하셨습니다. 
  
▶'데겔'은 '무게를 달아보았다'는 뜻으로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들어 났다는 것입니다. 
  
▶'우바르신'은 무게를 잰 결과로 왕의 나라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과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끝난 것입니다. 
  
부르시면 가야 합니다. 실제로 그날이 벨사살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30절을 보면 "그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운명과 한 개인의 운명을 정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주권에 승복해야 합니다. 
 
①'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세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메네'라는 말은 '세다, 혹은 계수 되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메네 메네' 즉, 하나님은 '세고 또 세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눅12:7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하나라도 다 세고 계신다."고 말씀하셨고, 시56:8절에서는,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을 세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는 바벨론의 죄악상들을 세셨지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들을 세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9:3절에 다윗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고 했고, 욥14:16절에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시고 세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일일이 한 사람 한사람의 시간 사용을 계산하고 계십니다. /할/ '메네 메네' 세고 또 세시는 주님이십니다. 
  
⑵주님은 우리의 신앙의 인격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데겔'이라는 뜻은 '무게를 잰다, 저울에 단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달아보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미달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달아보는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벨사살 왕의 일생이 하나님의 저울 위에 놓여 져 있습니다. 그 결과 '함량미달'로 판결이 나왔습니다. 즉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량미달'이 아닌 '차고 넘치는' 믿음의 분량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믿/ 
  
⑶'우 바르신' 즉 '나누었다'라는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 바르신'이라는 말에서 '우'는 AND(그리고)의 뜻이고, '바르신'은 '베레스'라는 말의 복수형인데 '나누다, 가르다'라는 뜻입니다. 즉,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너의 일생을 세고 세어서 달아보니 기준에 미달이 되어 왕의 날수가 다하였고 나라도 빼앗겨 나눠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벨사살 왕의 죄악상을 낱낱이 세고 계셨습니다. 그 누구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가장 겸손해야 할 상황에서 그는 교만을 택했습니다. 
  
오히려 금, 은, 동, 목석으로 된 우상을 하나님으로 대치하면서 하나님을 능멸했습니다. 결국, 벨사살은 그날 밤에 목이 베어지고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는 나뉘어 져서  메데 파사 사람에게로 넘어가 찬란했던 바벨론은 그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벨사살 왕에게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 경고하신 말씀처럼, 성경은 지금도 오늘 우리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9:27절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계21:8절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뿐만 아니라, 벧후3:10절에 보면,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처럼 시대나 환경이나 민족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상대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기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개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이 저울을 가지고 우리의 영적 무게가 얼마나 나가는지 재어보십니다. 
  
사람들의 평가에서 A학점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평가가 F학점이 나오면 그 인생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의 저울에서는 무게가 나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저울에서 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②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이유를 22-2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죄입니다. 
  
그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하고 완악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미쳐서 들짐승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비와 이슬을 맞으며, 머리와 손톱, 발톱이 독수리같이 되었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벨사살이 그러한 부친의 지난날을 뻔히 알면서 다시 그 보다 더한 악을 저지르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⑵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23절에 '하늘의 주제'란 우주를 주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사람을 거역하고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믿/ 
  
⑶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찬양한 죄입니다.  
  2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금, 은 기명에다가 술을 퍼 마시면서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 했습니다. 
  
⑷교만의 죄 때문입니다. 
20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팍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며" 잠16: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교만을 조심해야 됩니다. 사람이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위기이며, 욕을 먹을 때보다 칭찬을 들을 때가 더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교만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⑸거룩하고 신성한 성물을 욕되게 사용한 죄 때문입니다.   
  벨사살은 하나님을 두려운 줄을 모르고 자기 부왕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거룩한 금, 은, 기명을 가져다가 술을 퍼 마시고서는, 은, 동, 철, 목, 석으로 만든 우상을 찬양하므로 2중, 3중으로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습니다. 성물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요, 바쳐진 거룩한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신성모독이요, 신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존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몸은 거룩한 성전(고전6:19)이라고 했는데, 그 몸을 음란하게 하거나, 술을 마셔서 술독을 만들거나, 담배를 피워 굴뚝을 만드는 것도 거룩함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면 심판과 징계를 받습니다.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구별해 바쳐야 복을 받습니다. 
  
내가 번 돈이라도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구별해 바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고통과 손해를 봅니다. 십일조는 여러분! 물질의 축복의 씨앗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게 기름 부은 종을 함부로 괴롭히면 거룩한 것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⑹쾌락을 즐기다가 망했습니다. 
  금식을 해도 시원치 않는데, 술 퍼마시며 부정한 쾌락을 즐겼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에 취하고, 음란에 취하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도를 벗어나 부정한 짓을 즐기는 쾌락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다니엘이 이 글씨를 읽고 해석하자 벨사살 왕은 약속대로 다니엘을 셋째로 높은 사람으로 삼고 그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본문 30절에 '그날 밤에 벨사살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의 벨사살 왕조가 술과 방탕으로 타락하고 있을 때 성 밖에는 이미 2년 전부터 메대와 파사의 연합군이 진을 치고 침공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은 채 벨사살은 날이면 날마다 주색과 향락에 빠져있었습니다. 메대와 파사 연합군은 바벨론 중심부에 흐르는 유브라데 강의 물줄기를 막아서 다른 곳으로 물이 흐르게 한 다음 그 강바닥을 육지로 삼고 쳐들어왔습니다. 
  
주지육림에 빠져있던 일천 명의 귀족들은 적이 쳐들어오자 저마다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에 바빴고, 그 누구도 왕을 지키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바로 그 방탕의 현장에서 벨사살은 침략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바벨론 왕조의 막이 내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 나라의 왕뿐이 아닙니다. 개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어보고, 세어보아도, 저울에 달아보고 달아보아도, 모자라고 또 모자란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오면 됩니다. 탕자가 돌아와서 용서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달아보십니다. 그 저울추에 합격해야 합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시면 과연 나의 무게는 얼마나 나갈 것인가?' 여러분, 지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저울에 올려서 달아보신다면 얼마나 나갈 것 같습니까? 또 만일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신다면 무엇을 달아보시겠습니까? 

 
4. 하나님은 지금도 인생들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① 인간의 죄악을 달아보십니다.   
죄악의 잔이 차고 넘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하나님의 불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그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의 기준도 인간의 '강포 함'입니다(창6:13). 

 ② 인간의 선행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달아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행실도 달아보아서 어느 분량이 차면 축복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죄 짓는다고 금방 심판이 내리지 않는 것처럼 선행도 금방 축복과 상급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원하시는 어느 분량이 차야 응답과 상급이 내립니다. 기도도 분량이 차야하고, 십일조나 헌금 생활도 정성의 분량이 차야 합니다. 
  
삼상2:3절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③인간의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에는 정성이 무겁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또 '천국 가는 길은 정성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양과 질을 달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달아보십니다. 과부가 엽전 두 냥 바친 것을 제일 많이 바쳤다고 칭찬하신 것은 그 여자의 정성이 제일 컸기 때문입니다. ▶정성은 어떻게 표현될까요? 
  
⑴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16:7절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식과 가식과 형식과 체면치레는 정성이 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죄 중에 하나가 외식과 위선입니다. 그래서 바리세안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⑵사랑으로 하면 정성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믿음이 있을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열매, 첫 것에 대하여 귀하게 보십니다. 왜? 첫 것은 정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⑶최선을 다할 때, 정성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찬송도, 기도도, 헌금도, 감사도 정성을 다하여 최선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보시는 줄 믿습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의 성실함도 달아보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책임 있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신의가 있어야 하고, 진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성실을 달아보십니다. 이 성실은 착한 양심에서 착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바르게, 진실하게, 착하게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변화됩니다. 
  
철학자 칸트의 아버지는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깊은 산길을 가다가 떼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더 숨긴 것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없다고 하고는 도망치다시피 나왔습니다. 
  
가다가 정신이 나서 보니까 몸 속에 깊이 감추어둔 금덩이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되돌아가서 떼강도들에게 '아까는 당신들이 너무도 무서워서 몸 속에 있는 금덩이를 생각 못했는데, 가다가 생각이 나서 이렇게 왔소! 미처 나도 모르고 한 짓이니 용서하고 이것을 받으시오!' 그러면서 금덩이를 내 놓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들이 한참을 쳐다보다가 아까 빼앗았던 것 모두 내어주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더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달라고 하더랍니다. /할/ 이 강도들이 볼 때 '이 사람은 신실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했고,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⑤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실 것입니다. 
  
⑴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3;16절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⑵우리가 교회에 등록하고 출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세우시고 머리가 되시는 교회의 지체로 살며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하나 되어 살기 위함입니다. 교회 공동체생활을 잘 해야 그것이 믿음입니다. 
  
⑶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마땅히 행할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까지도 걸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귀중히 여기고 예배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조만식(曺晩植) 선생(장로)은 3ㆍ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오산학교 교장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로 시무하기도 했습니다. 6ㆍ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이 산정현교회에서 신앙생활 했을 때 장로님의 제자였고, 등록금까지 내 준 학생이었던 주기철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 지 조만식장로님이 예배 시간에 늦어 주기철 목사님이 설교를 하기 바로 직전에 들어오셨답니다. 의자가 없던 때라 신을 손에 들고 신발장에 넣으려고 하는데 '장로님, 거기 신발 들고 서 있어요. 장로가 예배 시간에 늦었어요.' 얼마나 창피했겠습니까? 강대상에서 설교하는 목사님은 장로님의 제자였습니다. 등록금이 없어 등록금까지 내 줘 공부시킨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가 목사님이 되었다고 '거기 신발 들고 서 있어'라고 하는데 조만식장로님은 그 자리에 신발을 들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서 계셨다고 합니다. 설교 후에 주기철목사님이 '장로님, 앞에 나와 회개 기도하세요' 그러자 신발을 들고 서 있던 조 장로님이 앞으로 나와 기도하셨는데 그 기도내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주여! 장로가 주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회개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분위기를 파괴했습니다. 회개합니다. 말씀 전하는 목사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회개합니다.> 
  주기철 목사님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 참으로 훌륭한 장로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예배를 귀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당신의 제자가 강대상에서 '거기 신 들고 서 계시오'하는 그 말 한마디에 그 자리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보여 드리고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으며 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아멘!/ 
  
⑷그 다음 내가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며 신뢰하며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를 달아보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을 나의 생활의 우선순위 가운데서 몇 번째로 놓고 살고 있습니까? 성경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건설하는 것은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핵심은 전도에 마쳐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생명 운동, 복음 운동, 전도입니다. /믿/ 하나님은 이 일에 행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여 주셨습니까? 전도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전도하라고,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장을 주고 사업장을 주고 물질을 주고, 재능을 주셨습니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할/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깨달으면 오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눅17:17절을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시게 될 때 열 문둥이들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입은 열 문둥이 가운데 한 문둥이만이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엎드려 큰소리로 감사하며 사례했을 뿐 나머지 아홉은 주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제각기 자기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홉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그들을 찾아오라'는 묵시적인 말씀이요, 오기를 기다리시며 찾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아홉을 찾는 것이 전도입니다. 전도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내가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아홉을 찾는 일이 전도입니다. 
  
전도는 마귀와 싸우는 영적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아홉에 속한 자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고,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들과 접촉하여 그들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고 구원받도록 하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훈련을 잘 받은 군사만이 이길 수 있듯이 우리가 신앙의 강한 훈련을 받은 자만이 전도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전도입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1:12). 믿음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3:1-6절의 인간근본문제를 해결 받은 자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노예가 되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가 이 문제 때문입니다. 전쟁, 질병, 실패, 저주, 사망, 세상 모든 만 가지 문제가 바로 창3:1-6절의 근본문제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해결 자로 창3: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습니다. 사탄의 권세를 꺾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저주받은 인생이 아니라 창1:27-28절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된 인간이요,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리는 복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존재입니다. 믿음이란 이 사실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 자입니다. /아멘!/ 믿음 안에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먼저 믿음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전도에 힘을 쏟는 자입니다.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삼상2:3절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달아보다, 세어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니 함량미달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벨사살 왕이 이끄는 대 바벨론 제국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교만했으며,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우상에 빠졌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가 저주받고, 심판 받고,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행동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씀대로 행하고 살았습니까? 믿음을 달아보시고, 사랑, 열심, 봉사, 충성, 헌신도 달아보십니다. 인정받기만 하면 하나님은 채우시고 넘치게 하십니다. 여러분 2008년은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은 성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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