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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의 말씀 (벧전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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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말씀 (벧전 2:2) 
 
 
오늘은 공예배의 요소들 중에서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관련하여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는 모든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공식적인 방편으로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두셨습니다. 이것을 ‘은혜의 방편’(media gratiae)이라 합니다. 이 말은 성도의 영적 유익을 위해 사용하시는 일반적인 은혜의 수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감화를 통해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변화시키는 특별 은혜의 수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은혜의 방편들 중에서 ‘성례’와 ‘기도’는 독립적이지 않고 말씀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떠난 성례나 기도라면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지요. 그러므로 ‘말씀’은 가장 본질적이고 우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은혜의 방편에 대해 잘못 된 가르침들이 많았습니다.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에 최종 권위를 부여하는 자유주의자들은 은혜의 방편이 도덕적인 감화력만 가졌다고 가르쳤습니다. 은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했지요. 재세례파나 신비주의자들은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외적 방편들은 필요 없고 내적 조명(Inner Light)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성골과 성상도 은혜의 방편이라 가르쳤던 로마 가톨릭은 말씀보다 성례가 참된 은혜의 방편이며 성례보다는 교회가 더 근본적인 은혜의 방편이라 여겼습니다. 루터파는 말씀을 떠난 성례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잘 말하고선, 동시에 성례 자체에 은혜를 주는 힘이 내재해 있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은혜의 방편인 말씀은 일차적으로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뜻합니다. 은혜의 효력은 그 말씀이 선포되고 전파되어 질 때 나타나지요. 이것은 말씀 자체에 은혜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씀을 수단으로 삼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시며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만 활동할 수 있는 한계가 있진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죄인의 영혼에 직접 역사하실 수도 있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서의 하나님이신 그분은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per verbum) 그리고 ‘말씀과 함께’(cum verbum) 역사하시기로 스스로를 제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요 8:28). 성령께서도 자의로 말씀하시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도록 역사하십니다(요 14:26, 16:13-14). 

말씀은 공식적이고도 계속적인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에, 교회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야 합니다. 은혜의 방편인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거나 얕고 빈약하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바르게 자라갈 수 없겠지요.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찬 제단을 치우고 강대상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설교자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그리고 선포되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도록,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을 얻고, 생명을 얻은 자는 더욱 풍성하게 얻을 수 있게끔 말씀의 꼴을 부지런히 선포했지요. 말씀이 은혜의 방편으로 작용하면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점점 바르게 알게 되고,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함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에 따라 살고자 하지요.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바르게 세워지고 부흥했던 때에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에 대한 관심이 유달리 높게 나타났었습니다. 

은혜의 방편인 성경말씀을 듣는 것은 공예배의 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예배에서 ‘말씀 듣기’는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는 자인 동시에 그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시간은 주의 몸 된 교회가 동일한 말씀에 함께 참여하는 시간입니다. 몸의 지체들이 많지만 머리의 지도를 받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중심으로 연합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되지요. 선포된 말씀의 지도에 따라 일상의 생활을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나가게 됩니다. 주중의 성경 공부나 개인 QT는 공예배에서 예배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깨닫도록 돕는 역할을 하지요. 언제나 예배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관련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자세 중 세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말씀을 들을 때에 인간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세입니다. 매주 예배에서 말씀을 듣다보면 습관적으로 듣거나 별 관심 없이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성전을 지어서 드리는 것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를 권고하겠다고 하셨습니다(사 66:1-2). 말씀을 인하여 떠는 이유는 그 말씀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기 때문이겠지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 그들 가운데 그 말씀이 역사했습니다(살전 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데(히 4:12), 그러한 역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능력 있게 역사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사가 풍성할 수 없지요. 이 때문에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떨며 듣는 일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둘째로, 말씀을 마음에 담아 두는 자세입니다(신 32:46, 잠 2:1-2). 지극히 공경하는 존재라면 그분의 말씀 또한 새겨서 들을 것입니다. 또 말씀이 은혜의 방편임을 참으로 믿는다면 값비싼 보물을 간직하듯이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겠지요. 하지만 말씀이 풍성한 곳에서는 오히려 말씀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경향이 생길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고백했습니다. 마음에 둔 주의 말씀은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고 했는데(요일 2:14), 이는 마음에 간직한 말씀이 하나님의 백성이 강하게 되고 유혹과 핍박에서 승리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말씀이 마음에 없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을 때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삶을 살게 되지요. 여호와께서는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하셨습니다(말 2:2).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되지만,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은 복을 저주로 바꾸는 일이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일이 됩니다. 

셋째로, 들은 말씀이 일상의 삶에서 순종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자세입니다. 야고보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약 1:22). 좋은 말씀을 들으면 자기의 성품도 향상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킵니다. 듣기만 했다면 사실상 변한 것이 없는데도 스스로 속는 것이지요. 부모의 말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녀를 보고 말 잘 듣는 아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자녀이며 하나님을 참으로 왕으로 여기는 백성입니다.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이 말씀하신 이를 존중하는 사람이요, 하나님께 존중받는 사람이 됩니다(삼상 2:30). 

하루는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여인이 예수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너무 너무 은혜로운 말씀을 하시니까 감동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1:27-28).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도 복이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도 복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복 있는 자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입니다. 

성경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눅 16:31). 선포되는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는 사람, 그 말씀을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 할 줄 모르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떤 기적으로도 변화될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자세의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소속의 문제입니다. 성경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유기된 사람이라는 증거인 셈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하셨습니다(눅 10:16).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말씀은 오늘날 기록된 성경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는 다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며 결국 그에게 돌아갈 것은 영원한 멸망뿐입니다. 은혜의 방편을 거절한 자에게 남는 것은 저주뿐이지요. 

예배 때의 말씀 선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공적인 은혜의 방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사모하고, 귀한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하며, 순종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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