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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고전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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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고전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7). 

이어서 사도는 우리에게 사랑의 열세 번째의 속성,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Ⅰ. 본문 해설 

이것은 바로 앞에 나온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곧 덮어 주는 특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와 많은 허물을 덮어주는 힘인데 이것이 소극적인 측면이라면, 믿어주는 것은 좀 더 적극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Ⅱ. 이 구절의 의미 

A. 믿으며 

우리말 성경에 “믿으며”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 “피스튜에이”입니다. 이 단어는 기독교 신앙의 한 축을 이루는 믿음에도 사용되고, 일반적으로 사람을 믿는다고 할 때도 사용됩니다. 심지어 믿음의 대상이 사실이나 사물일 때도 그렇습니다. 

B. 모든 것 

여기서 “모든 것”은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믿음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범위 안에서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믿어주려고 하는 속성을 사랑이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Ⅲ. 모든 것을 믿는 사랑 

그러면 모든 것을 믿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두 지평 속에서 다루었던 사도의 논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신자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믿음이 사랑과 어떻게 연관되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원리들, 곧 신자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믿게 되는 속성이 확장되어 사람들 사이에 나타날 때, 어떻게 믿음이 사랑의 속성으로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 믿음과 사랑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지평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하나님도 믿지 않았고, 그분이 행하신 일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최초의 믿음은 중생한 영혼의 최초의 작용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행위는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참된 변화에서 오는 움직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혼이 움직이도록 살리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는 다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확률에 대한 믿음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치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종류의 믿음은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영혼의 참된 변화 없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 없이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혼이 있고 난 뒤, 그 영혼이 믿기도 하고, 순종하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영혼이 인식하고, 의지하고 느끼는 능력을 사용하는 최초의 움직임이 바로 회심입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 뉘우치고, 구원자가 예수뿐임을 알아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회심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생은 믿고, 사랑하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을 창조하신 것이고, 실제 회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회심하는 것을 보십시오. 아이들에게는 아직 자기 죄를 깊이 인식할 능력이나 예수님만을 의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한 아이가 커갈수록 그들의 능력은 발현되기 시작합니다. 마치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걷지 못하고,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였더라도 점점 자라가면서 그들 안에 있는 능력, 곧 걷고, 뛰고, 부모를 알아보고 사랑하는 능력이 겉으로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위대한 사랑의 장을 읽으면서 세속적인 사랑에 대입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물론 비슷한 것은 있습니다. 모든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중생을 통해 심겨진 새 생명의 원리는 회심과 함께 사랑으로 역사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의식 속에서 풍부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믿음에서 사랑이 나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강조하면서 말하기를 “믿음은 사랑을 창조하나 사랑은 믿음을 창조하지 않는다.”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초의 회심에 대해서만 사실입니다. 일단 예수를 믿고 회심해서 주님을 깊이 믿게 되면 다음에는 오히려 반대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B. 사랑의 속성으로서의 믿음 

중생은 많이 중생하고 덜 중생하는 것이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중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 것은 산 것이고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다릅니다. 튼튼하고 강하고 뜨거운 믿음부터 시작해서 허약하고 미지근한 믿음까지 차이가 큽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꿀 송이와 같이 달고, 믿음이 식으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믿어지는데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그런 믿음의 회복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은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주문처럼 “믿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 믿어지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믿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감각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보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눈의 감각으로 보든지 믿음으로 보든지 간에 보는 것인데 정말 믿어지면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믿습니다.”라고 연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를 통해 믿음과 사랑의 관계가 파악되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드릴 때, 기도를 할 때, 성경을 읽을 때, 사랑하는 지체들과 교제를 나눌 때 어느 한 순간에 근원이 알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는 것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바로 우리에게 믿음이 솟아납니다. 사실 믿으려고 예배당에 나오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니까 주님이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깊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는 것을 우리들이 늘 쓰는 쉬운 말로 은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결과가 바로 하나님 사랑의 감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 믿어지면 차라리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하며 기도하십시오. “내 힘으로 믿을 수 없으니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을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그것이 낫습니다. 결론적으로 최초의 사랑은 믿음에서 나오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는 놀랍게도 사랑에서 믿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극단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임하면 저절로 믿어지는 구나!” 

성경은 오히려 여러 곳에서 “주 예수를 믿으라.”하고 명령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은혜가 믿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또 한편으로 은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니, 믿음이든지 회개하든지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인간의 의지를 사용하여서 믿게도 하시고 회개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정의하고 나면 이런 질문이 생겨나게 됩니다. 최초의 회심에서는 우리가 중생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토대로 믿을 수 있었고, 믿으니까 샘이 터지듯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샘솟아 다시 믿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곧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변함없이 믿으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이 믿음을 방해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 삶 가운데 믿음과 반대되는 메시지들이 얼마나 자주 우리를 스쳐가고 머물기를 반복합니까?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은 충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정에 불행한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일로 욥의 아내는 욥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섭섭한 감정, 여호와는 네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증거들이 고개를 들 때 어떻게 하십니까? 


Ⅳ. 사랑: 믿음으로 가는 길 

그때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성도들 안에 충만히 있으면 그것들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습니다. 욥의 반응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욥은 자신의 믿음의 순전함을 지킨 것입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설득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어도 그것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분이라는 수 없는 증거들을 접할 때, 사랑은 그 증거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열세 번째 특성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으며 오직 주님과 사랑하는 양떼들만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매일매일 주님은 선하시고 날마다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증거만 보고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 4:13)라고 고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주님을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런 증거들에 의해 설득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현재, 미래, 과거 모두가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는 지워버리고 싶고,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도 단지 우연일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감사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스스로에게 명령할 수 없는 일 중의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면 과거를 돌아보면 내가 가장 불행하고 아팠던 사건 하나하나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사건들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방황하던 일들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분이 아니라는 증거들은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나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은 이치를 사도가 공동체에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불길하고 추한 소문들을 더 잘 믿고 부정적인 정보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할 때는 긍정적인 정보에 의해서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누군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험담을 늘어놓으려고 할 때 듣기 싫어하지 않습니까? 왜 입니까? 그 사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많이 사랑했습니다. 특히 고린도에 복음을 전할 때 사도는 가난한 심령과 선명한 복음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부흥이 일어났고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지체들도 사도 바울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잠시 다른 선교지로 옮겨간 후에 고린도 교회에 은혜가 식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세상과 평화를 누리면서도 주님을 믿을 수 없는 제3의 길은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파당을 나누고 다투고 정욕적인 고린도 시의 정신의 교회 안으로 물밀듯이 들어온 것입니다. 급기야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신앙을 폄하하는 내용들이 고개를 들고, 교인들 가운데 사도의 자격까지도 의심하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사도라는데 증인이 있어? 예수를 만난 건 사실이야?, 많은 역사를 일으킨다고 하는데 자기는 왜 그래?” 이런 의심들은 사도 바울에 태한 태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로 나타났습니다.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싸움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에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을 때는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그들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이야.”라는 수많은 말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자 함께 섬기면서 살아가야 할 은사를 가진 사람이 은사가 다르다는 이유로 다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할 때 믿어주고, 덮어주었던 교회의 아름다운 정신이 붕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사도를 불신하고 믿지 못했지만, 사도는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으로 권고하고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해석했습니다. 미움은 모든 관계를 끊고 싶은 것이고, 사랑은 모든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욕구이기 때문에 미움은 모든 해석을 악으로 이끌고, 사랑은 선의로 이끌어 갑니다. 결국 사랑은 사랑해야할 사람이 그릇 행하거나 나쁜 소식이 있어도 그것에 의해 쉽게 설득당하고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라고 주님께 항상 선하고 올바르게 살았을까요? 혈기도 부리고, 욕심도 내고, 잘못도 했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증거가 되어 우리 주님께 호소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을 선택한 것은 당신의 큰 실수였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모든 증거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고 심지어 불순종하고 죄를 지어도 그것을 모두 재료로 삼아서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과의 보다 풍부한 사랑의 관계로 데려가려고 하시지, 그것들을 빌미로 여러분을 당신께서 끊어내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무한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너를 포기하셨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께 버림받았다.”고 들려오는 수많은 속삭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러실 수 없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지체로부터 들은 부정적인 이야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끊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경계심으로 가지고 나쁜 사람으로 마음에 새기거나, 반감과 미움을 가지고 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은 성령의 음성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식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원수도 용서했는데, 설령 허물이 있다고 칩시다. 그 지체나 일꾼이 원수입니까? 원수라면 더더욱 사랑해야 하는데요. 여러분의 그런 마음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까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을 야단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을 염려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형제의 허물을 이유로 여러분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공동체의 지체들을 향한 미움, 편견, 질투를 마음에 적어놓는 일입니다. 

왜 한번 맺고는 풀지 않습니까?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이리저리 악한 결론이 나도록 짜 맞춘 사실 자체가 예수의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합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지체들에게 속을지라도 관계가 끊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가 잘되십니까? 주님의 은혜가 밀려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보다 달 수 있을까요?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성실함을 경험할 수도 없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는 것은 시낭송이 아닙니다. 피가 흐르는 복음의 현장에서 마귀와의 싸움이 끊임없는 교회의 현장에서 온 몸으로 사도가 깨달은 진리입니다. 왜 용서하지 않고 집요하게 미워합니까? 죄에 대해 마귀에 대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칼날을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품는 것입니까? 그래서 결국 시들어가는 영혼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원수들에게 끊임없이 에워싸였지만 한 번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할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 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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