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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다 (행 7: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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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다 (행 7:1~60)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2007년 7월 25일 탈레반에 납치되었던 아프카니스탄 단기 선교팀의 배형규 목사의 순교가 선명하게 기억되었습니다. 당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충격받을 일도 아닌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셨고, 저의 할아버지도 그렇고 기독교 역사에 수없는 순교자가 나왔음에도 왜 그렇게 충격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사건 전에 아내가 제가 납치되는 꿈을 꾸었던 것 때문인지 배형규 목사의 순교가 꼭 나의 일 같이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가야할 길이구나!” 심성민 형제도 순교했지만 다른 팀원이 순교했는데 목사가 살아왔다면 그 또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누구에게나 충격을 줍니다. “복음 때문에 죽을 수도 있구나!” 그렇습니다. 이 점은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한에는 스데반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하거나 죽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오늘 그 점에 대해서 내가 붙잡은 복음에 대해서 분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스데반의 사건 속에 담겨있는 교훈은 순교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을 줍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원리입니다.  

스데반은 순교하기 전에 아주 긴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 전체가 스데반의 설교인데, 스데반의 설교는 당시 기독교 복음에 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난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11-14절을 보면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고 또한 성전(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했다고 고발 당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스데반은 “누가 율법을 어겼다는 말이냐?”고 되묻습니다. 복음을 변증하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구약을 보면 유대인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구원자라고 믿는 모세도 처음에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언제나 율법을 거스린 사람은 유대인들이었고 스데반 자신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세가 예언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에 대하여도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성전을 모독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아주 큰 범죄로 여겼는데, 스데반은 이에 대하여 광야에서 성전 역할을 하였던 장막은 이동하는 것이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성전 건물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곳에 계시지 않으신다고 하신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건물 속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였습니다. 성전 건물을 우상시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면으로 반박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모세가 예언했던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내가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가 아니겠느냐. 성전 건물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성전을 대신함으로써 예수님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아예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십자가 복음으로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 때문에 결국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왜 스데반을 보호하고 지켜주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두셨는가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설교를 잘 했습니다. 꼭 해야 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스데반을 지켜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당시 스데반의 가족이나 교우들은 얼마나 비통했겠습니까? 배형규 목사님의 순교 소식을 들을 때도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른 것이 ‘꼭 이래야만 하는 것입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한 후 3,000명 5,000명씩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에 비하면 스데반은 설교하고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데반에게만 그리 하신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그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셨다고 했습니다.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어두운 밤에 산 언덕에서 엎드려 목을 놓아 엉엉하고 우시던 주님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가복음 14장 36절에 보면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라고 믿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인류에게 살 길이 열린 것 아닙니까? 

스데반의 순교를 보면, 스데반은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죽는 모습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죽음을 연상시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고 자기 영혼을 예수님께 맡기고 또한 자기를 죽이는 자들이 용서받기를 빌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스데반을 죽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죽는 영광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이 마지막 돌에 맞아 죽을 때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해 주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스데반을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에게 하늘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보고 그 영광을 보게 하시고 내려다 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하셨습니다. 

55-56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하나님은 스데반을 위하여 완벽하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셨습니다. 단 하나 스데반에게는 순교의 사명을 주신 것 뿐입니다. 순교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흔히 무병 장수하다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편안하게 죽는 것이 복이라 하지만, 우리 중 누구든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면 편안하게 죽는 것 보다 순교의 자리에서 죽기를 원할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을 다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스데반을 만났을 때 불쌍하게 여기며 어깨에 손을 얹고 “얼마나 힘드셨어요. 글쎄,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스데반에게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만큼 그는 그렇게 우리에게 존경의 대상이고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하고 존경을 표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당당하게 순교할 수 있는 힘을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스데반에게 순교는 분명히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통과하고 나 죽고 예수로 사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언제나 최선이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언제나 최선이야.’ 이 믿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고 나면 우리는 세상을 얼마나 강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비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이 하실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정확한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심이 최선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실 때,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는 칼을 휘둘러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무기력하게 붙잡혀가는 예수님이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베드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르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6:52-53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나님이 하실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그냥 허락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십자가의 죽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이것을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했지 부활에 대한 약속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허락하심, 십자가의 사건이 최선이라고 믿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십자가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이 비밀을 정확히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죽고”가 핵심이 아니라 “예수로 살고”가 초점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예수로 사는 성도들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내 옛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 사람을 통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나면 비록 내게 십자가가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최선인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해지기 원하시지만,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칼과 총을 들고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인다!” 이렇게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겸손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세우셔서 어느 민족 어느 족속에게나 들여보내십니다. 만약에 그 복음을 거부하면 기다리십니다. 전도자를 핍박하면 순교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순교를 당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할 때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렸다고 했습니다. 

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스데반의 지적이 옳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찔려도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립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다가 베드로의 권고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마음에 찔렸다는 말은 스데반이 옳은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찔리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인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순교하도록 그냥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57-58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여러분,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할 메시지를 주셨을 때 귀를 막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어떻게 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최악인 경우는 회개할 메시지를 주실 때 오히려 반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백전백승하는 싸움의 기술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논쟁할 때 항상 이기는 법. 상대방의 약점 하나를 잡고 상대방의 말을 절대로 듣지 말고, 그 하나의 약점을 계속 반복해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났을 때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왜 나한테 소리 지르는데? 왜 나한테 소리 지르는데? 왜 나한테 소리 질러!” 상대방의 말은 듣지 않고 그 말만 반복합니다. 그러면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악하게 반응할 때,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이 순교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순교하게 두실지라도 복음 전파를 포기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 하나님은 또 한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사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많은 사람이 나오지만 이름이 밝혀진 사람은 사울 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장면에서 바울(사울)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스데반 순교의 배후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회심시켜 스데반의 사역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기가 막힌 섭리입니다. 그리고 이 사울이 사도 바울이 되어서 전 세계 이방인으로 큰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정확하게 알고 나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임을 알게 됩니다. 

누가 스데반의 설교가 실패했다고 할 것입니까? 스데반이 사명은 여기까지 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참된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다가 일찍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바울을 통해 더욱 발전하고 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정확히 알고 나면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최선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기만 하면 패배한 것 같은데 다 꺾어진 것 같은데 그로 인하여 엄청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언제나 최선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라면 차라리 실패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시험을 당했습니다. 왜 이런 시험이 오는지 욥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은 마귀의 시험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라는 이 믿음 하나 분명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엇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 짓기를 그렇게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예” 하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이 최선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모든 건축할 준비는 갖추어 놓았어도 자신은 성전을 짓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짓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실 때 어려운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할 때 순종하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다윗은 그랬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도 금식하며 주위에서 걱정할 정도로 죽기 살기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 입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아들 압살롬에서 반역을 당하여 도망갈 때, 시므이가 쫓아오며 욕하였습니다. 부하들이 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므이를 통해서 하신 일이라면 “욕을 먹으라!” 하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요셉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형을 용서하고 말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비젼이 있고 헌신이 있어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최선이라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후배 목사님이 시골 미자립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도시 교회에서 부름이 있었습니다. 
그곳 역시 어려운 곳이지만 선교의 비젼이 있어 기도 중에 하나님의 부름이 있다고 깨닫고 결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이 지나고, 갑작스레 미국에서 부름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값, 집, 충분한 사례, 영주권 다 해결되는 조건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미국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이전 임지에 대한 문제는 사라지고 이젠 하나님이 미국으로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 설교가 종말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저녁 예배 설교는 “다가오는 주님의 나라”였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사명자로서의 태도에 대한 주님의 책망을 느꼈습니다. 마음 속 깊이 성령님이 슬퍼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환경과 여건이 좋은 곳으로 가려는 속 마음이 다 드러났습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가 할 것은 순종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택에 내려갔습니다. 아내는 미국에 들어갈 생각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지만 조용히 함께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했습니다. 아내는 많이 불안해했습니다. 그대로 말했습니다. “처음 주신 임지로 가자.”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울면서 말했습니다. 한 손에 금을 쥐고 있고. 한 손에 돌을 쥐고 있는데. 금은 버리고 돌을 쥐는 느낌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내도 마음을 정리하고 그렇게 하자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저녁에 찬양을 했습니다. 첫 임지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을 최선으로 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그 당시 사람의 눈에 보면 꼭 최선인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포기해야 했고, 소원과 계획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나니 항상 최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언제나 최선입니다.”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오직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언제나 최선이라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을 향한 계획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의 길을 바로 붙잡아 주시려 하십니다.
앞이 캄캄해 하는 사람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려 하십니다.
낙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의 무릎을 굳게 펴 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언제나 최선입니다.” 고백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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