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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마운 사람 에바브로디도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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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사람 에바브로디도 (빌 2:25~30)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를 위한 변명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의 선교를 통하여 당시 로마 세계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선교과정에서 빚어진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가장 분명하게 정리한 사람 또한 바울이었습니다. 율법의 길을 버리고 단호히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복음의 길이 정리됨으로써 이방 선교의 길이 열렸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할례를 받는 거야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 문제를 비롯해서 기독교가 유대인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적 종교가 되도록 만든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기독교를 바울의 기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많은 핍박을 받았는데 그 대부분은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핍박이었습니다. 또 이방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문화와는 다른 종교와 풍습을 전한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제일 선두에서 개척하고 싸우고 교회라는 조직을 세우는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이 냉정하고 독해지기 쉽습니다. 사람을 보기보다는 모든 것을 일 중심으로 처리하기 쉽습니다.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가치나 그가 가지고 있는 문제나 관심들을 보기보다는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숫자로 취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에바브라디도 한 사람을 향해서 쏟아놓고 있는 바울의 사랑과 그를 위한 변명은 바울이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닌 사랑의 사도임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제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읽으면서 감동받았던 것은 율법과 복음 날카롭게 가르는 그의 논리가 아니라 로마서 제일 마지막 장인 16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들이었습니다. 모두 35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냥 대표자 몇 명만 언급할 수 있지만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을 보면서 바울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도 그러합니다. 바울은 여러 구절에 걸쳐서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지극 정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에서 파송했던 사람이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빌립보 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장황한 변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바울이 변명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 이름으로 보건데 이방인으로 있다가 개종한 자인 듯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이 아프로디테라는 미의 여신의 이름에서 기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가 파송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바울에게 필요한 물질을 가서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에 머물면서 바울을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물질은 잘 전달해주었으나 그만 그곳에서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병은 매우 심한 병이었던 듯합니다. 

27절에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도우려왔던 사람이 오히려 바울의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에바브로디도를 살려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났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알려졌고, 이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근심이 되었습니다. 또 에바브로디도는 살아났지만 그가 아마 약해진 육신으로 인하여 향수병에 걸렸던 듯합니다. 26절에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는 단순히 보고 싶다는 차원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디모데와 함께 보내도 될 터인데 먼저 보내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합니다. 아마 빌립보서를 가지고 갔던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은 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돌보아야 하는 그의 임무를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힘들어하는 바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근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바울이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도우려고 그랬는데 오히려 그것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일이란 것이 우리 뜻대로 안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제 친한 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그 집에 3일 내내 머물면서 장례를 도와주러 시골에 내려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음식을 먹다 탈이 나서 제가 그 집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시골이고 아직 옛 풍습이 남아있어 제가 함께 상여를 들고 나가야 하는데 손님 방에 끙끙대며 누워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때 느꼈던 고역이란? 저도 미안하고 친구와 그 식구들도 미안해했습니다. 짐을 덜어주려 갔다가 짐을 더 얹어준 꼴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와 같은 곤란함이 바울과 에바브로디도가 느끼는 근심의 정체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 인간사에 비일비재합니다. 도우려는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될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전지 하거나 전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은 결코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이런 실수가 잦아서는 안 되겠지만 좋은 의도로 한 일이 더 어렵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또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사랑을 행하는 것에서 좌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이 때문에 피해를 당한 사람도 그 행위를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외모가 아니라 우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삼상16:7)이 참 좋습니다. 이는 가혹한 심판의 말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실수한 경우에는 그 드러난 허물보다는 그 의도를 보시겠다는 뜻이기에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있는 악함을 보시며, 비록 어리석고 실수도 많이 하지만 그 선한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위해서 빌립보 교회에 변명을 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그는 나의 형제다, 함께 수고한 자요, 함께 군사된 자다,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였다, 저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나를 섬겼다. 그러니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부탁합니다. 아주 화끈하게 지지해줍니다.

바울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빌레몬서에서는 도망 노예인 오네시모를 위해서 편지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서 뛰쳐나온 도망노예였습니다. 당시는 노예제 사회로 이런 도망행위는 사회 근간을 흔들기 때문에 심한 경우 사형도 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나올 때 재산상의 손해도 입혔던 듯합니다. 이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게 되고 그가 복음을 영접하게 되고 바울의 일을 돕는 동역자까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주인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변명하기 위해서 쓴 서신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그 글에서도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해서 그는 내가 옥중에서 낳은 아들이다, 내게 유익한 자다. 내 심복이다,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다, 나를 영접하듯 저를 영접하라, 혹시 오네시모가 빚진 것이 있으면 내가 갚겠다고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이처럼 허물을 덮고 그 약점과 선한 의도를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성령님을 우리는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는 후원자, 변호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단이나 죄나 세상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를 대신해서 변호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요, 성령님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했을 때 누가 옆에서 여러분을 변호해주면 얼마가 고맙고 든든합니까? 우리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화끈하게 우리를 지지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좋은 것이지요. 인간은 아무리 실수하고 잘못했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자기변명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정말 고마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 사람은 마음을 열게 되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한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이나 말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가 좀 따뜻한 글쓰기와 말하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상대방의 조그마한 잘못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나 원래 의도를 이해해 주면서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따뜻한 글쓰기요 말하기입니다. 우리 사회가 날로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 지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 실수에 대해서 따지기 전에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해주는 마음입니다. 그릇을 깬 아이를 보며 “아이고 속 터져. 이 애물 단지야!” 하기 전에 “응 엄마를 도우려다 그렇게 되었구나.”하고 공감할 때 아이는 자기 잘못도 인정하고 감정도 상하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픔을 공감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먼저 이 사랑을 받아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핍박자요, 냉혈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예수님의 이 사랑을 받고 변화되었고, 이제는 에바브로디도와 오네시모에게 그런 사랑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 동역자 에바브로디도

그러나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변명은 단순히 입에 발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 생업도 있고, 또 옛날에는 먼 거리를 여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감옥에 있는 죄수를 돕는 것은 자신도 위험해 질 수도 있는데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기 위해 이렇게 불원천리 달려왔습니다. 비록 병에 걸려 그 일이 예상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 선한 마음을 생각하면 백 번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향해서 그는 나의 형제라고 합니다. 그렇죠. 아무리 피를 나누었더라도 어렵거나 힘들 때 전혀 그 아픔을 나누거나 돕지 않는다면 형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서로 도울 때 우리는 형제가 됩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그처럼 소중한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또한 바울의 수고를 함께 나눈 동역자입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은 가까이 했던 사람들도 떠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는 멀리서 찾아와서 그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지금 제 편에서 볼 때는 여러분이 형제요 동역자들입니다. 함께 작은 교회의 어려움을 나누고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저에게는 큰 위로요 힘입니다. 

그는 또한 함께 군사된 자입니다. 바울을 지지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지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 법정에서 로마와 세상에 대하여 싸우고 있습니다. 이때 바울을 지지하고 바울의 편이 되어준 것, 이것은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싸운 것과 같다고 바울은 인정합니다. 직접 싸우는 것만 싸우는 것이 아니고 지지하고 격려하고 같은 편임을 보여주는 것은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의 쓸 것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가지고 온 빌립보 교회의 헌금이 바로 그렇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는 이 물질이 매우 유용했을 것입니다. 4장 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어렵고 힘들 때 물질로 도와주면 얼마나 힘이 됩니까? 제가 작은 교회를 하면서 이런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물질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우리 수준으로서는 우리 교회의 재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묵묵히 지원해 주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 교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주님이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도 빨리 자립해서 우리가 에바브로디도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도왔으면 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목숨을 던져 자신을 도왔던 사람이라고 바울은 그 고마움을 또한 표합니다. 30절입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도우려다 죽을 병에 걸렸던 사람이고,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에게 근심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나 고마운 사람입니까? 요즘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모두 자기 잇속 차리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의리나 충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요즘은 조금만 수가 틀리면 떠나버리고 맙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기뻐하는 이유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런 점에서 행복했던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이렇게 목숨을 건 동역자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소개하며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롬16:4)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보다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는 아무도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달아나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어떤 제자는 달아나다 잡히자 옷을 벗고 도망한 제자도 있었습니다(막14:51-52).

우리에게도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도와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천국에 대한 강력한 확신 가운데 살았기에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파라볼류오’인데 이 뜻은 ‘위험을 무릅쓰다’는 의미입니다. 초대교회사를 보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을 ‘파라볼라이’라고 불렀습니다. 고대사회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았고 전염병이 돌면 가족이라도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신앙인 중에 파라볼라이라 불리는 이런 사람들은 그 전염병 지역에 찾아들어가서 환자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죽기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5세기 무렵 알렉산드리아라는 한 도시에만도 이런 파라볼라이가 5백에서 6백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과거 신앙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도 많고 요구도 많은 시대가 오늘날인 것 같습니다.  

모든 일은 이런 목숨을 건 동역자들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 공동체가 자기 살 궁리만 하고 엉거주춤, 여차하면 달아날 자세만 취하고 있으면 새 역사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이라는 큰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목숨을 건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23장에 보면 재미있는 기사가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울 때였습니다. 블레셋 진영 쪽에 있던 베들레헴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이 물을 몹씨 마시고 싶었습니다. 아마 어렸을 때나 옛 추억이 있었던 우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삼하23:15)하고 탄식하자 다윗 곁에 있던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에 뛰어 들어가 싸움을 벌이며 그 물을 떠옵니다. 이 물을 받고 다윗이 기뻐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바치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삼하23:17) 하나의 에피소드이지만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의 충성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다윗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윗은 대업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조직이나 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위기를 이기고 성공하는 공동체는 이처럼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입니다. 또 이처럼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라도 일하고 싶은 공동체나 나라를 만드는 것이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하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국사회가 경제위기나 정치위기를 맞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위기 앞에 누구 하나 자기를 희생하려는 노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부한 자들은 자기 것 지키려고 안달이고, 가난한 자들은 이런 부자들을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모두가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장밀 사랑하는 조국이 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존귀한 사람 에바브로디도

바울은 이처럼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고마움을 표하며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냥 기쁨이 아니라 모든 기쁨입니다. 돌아오고 있는 에바브로디도의 마음이 사실 편치 않습니다. 교회가 맡긴 일을 잘 끝내고 개선장군처럼 돌아와야 할 텐데 병들어 자기 일을 못 마치고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에바브로디도를 향하여 빌립보 교회가 온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반기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고,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존귀히 여길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성공을 했든 성공하지 않았든 자기를 희생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존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먼 곳에 선교를 하러 갔지만 효과적인 선교를 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 오지에 갔던가, 또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가를 생각하며 존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성공한 사람만 환영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이처럼 그 결과야 어찌하든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희생의 길을 갔던 사람들을 위한 성대한 잔치가 일어날 것입니다. 

2장에 등장했던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중에는 바울과 같이 성공하여 큰 이름을 남긴 자도 있지만 에바브로디도처럼 교회사에서 미미한 빛을 비추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눈에 다 존귀한 자들이고, 이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교회의 부흥이 있었고, 하나님나라는 끊임없이 전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에바브로디도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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