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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함받지 못하는 죄 (막 3: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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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함받지 못하는 죄 (막 3:20~30)


같은 것을 보면서도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들 좋다고 하는데도 유독 혼자서 안 좋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성격에 따라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느냐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아준다면 살아가는 것이 보다 즐거울 수 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나는 잘 했다고 하는데 남들이 그게 뭐 잘 한 것이냐고 한다면 그거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남들은 다 잘했다고 하는데도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건 그만큼 그 사람의 기대 수준이 높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만족도가 높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이요 남들을 평가할 때도 보다 긍정적으로 상대방을 보아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싶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고 해도 역시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딴에는 잘 하려고 한 것이 잘못될 수도 또한 있습니다. 
특히나 잘 해 보려고 하다가 더 실수할 때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반대로 항상 실수만 저지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는 실수 하나 없이 완벽하게 일을 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마음이 내가 비교적 좋아하는 사람일 경우는 다소 실수를 해도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래 하다가도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일 경우는 다 잘하다가도 한 가지만 실수를 해도 내 그럴 줄 알았어 한단 말입니다. 이 평가라고 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할 때 상대방은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게 됩니다. 문제는 그런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서 상대방을 평가하다 보면 그것이 공정한 평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그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를 미쳤다고 붙들러 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실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적들을 행하시니 이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 투성이요 원치 않는 질병과 사고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들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호기심에 예수님이 또 어떤 병자를 고치실지 또 어떤 말씀으로 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보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두루 통지하여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왔다고 기록합니다. 
그만큼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도 됩니다. 문제는 그 병이 죽음에 이르는 병도 있는 반면 그래도 참고 견딜만한 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견뎌가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아주 깊은 절망에 빠져서 헤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몸이 아프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럽기에 사람들은 그 병에서 놓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갑니다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완벽하게 고치기 힘든 병도 있기에 그만큼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병은 치료하는데 많은 시간과 돈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더 절망할 수밖에 없겠죠.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런데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그들이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심지어 죽은 자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죠. 

그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모두를 일일이 고쳐주다 보니 예수님은 한가하게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다른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는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의 친척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예수가 미쳤다고 하며 붙들러 왔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는 것이 왜 미친 것입니까? 예수님의 친척이라면 이미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일을 직접 본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들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미쳤다고 해서 붙들러 올 정도라면 그저 그렇고 그런 친척이 아닐 것입니다. 상당히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이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미쳤다니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마도 그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대립이 되는 것은 곧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하는 일이 그것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정신 나간 짓으로 판단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용히 찾아와서 자초지정을 다 들어보고 알아보고 그리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이 미쳤다고 해서 붙들러 올 정도로 가까운 친척들이라면 더욱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미쳤으니 붙들러가자 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아마도 그로 인해서 자기들까지 어려움을 당하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그 하는 일을 직접 지켜보면서 판단했어야 마땅한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걱정은 잘못된 걱정일 뿐입니다. 그건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도 너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자기들의 친척 가운데 한 사람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나의 이해득실만 따져서 예수를 믿고자 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예수를 안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세상의 이해득실만을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복만 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가장 귀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요 그에 따라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모든 필요한 것을 넉넉하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덧입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예수가 바알세불이 지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바알세불이라는 말은 사단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늘의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의 왕인 사단이 들려서 졸개인 다른 귀신들을 몰아내서 귀신들려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까지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귀신이 나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귀신도 벌벌 떠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귀신이 귀신의 왕 때문에 나갔다니 어떻게 사람들이 말을 해도 이렇게 심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누구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고 하는 데는 정말 기가 막힙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라면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입니다. 성경박사라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귀신의 왕이 다른 귀신들을 쫓아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들이 이렇듯 악랄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 예수는 바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신의 왕이 들리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결코 사탄이 들려서 귀신들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귀신보다 더 강한 자라고 하십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이 사탄을 힘입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렇게 아주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하게 한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내려온 서기관들 소위 성경에 관한 한 최고의 박사라 할 수 있는 저들이 한 말이 과연 타당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친 것은 성경을 정면으로 대적한 것이라고 저들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을 대적하는 자가 누구냐 바로 사탄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당연히 사탄 즉 귀신의 왕이 들렸기에 귀신도 몰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결론을 맺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일 뿐 예수님은 성경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이 말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도 없는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까지 하는 이들이 어찌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은 성경에도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배척을 합니까? 오히려 안식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일까요? 아니 그럴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애써 그런 생각은 부인했던 것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반대인 바알세블 즉 사탄이 들려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나라가 스스로 분쟁한다면 그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니냐 집이 스스로 분쟁한다면 그 집이 망하는 것밖에 더 있겠느냐 마찬가지다 사탄이 스스로 분쟁한다면 설 수 없고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부터 온 서기관들의 이야기의 논리적인 모순을 예수님이 지적을 하시고서는 이어서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그런 말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신 것임을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모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잘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래도 사람을 모독하는 것은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결코 용서를 받을 수도 없고 따라서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말씀처럼 무서운 말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또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곧 성령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그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주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니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름은 예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요 하나님이 나의 아바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을 지라도 어느 순간에 내 마음에 그분이 정말 구세주야 하는 마음이 들게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생각을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심을 믿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령의 역사를 내가 부인한다면 그래서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지 못하고 따라서 고백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만 그 효력은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그 어떤 죄도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들의 모든 죄들을 다 용서하셨습니다. 더 이상 죄인의 아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가 온전하지 못하고 여전히 크고 작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추하고 더러운 우리를 탕자를 안아주시듯 그렇게 안아주시며 씻어주십니다. 우리가 자백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의 죄를 다 지우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부인한다면 용서받을 길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했는데 모두가 다 죄인인데 용서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길은 멸망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처럼 예수를 성경도 모르는 사람 그러기에 안식일의 규례도 어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런 모순적인 행동을 우리들도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그것이 더 큰 잘못이라고 하시면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믿는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더군다나 직분자가 그럴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 자체가 더 나쁜 죄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을 보면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은 당연히 외면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두 가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과 그들을 위해서 그들이 바로 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말을 그들은 어기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비판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몫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건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오르려고 하는 교만에 해당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는 이미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주신 성령님의 깨우치심을 따라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구주라고 고백을 했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어떤 경우에라도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비판하지 말고 오히려 서로를 세워나가는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할 것이요 나타나는 모든 역사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났던 모든 역사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들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 나타나는 역사를 볼 때 우리는 그런 역사를 나타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격려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수고하는 이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것은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그들이 하는 일 그리고 나타나는 모든 역사를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주님이 그를 쓰고 계시다는 사실만은 인정하는 그것이 또한 우리가 성령을 모독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 사람을 쓰신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통해서 성령이 일하고 계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쓰지 않으시면서 그 사람을 쓰시는지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쓰신다고 할 때 그 사람을 불러 일을 맡기신다고 하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성령의 뜻대로 순종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순종이 그래서 예배보다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그러므로 아멘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맡기신 그 일에 충성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수고하는 이들을 볼 때 그들을 격려함으로 돕고 함께 힘을 합쳐 수고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은 자들에게 주시는 모든 하늘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우리 모두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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