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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마 8: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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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마 8:23~27) 
 
 
퀴즈 하나 낼께요. 맞춰보세요.
전쟁중에서 가장 무서운 전쟁은 무슨전쟁입니까? "무서워"
그렇습니다. 무서움은 인간이 싸워나가야 할 가장 무서운 전쟁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질문 씨리즈 중에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하신 말씀을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각국 사람들의 평균 걸음걸이를 조사한 적이 있었답니다. 평상이 1분당 미국인은 25걸음을 걸었고, 영국인은 29걸음, 일본인은 35걸음, 그런데 한국인은 56걸음을 걸었다고 합니다. 왜 한국인은 서구 사람들보다 배나더 빨리 걸음걸이를 했을까요? 특별히 부지런해서 일까요? 그런데 걸음걸이를 조사했던 그 사람은 한국인들의 걸음걸이가 빠르고 많은 것은 "무엇인가에 쫓기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내 놓았습니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에게는 불안과 공포심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빨라질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너무 많은 것들에 의해서 쫓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계절에 쫓깁니다. 한국의 4계절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순환이 빠르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때를 놓칩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분단상황에서 오는 많은 문제들에 쫓기고, 울고 웃고, 안심과 근심이 교차합니다. 지금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준비로 세계적인 태풍의 눈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개성공단에 물자와 노동자가 들어가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심심하면 이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정치와 경제의 문제들에 의해서 쫓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희생자들이 만들져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불안이 있고 무서움이 도사리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발빠르게 움직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발걸음들이 빠르고 눈치가 빠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대면하게 되는 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적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 무서워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에게 무서움이 생기면 똑바로 바로볼 수도 없고 똑바로 설수도 없습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브갓네살왕을 이어 바벨론 왕으로 등극한 베사살왕이 1000명의 귀인들을 왕궁으로 불러다가 호기를 부리며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며 파티를 열었습니다. 잔치가 무르익어가는 중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보았습니다. 이때 베사살왕이 무서워하는 모습을 성경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단 5:6절에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 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서우면 정신이 다 없집니다. 온 몸에 기운이 다빠져나가버립니다. 할 수 있는 일들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방금전까지만 해도 뱃전에서 말씀을 선포하실 정도로 잔잔하던 물결이 벼랑간에 풍랑이 일며 폭풍이 몰아친 것입니다. 제자들은 배에 가득 차오르는 물을 보며 겁에 질려 혼비백산했습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이 무어라했습니까?  "우리가 다 죽게 되었나이다"했습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제자들이 발견한 예수님은 태평하게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보고 원망과 야속한 마음으로 우리가 다 죽게 생겼는데 못본 체 하시느냐고 투정하며 흔들어 깨웠을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때에 일어나신 예수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단 두마디로 바람을 그치게 하고 물결을 아주 잔잔하게 가라앉히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항하여 물으셨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왜 무서워했을까요?
첫째로 풍랑 때문입니다. 풍랑 앞에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아무리 큰 배도 넓은 바다 가운데서는 기껏해야 나뭇잎배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풍랑이 일면 다 위험하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요즈음 살겠다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가 죽겠다는 소리들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풍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질병의 풍랑이 거세게 몰아칩니다. 경제의 풍랑이 몰아칩니다. 난리와 전쟁의 풍랑이 몰아칩니다. 가치관의 풍랑이 몰아칩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가치관의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풍랑이 몰아칩니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점점 더 많은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완왁해져서 많은 상상할 수 도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큰 무서움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 주위에 광풍은 더 많아지고 더 거세질 것입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은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리라(마 24:6)." 

앞으로 이 세상에는 풍랑 일 일들이 점점 많아지리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둘째로 "믿음이 적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서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믿음이 적으면 무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큰 폭풍이 몰아치고 파도가 사나워도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바다가 뒤집어질 정도로 풍랑이 심해 파도따라 표류하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께서 같이 배안에 계신다면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련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처해있는 코 앞의 현상만을 바라보면 우리의 마음에는 진정한 안식이 없을 것입니다.

시 46:1-3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이 얼마나 대단한 고백입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믿음은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하늘이 무너져도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믿음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담대하고 당당해야합니다. 하나님이 남이 하나님도 아니고 자기 하나님인데 두려워 떤다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진짜 두려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적은 가나안사람이 아닙니다. 두려움과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람을 다스릴 말씀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흑암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우리의 밥이 돼야 가나안의 포도가 내 것이 됩니다. 겁먹으면 지렁이가 용으로 보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랍니다.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바람을 잔잔하게 하지 못합니다. 

셋째 주님은 풍랑을 꾸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전공이고 예수님의 특기이고 예수님의 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와 바람을 꾸짖었을 때 곧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 졌습니다. 오늘의 풍랑도 잔잔케 해 주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너희도 나와 같은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되리라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 말씀을 곡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이 하신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되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을 힘입어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문제의 해결자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하셨습니다. 다 이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성으로 생각하기 전에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이성은 자기 생각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성, 거기에는 보혈의 능력도 없고, 십자가의 능력도 없고, 은혜와 구속과 깨끗케 함도 없습니다. 
이성이 용납하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생바다를 향하여 인생풍랑을 향하여 꾸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함께 이 시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합시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 이름으로 명하노니 의심과 두려움은 뿌리째 뽑혀 영원히 사라질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패배의식과 상처는 치유될지어다. 다시는 기억도 나지 말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명하노니 놀라며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망설이며 지체하지 말지어다. 감격하며 감사할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으로 명하노니 대적들의 마음은 뜨거운 불 앞에 밀랍처럼 녹아내릴지어다. 내 앞에 무릎을 꿇을지어다. 거친 파도는 잔잔해질 지어다. 높은 산들은 낮아질지어다. 좁은 길은 시온의 대로처럼 넓어질지어다. 험한 길들은 평탄하게 될지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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