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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을 둘러엎다 (막 1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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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둘러엎다 (막 11:15~19)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면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기록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는 그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는, 어떻게 예수를 없애 버릴까 하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리가 다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때가 되면, 예수와 제자들은 으레 성 밖으로 나갔다.]

• 예루살렘
‘아리엘’, ‘하나님의 암사자’, ‘우주의 배꼽’, ‘시온’, ‘다윗의 도시’ 등으로 불리는 도시를 아십니까? 네,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참 유명한 도시입니다. 아리엘이란 이사야 29장 1절에 나오는 단어로 ‘번제단’을 뜻하는데,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도시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아리엘의 또 다른 의미는 ‘암사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암사자라고도 부릅니다. ‘우주의 배꼽’이라는 말은 종교학에서 유래된 말인데, 배꼽이 몸의 중심인 것처럼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 가나안 사람들은 이 도시를 예루-샬렘(Jeru-Shalem)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일몰의 신인 ‘샬렘 신의 집’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추분이 되면 태양이 이 성읍의 정면에서 떠올라 등 뒤로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그 도성을 세상의 축 즉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13세기에 히브리인들이 등장한 뒤에 이 도시는 ‘평화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샬렘’이라는 단어를 평화를 뜻하는 ‘샬롬’(Shalom)과 혼동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 평화의 도성이라 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외신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일부가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수도로 정해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평화를 이룰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견해가 그리고 입장이 진정한 것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이상화된 예루살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사2:3b-4)

이사야가 그리고 있는 하나님은 분쟁을 판결하고 갈등을 해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학의 으뜸가는 가르침은 ‘侍天主’ 사상입니다.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는 하나님을 모시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侍’는 곧 ‘모심’입니다.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그분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삶을 조율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불쌍한 이들이 너무 많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니 타락한 종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 성전의 공간적 구성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는 골고다가 우주의 정점인 것처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세상의 중심은 예루살렘, 그 중에서도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땅 위에 서있지만, 하늘과 통하는 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일 년에 세 차례 씩이나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것은 자기 몸과 마음에 하늘의 질서와 리듬을 채워 넣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삶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예배의 위선을 보았습니다. 아모스를 통해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통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암5:21-24)

신앙생활은 힘겹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는 결의에 기초합니다. 그렇기에 신앙생활은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종교적 행위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 행위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나타내는 서술어들은 충격적입니다. ‘싫다’, ‘역겹다’, ‘기쁘지 않다’, ‘거들떠보지 않겠다’, ‘집어치워라’…. 이것은 2700년 전에 국한된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사람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을 외면하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까요? 종교는 ‘다시 묶는다’는 뜻의 라틴어 ‘re-ligare’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우리를 묶어준다는 뜻이지만, 그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묶어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종교행위도 문제지만,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종교도 문제입니다. 예배가 예루살렘에 집중되다보니 대제사장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종교적 특권층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어야 할 성전은 사람을 차별하는 소외의 공간이었습니다. 성전의 제일 바깥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바자(bazaar)라 할 수 있는데, 그곳은 상인들이 기념품이나 희생제물을 팔고, 환전상들이 돈을 바꾸어주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위 말하는 성전 정화 사건을 일으킨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여인의 뜰이 있는데, 이곳은 여성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남성들은 물론 의례적으로 부정한 사람들까지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이스라엘 남성들의 뜰인데 남성들은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바치는 장면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여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더 안쪽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있었고, 더 안쪽으로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공간 구성 자체가 엄격한 위계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넘을 수 없는 경계선 앞에 설 때마다 열등감을 내면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던 시간 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보도나, 에베소서의 저자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으로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허무셨다고(엡2:14) 말하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성전 체제의 전복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착취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성전세는 성전 세겔(Shekel)로만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꼭 환전상을 이용해야 했고, 희생제물을 바치는 이들은 흠 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기에 제사장의 검사를 받은 것을 구매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인들의 뜰에서 벌어지는 그런 상행위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장치였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거래행위의 이면에 있는 추잡한 탐욕을 꿰뚫어보셨습니다. 성전 귀족들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가난한 이들의 간을 빼먹는 일이, 경건을 빙자하여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 신문에서 가족들과 경상도의 어느 유명한 사찰을 찾았다가 ‘돈도 없으면서 왜 왔느냐?’는 말을 듣고 상처를 받았다는 어느 분의 기사를 보았습니다만, 가장 거룩한 곳이 탐욕과 결합하면 가장 추한 곳으로 바뀌게 마련입니다. 돈이 개입되는 순간 종교는 타락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은 순간의 일입니다. 갈릴리 출신의 목수였던 서른 살 남짓의 청년은 그런 뒤집힌 현실을 도저히 보아 넘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사람들을 차별하고, 탐욕에 의해 얼룩진 성전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민이 기도를 바치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이 되었다면 그 성전은 무너지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소위 성전 정화 사건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사실은 성전 체제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파울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매우 인상 깊게 그리고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성전 구역으로 들어가셔서 사방을 둘러보며 화가 난 표정으로 짐승들을 내쫓고 환전상들과 비둘기 상인들의 탁자와 바구니를 뒤집어엎습니다. 당혹한 사람들은 영문을 모른 채 바라만 보고 서 있습니다. 그때 다리를 저는 이를 비롯한 장애인들과 올리브 가지를 손에 든 아이들이 몰려와서 환희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때 주님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하게 변합니다. 감독은 역사의 무대에서 숨죽여 지내던 이들이 복권되는 장면을 성전 정화 사건을 통해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 예수를 없앨 음모
그러나 성전 체제를 부정한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너희가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는 말씀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앨 방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이 누리던 종교적 권위나 기득권을 뒤흔드는 사람을 그냥 두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예수를 없애려는 그들의 모의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민중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차별과 억압을 팔자려니 여기고 살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득권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밑바닥 사람들의 깨어남입니다.

예수님은 “옛 사람은 ~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이라고 말한다”면서 율법의 조문이 아니라 그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3:6)는 바울 사도의 말씀은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급진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법이건 제도건 프로그램이건 사람을 중시하지 않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예수님은 주눅 들었던 사람들을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와 무관하게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일깨우셨습니다. 성전에 나가 동물을 잡아 바치는 것만이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노동의 현장,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자리임을 주님은 많은 비유를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백성들 가운데 퍼져나가면 종교적 특권층들이 설 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없애려 하는 것은 그들 편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고난을 자초하신 것일까요? 평화 순례자인 도법 스님이 거기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자신의 앎이 참되면 행동 안 할 수가 없다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그 길을 가면 십자가에 처형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당당하게 그 길을 가잖아요. 왜 갈까요? 그 앎이 참되기 때문이지요. 제대로 알면 그 길밖에 없는데 안 갈 수가 없어요. 죽어도 갈 수밖에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앎은 참되지 않다는 증거예요.”(최종수, “도법 스님과의 대화”, <<녹색평론>>, 105권, 194쪽)

• 둘러엎어야 할 상
이게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비록 죽음이 기다린다 해도 그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참의 길이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혹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오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둘러엎으실 상이 과연 없을까요? 참담한 상황으로 내몰린 감리교 사태, 세상 사람들이 중산층들의 사교장으로 변했다고 비아냥거리는 교회 현실, 이웃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 마음,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는 우리의 못난 습성, 삶의 자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우리 믿음, 다른 사람들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우리의 생각을 강요하는 폭력…주님의 안타까운 눈길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채찍을 드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마음을 닦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교회를 변화시켜 주님의 몸으로서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모시고 산다면 어떻게 이웃을 무시할 수 있겠으며, 어찌 돈의 지배를 기정사실로 여기겠으며, 어찌 종교를 권력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열기 원하십니다. 이 벅찬 소명에 따라 진실의 길, 참의 길을 향해 날마다 순례자의 심정으로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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