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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이 있나니 (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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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나니 (마 5:1~6)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뒤따라가며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뒤따라갈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山上垂訓 중에서도 팔복의 가르침을 건너 뛸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런데 그 복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민족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르고, 종교에 따라서도 다릅니다. 문제는 그 복이 가짜 복일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지난 해 7월 미국의 ‘뉴욕타임즈’가 한국은 IT강국에서 迷信강국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巫俗人이 200만 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2005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 4700만 명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 중 23명 중 1사람이 巫俗人이라는 이야깁니다(놀랍지 않습니까?). 무속인들에게 연간 2조원의 돈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 중의 30%가 기독교인들이 무속인들에게 갖다 준 돈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중에도 상당수가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자이지만 그 신앙이 다분히 미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천주교신문인 평화신문의 조사에 의하면, 영세를 받은 신도 가운데서도 사주나 궁합이나 토정비결 등의 무속에 관심을 갖고 있거나 경험이 있는 신도가 51%로, 천주교인 중 절반 이상이 넘는다고 합니다. 천주교인들 중에도 절반 이상이, 무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깁니다.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혼합주의적인 신앙생활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무속적인 신앙은 흔히 기복주의적인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세속적인 개념의 복만 받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복에 집중해 보십시다. 먼저 우리는 산상수훈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 1-2을 보면 당시 유대종교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놀라운 그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한 번 그려 보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그림을 한 번 비교해 보시기를 바랍니다(유대종교와 옛날 구약시대 그림과 비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는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막 몰려듭니다. 가까운 지역사람부터, 먼 지역사람까지,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사방에서 모여듭니다. 몰려드는 무리를 보시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산 위로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참 특이하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산으로 올라가셨을까요? 산을 특별히 좋아하셔서 일까요? 아닙니다. 산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산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여기 ‘산’이라는 장소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옛날 나이 팔십의 미디안 광야, 양치기 모세를 부르신 장소가 어딥니까? 호렙산입니다. 타지 않던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또 호렙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토라가 주어진 장소입니다. 무슨 이야깁니까?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 위에 올라가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계시하는 신학적인 의미라는 말입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습니다.’ 이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앉으셨다’는 말씀은 당시 유대인의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취하던 자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합니다. 여기 주목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자’ ‘산 위로 오르십니다’ 거기 ‘앉으십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가르치십니다.’ 이 모두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해 주는 증거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직접 말씀하고 계시다는 신적 행위라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종교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고, 존경받는 랍비라 할지라도 산 위에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법은 없습니다. ‘산’은 신학적으로 누구의 장소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언이라는 것입니다(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오신 분).

또 한 가지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호렙산에서 십계명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세, 한 사람뿐입니다. 출애굽기 19, 12 말씀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금하여 명하셨습니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호렙산)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런데 본문을 보십시오. 산 위 오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누가 나아왔습니까? 열두 제자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무리들입니다. 그들이 다, 산 위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시는 산상수훈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복입니다. 보시는 대로, 산상수훈의 첫 말씀이 팔복의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의 팔복 말씀이, 우리가 말하는 복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팔복 중 첫째 복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팔복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먼저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이, Maka,rioi)’ 하며 선언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 하셨습니까? 그 첫째 복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저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시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십니다. 그렇다면 마태와 누가는 서로 다른 복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는 간결하게 그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면, 마태는 누가가 말하는 그 ‘가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면, 가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가난한 자이십니까? 부한 자이십니까? 한 증권회사의 고객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 의하면, 조사 대상의 43%가 재산이 10억에서 50억은 되어야 부자라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22%는 재산이 50억쯤은 되어야 부자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50억을 가진 사람도, 200억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 자신이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1억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빚에 허덕이며 사는 사람에 비하면 자신은 부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객관적인 기준을 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 교계 일각에서는, 역발상적으로 가난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청부론이라는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청부라는 말은, 깨끗한 부자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깨끗한 부자가 될 수 있고 또 깨끗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청부론이라 합니다. 청부론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논리가 있습니다. ‘몫 논리’입니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에는 여러 가지 몫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땀 흘려 번 돈이지만, 그것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몫(십일조)이 있고, 다른 사람의 몫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구제의 몫이 있고, 부모님께 드려야 할 몫도 있고, 자식들에게 주어야 할 몫도 있고, 나라세금의 몫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몫을 다 뗀 나머지가 순수한 ‘내 몫(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몫 논리’에서 중요하게 말하는 또 한 가지 가치는 ‘내 것(몫)’에 대해서는 자유할 수 있어야 하고, 누리며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청부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핵심내용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몫 가르기를 잘하고 나면, 내가 누리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가난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의 의미가 이런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 있는 사람인 ‘가난한 자’의 ‘가난’은 ‘마음’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물질적인 가난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가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좀 더 집중적으로 말하면 ‘영성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준 영성가들의 삶을 비추어 보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가난에 대한 상대적인 어떤 기준, 수치나, 물질의 과다, 유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나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그 마음조차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난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그 어떤 객관적인 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가난한 자라는 의식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가난을 추구하는 삶, 그러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 아니시면 이 목숨 하나도 부지할 수 없는 미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는 아직도 富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아직도, 물질이 내 인생의 주인노릇하고 있는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는 고백이 분명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 고백을 가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富와 財物, 物質 등의 능력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내어드리려는 삶을 사는 사람, 그 사람이 누가복음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이고,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한 자’의 ‘가난’은 종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상대적인 어떤 수준의 가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의 ‘몫 가르기’를 잘 했으니, 나머지 몫은 내가 정당하게 누릴 수 있는 ‘내 것’입니다는 그 의식을 하나님 앞에서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당당하게 내 몫이기 때문에 내 몫을 누리겠다는 권리의식이나, 자유의식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포기하겠다는 신앙적인 삶의 태도를 가진 자가 가난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2009년도 우리교회 표어 말씀 갈라디아서 5, 13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아멘.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누릴 수 있는 권리, 자유가 있다할지라도 그것으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다하고 난 나머지 몫(돈, 재물)에 대해서 나는 자유하다’는 생각은 곧바로 ‘누림의 권리’로 이어지는 것은 人之常情입니다. 할 만큼 했으니 나머지 돈은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 어떻게 보면 얼마나 떳떳합니까?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지기’라는 말씀 속에서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청지기란,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자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청지기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내가 땀 흘려 번 돈이지만, 내 수입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는 신앙행동이요 고백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십일조만 드립니까? 그것은 수입의 1/10만이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머지 9/10에 해당하는 수입도,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겠습니다는 신앙고백을 담아 드리는 헌금이 십일조입니다. 

둘째로, 청지기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끊임없는 ‘하나님의 뜻’ 찾기를 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청지기는 주인의 마음을 살펴 그 뜻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물질을 맡았으면, 그 물질을 주인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사람을 맡았으면 주인의 뜻에 맞게 보살펴야 합니다. 자기 욕심대로 행동한다면, 주인은 그 청지기에게 분명히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은, 물질뿐이 아닙니다. 사람뿐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전부, 내 생명, 호흡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분명한 고백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내 목숨하나도 부지할 수 없는 무능한 자입니다는 고백과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전 존재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며 사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이 책임은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이 책임은 짐이 아니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것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가난합니다. 비록 가진 것이 많아도 그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늘 가난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가난하지만 하나님으로 부요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 10).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나 때문에, 힘들어 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기억하십시다. 나는 누구를 보나, 평균치로 보나, 상대적으로 보아도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남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나 중심적으로 살아온 삶을 회개하십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가난’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내려놓음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직도 너무 富한 사람입니다는 고백을 멈추지 않는 자입니다. 나는 아직도 너무 富합니다는 맘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언약하신 천국의 복이 주어질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3, 40년 전만 비교해보아도 우리는 지금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아직도 더 가지지 못해서 가난하다고 아우성칩니다. 더 누리지 못해서 불행하다며 불평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 내 것인 양, 내 것 가지고 누린다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았던 자들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더 내려 놓기 위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 되게 하시고, 자발적인 가난의 삶을 살아가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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