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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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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막 10:46~52)


시작하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주간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주간에는 때아닌 눈이 많이 내려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경칩이 지났으니 이제 봄은 우리 앞에 왔을 것입니다. 사순절 두 번째 주일, 모여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년 전에 한참 인기 있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저는 너무 재미있게 보아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투명인간 최장수’라는 드라마입니다. 제목만 들으면 별 상상을 다하게 만드는 드라마이지만 내용은 참 가슴 아프고 마음이 뭉클한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경찰관 최장수는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립니다. 그의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던 아름다운 기억들이 하나 둘씩 사라집니다. 그의 머리는 기억을 잃어버려 백지처럼 하얗게 됩니다. 
이렇게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 안타까워 주인공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아직 자기에게 아름다운 기억이 있을 때 사람들과 함께 사랑했던 기억을 나누기 위해서 한 가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기억이 살아 있을 때 하는 장례식이었습니다. 주위에서는 미친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인공은 자기의 가족들과 지인들을 불러서 자기가 사랑하고 사랑 받았던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기억의 여행을 합니다. 그 장례식에서 최장수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다음 생에도 지금만 같으면 참 좋겠다. 다음의 생에서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고, 사랑하는 내 자녀들을 낳고,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싶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어느 부부가 이 드라마를 보고 있다가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난다면 누구랑 결혼하고 싶어?’ 그 남편은 대답합니다.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이랑 결혼할거야.’ 그러자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왜 자기는 자기 생각만 하는 거야?’ 우리집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소원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떠할까도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치는 그의 소유나 지식이나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믿음과 소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소원이 무엇입니까? 지금 나는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내 간절한 마지막 소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내 자신의 모습이요 내 앞에 있는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 합니다. 한 살인범이 있어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 되는 사람은 나라에 공훈이 있는 아주 훌륭한 정치가였습니다. 자기 동생이 이렇게 생을 마치게 되는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파서 체면불구하고 대통령을 찾아가 “내 동생을 내게 맡겨줄 수 없겠습니까?”하고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대통령은 이 형님의 인품과 나라를 위한 공훈을 생각하여 동생의 사면을 허락했습니다. 형은 동생의 사면장을 받아 가지고 동생이 갇혀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동생을 면회하고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만일에 대통령이 너를 사면해준다면 너는 앞으로 무엇을 하겠느냐?” 동생은 거칠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 감옥을 나가는 순간 나에게 사형을 언도한 그 판사를 죽일 것입니다. 또한 사형언도를 하도록 결의한 배심원들을 차례차례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형은 아무 말 없이 감옥문을 나왔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면장을 찢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소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바로 이 처지에 와서도 아직도 그 소원이 잘못됐습니다. 그런고로 사면 받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소원은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바르고 분명하면 당당하고 용기있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허락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응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몸 말.

오늘 본문에 보면 시각장애자인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처지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길가에 나앉아 구걸하고 있는 한 장님의 모습을 떠올려보십시오. 어쩌면 이 사람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생을 끝낼 것입니다.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사람에게 소원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원과 믿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간단한 본문 속에 귀중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소원과 믿음만 있으면 산다-바른 소원, 바른 믿음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디매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47절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말 그 속에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일반적인 소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선하십시오” “그냥 지나가지 마시고 몇 푼 주고 가세요”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이상의 소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만은 소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으실 때 만일에 이 사람이 “돈 한 푼이오”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돈 한 푼이요, 적선이요 했지마는 예수님 앞에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소원입니다.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비록 길거리에 나앉아 있지마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그 고백에 결코 못지않은 확실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는 보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듣는 것이 보배였습니다. 많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조용히 들었습니다. 듣고 메시야가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언제 그 메시야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마음속에 신앙고백이 있고 확실한 영적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기회를 포착하여 예수님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곳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십니다. 이것은 일생에 단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계십니다.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그는 들은 바를 종합해서 소원을 바로하고 믿음을 바로하고 예수님께 소리를 지릅니다. 부르짖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만이 나를 치유해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임을 그는 분명하게, 확실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께 나갑니다.

반면에 그 시간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끄럽다고 꾸짖었습니다. 방해자가 많은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방해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과 이 바디매오의 마음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 엄청난 차이가 아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끝까지 방해를 무릅쓰고 부르짖습니다. 마침내 놀라운 극적 장면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발길을 멈추시고 저를 부르십니다.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하니 그는 ‘됐다, 기회는 왔다’ 생각합니다. 그 순간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신기한 장면이 나옵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여러분, 소경이 뛰었다는 말 들어봤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뛴다는 얘깁니까. 소경이 뛰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겉옷을 벗어던졌다는 것입니다. “겉옷을 내어버리고...” 이 말씀 또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겉옷이라는 게 뭐냐하면 이 사람의 마지막 재산입니다. 하나의 밑천이자 다르게 말하면 이 소경의 유니폼입니다. 이것은 구걸할 때 입는 더럽고 남루한 옷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을 보면서 생각해봤습니다. “겉옷을 내어버리고...”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다시는 이 옷이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남루한 그 ‘유니폼’이 이제는 필요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뛰어서, 소경이 뛰어서 예수님께로 옵니다. 엎어지듯 자빠지듯 좌우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 예수님께로 나아왔다-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그를 보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이 말을 할 수가 없고 또 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만은 이 특별한 소원을 아뢰고 있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얼마나 강력한 요구입니까. 교회에서도 개인들의 기도 제목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늘 느끼는 것입니다만 대부분이 너무 보편적인 기도 제목들만 씁니다. 전도사님들을 통하여 제출하는 기도 제목과 담임목사와 직접 면담하며 청하는 기도 제목이 다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께 직접 아뢰는 기도의 제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소원은 아주 특별한 것이어야만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오직 주님 앞에서만 구하는 그런 소원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에게 말해도 소용이 없는 아니 하나님께만 말할 수 있는 특별하고도 분명한 소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십시오. 잘 아시는대로 솔로몬이 21살에 왕이 되고 너무 답답하던 나머지 하나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구하는데 그것은 부귀와 영화도 아니고, 원수의 성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 지혜로운 마음을 주십사 합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십니다. 그 장면을 자세히 읽어보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십니다. ‘어찌 그것을 구하느냐? 아니, 원수의 성도 있고,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건강도 있고... 소원이 많을 것 같은데 왜 그런 건 아니고 오직 지혜로운 마음이냐?’ 그래 하나님께서 어떠하시다 했습니까.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소원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과 맞았습니다. 요새말로 ‘코드가 맞았다’ 이것입니다. 코드가 딱 맞는 순간 하나님께서 놀라운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하십니다.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꿈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현실이 되었음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하나님 앞에 명상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도 그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그때 토마스 아퀴나스가 드린 유명한 기도가 있습니다. ‘I want nothing but Christ.’ 주여, 나는 주님 외에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주세요-이렇게 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소원을 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화재가 났습니다. 낮잠을 자던 어린아이가 불이 났다는 소리에 정신없이 3층 꼭대기까지 뛰어올라갔습니다. 3층 옥상에 섰습니다. 불길은 밑에 있고 연기는 자욱한데 소방서 사람들이 커다란 담요 같은 것을 가져와 네 귀를 붙잡고 펴더니 그 아이 보고 뛰어내리라고 소리칩니다. “우리가 잘 받아줄 테니 마음놓고 뛰어내려라” 그러나 옥상에 서 있는 아이는 선뜻 뛰어내리지를 않고 엉엉 울기만 합니다. “우리가 받아줄 테니 걱정말고 뛰어내려. 우리가 받아 줄 테니 어서 뛰어내려. 어서.” 그래도 아이는 뛰어내리지 않았습니다. 장사 나갔던 아이 어머니가 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애야, 엄마 여기 있다.” 아이가 마침내 뛰어내린 것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엄마 여기 있다 하니까 “엄마”하고 뛰어내린 것입니다. 3층에서 뛰어내리는 그 용기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올 때 그와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그로 하여금 이 같은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을 만난 거지 바디매오의 사건을 보았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살던 바디매오가 아무나 보고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지는 못했으나 귀로 들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에 대하여, 그가 곧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시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뭐라해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치며 그에게로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여 예배하는 것이 바디매오의 이런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분명한 소원입니다.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오는’ 바디매오에게,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말은 아무에게도 해 본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해도 소용이 없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만은 이 분명한 소원을 말하고 또 그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만 말씀 드릴 수 있는 소원이 있습니까? 바디매오처럼 오늘 그 소원을 말하십시오. 그리고 그 소원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세상이 고달프고 또 모든 것이 부조리하다 해도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원이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내 소원이 무엇인가? 내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는 바른 소원, 그것을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아름다운 소원, 주님만 믿는 아름다운 믿음,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바디매오처럼 믿음으로 달려오는 이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실 것입니다. 대답하십시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분명하게 대답하는 사람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선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소원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그 이상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제일 마지막 문장을 보십시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우리 모두 이런 분명한 경험을 갖고 예수를 좇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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