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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찬미의 제사 (히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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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의 제사 (히 13:15) 
 

헬라어는 강조하는 단어를 문장 앞머리에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는 ‘그분을 통해서’라는 헬라어 구절이 가장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기서 ‘그분’은 12절에 자기 백성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우리말 성경은 “예수로 말미암아”라고 의역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음이 어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찬양하다’라는 말은 ‘노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래와 찬양을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노래는 누구나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기독교적인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시의 형태로든 곡조가 붙은 형태로든, 창조주와 구속주를 인정하고 경배하는 사람만이 그분을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찬양도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받아들여집니다.

두 번째 순서의 단어는 “우리가 드리자”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고 해서 찬양의 주체가 ‘하나님 백성 전체’임을 보다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창조주께서 당신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백성을 지으셨다면 찬양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목적이자 의무입니다. 이는 찬양이 신앙의 보조적 요소가 아니라 본질적인 요소임을 말해줍니다. 피조물들 중에서 찬양에 합당한 유일한 존재로 선택된 것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이기도 합니다. 찬양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은 도무지 찬양할 수 없는 자에게 찬양할 수 있는 특권과 존재목적을 회복시켜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은 성가대원을 뽑아서 찬양했습니다. 나머지 성도들은 듣고만 있었지요. 그레고리안 성가는 따라 부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찬송이 하나님 백성 전체에 주어진 특권이요 본분임을 재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성가대 형식을 폐지하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찬송하는 방식을 도입했지요. 음악 교육을 받지 못한 성도들도 쉽게 찬양할 수 있도록 찬송가도 만들었습니다. 찬양은 재능 있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닙니다. 교회를 대표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찬양단을 둔다 할지라도, 나머지 회중은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을 듣는 자가 아니라 찬양하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찬미의 제사”는 찬양의 제사적 성격을 표현합니다. 레위기에는 다섯 종류의 제사가 계시되어 있습니다. 죄 사함을 위한 ‘속죄제’, 하나님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친 것을 사함 받고 배상하는 ‘속건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다는 의미로 제물을 몽땅 태우는 ‘번제’, 정결한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 제물을 높이 들어 올리거나 흔든 후에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하나님과 예배자들의 화목한교제를 나타내는 ‘화목제’입니다. 찬양도 속죄와 감사의 마음,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의 마음, 일상의 순결을 유지하려는 마음, 교회가 화목하게 교제하려는 마음들이 담겨있습니다.

구약 제사는 예배자가 제물과 제사 방법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을 따랐습니다. 찬미가 제사의 성격을 가졌다면, 찬미 역시 자기가 느끼며 노래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찬양의 가사’가 성경을 왜곡하는 내용이 없어야겠지요. ♪예수 사랑하심은♬(411장)의 4절에는 세상 떠나 가는 날 천국 가게 해달라는 간구가 있습니다. 이미 이 땅에서 천국백성 삼으신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무익한 것처럼 노래하는 셈입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177장)도 성도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합니다. 고의성은 없겠지만 이런 가사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지중에 모독하게 됩니다.

구약 제사의 제물들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것과는 엄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찬미도 제사의 성격이 있으므로 ‘찬양의 곡조’ 역시 세속과의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545장)은 존 스콧 부인(Lady J. Scott)이 작곡한 스코틀랜드 민요로서 원제목이 ‘애니 로리’(Annie Laurie)입니다. 어여쁜 여인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내용인데, 크림 전쟁 때에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을 그리워하여 부르다가 유행되었습니다. 한국민요 중에는 내세를 믿지 않는 사람이 비참한 삶에 대해 한탄하는 곡조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연합 장로교회 찬송가 346장은 ‘한’(恨)이라는 정서가 농축된 아리랑 곡조에 가사를 붙였습니다. 곡조의 기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곡조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기에 적절치 않으며 구속 받은 백성이 가질 정서도 아님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비관하며 신세 한탄하는 가락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찬양하기가 마땅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곡조들에는 세속과의 구별됨을 찾을 수 없습니다.

현대 음악의 풍조는 당김음과 단순한 곡조의 반복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여 쉽게 흥분상태에 도달하도록 만듭니다. 가사 없이 곡조만으로 쉽게 열광 상태에 빠지게 만들지요. 이런 곡조들은 하나님보다 예배자의 감정에 몰입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인간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진리에 기초하지 않은 열광주의는 거부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시내산을 내려올 때 사람들은 금송아지 주위를 돌며 노래하고 춤추고 있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몸과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축제를 행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에서 떠난 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성경은 우상숭배로 규정했습니다. 찬미에 제사적 성격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찬양의 곡조까지도 ‘세속과의 구별됨’이라는 성격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항상”이란 단어는 찬양할 때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음을 말해줍니다. 바울 사도는 억울하게 매 맞고 갇혀있는 옥중에서도 찬양했습니다(행 16:25). 찬양이란 자기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부르는 노래가 아님을 잘 보여주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가장 괴롭고 답답한 순간에도 여전히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십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실패와 죄로 인한 억눌림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는 백성들은 찬양을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항상’이 늘 같은 찬양을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는 구원의 감격과 감사, 또 간구, 혹은 선교와 교육을 위한 간접 찬양도 필요합니다. 가사의 내용이 성경에 충실하다면, 거짓 고백이 아닌 자신의 진정한 신앙고백을 담아서 찬양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공예배는 몸된 교회가 창조주와 구속주를 찬양하는 것이 핵심이므로 개인 체험 위주의 간증형 찬양이나 간접 찬양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속성에 대해 직접 찬양하는 곡들로 구성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요.

골로새서에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라고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말씀의 가르침과 함께 항상 찬양할 것을 성도들에게 권면했지요. 그런데 시와 찬미와 노래라는 단어들은 70인역 구약 성경에서 ‘대부분’ 영감 받은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시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이 ‘오직’ 영감 받은 성경말씀만으로 작사해서 찬양하라는 권면은 아니지만 영감된 말씀으로 작사된 찬양의 필요성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생생활의 찬양에 대한 권면이 이렇다면 공예배의 찬양은 영감된 말씀에 기초한 찬양이 더욱 많아야겠지요. 영감된 말씀만큼 하나님의 성품을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예배는 시편 찬송처럼 영감된 말씀으로 작사된 찬양들이 몹시 부족합니다. 기독교 교육과 전도를 목적으로 일상의 기독교 음악도 말씀 자체를 가사로 한다면 가장 효과적일 텐데 역시 부족합니다. 내용이 성경에 충실한 새 찬양의 등장은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로인해 영감된 말씀자체로 드리는 찬양이 외면되고 있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회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받은 것 외에로는 주님께 합당한 것으로 노래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의미 있게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는 찬양의 대상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의 찬양이라도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면 우상숭배입니다. 루터는 “예배에서의 ‘그 오르간’(The organ)은 바알의 표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르간 자체가 우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배를 빙자해서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오르간의 선율을 감상하는 태도가 우상숭배와 동일함을 지적한 말입니다. 간혹 성악 전공자에 의해 마리아를 찬양하는 ‘아베 마리아’가 예배 특송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비록 알지 못하고 행한 일일지라도 이는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일입니다. 부지중에 우상을 숭배한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서 찬양 드릴 때, 예배자는 큰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하지만 찬양이 예배자들을 즐겁도록 하기 위해서나 회중들에게 감명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되지 않아야 합니다. 회중들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해서도 안됩니다. 그런 목적으로 노래한다면 찬양을 빙자한 인간들의 축제일뿐입니다. 나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 위로를 받고, 기쁨을 느끼고, 기분 전환하려는 목적으로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비록 그 목적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찬양이 될 수 없습니다. 찬양이 아니라면 예배에서 부를 수가 없지요.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적절치 못한 찬양들을 배제할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길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경외하며 영광 돌리게 하는 시편 찬양이 우리 가운데 좀 더 많이 불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음악적 재능을 가진 자들을 이 일들을 위해 세워주시고 사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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