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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실천 (요 13:1,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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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실천 (요 13:1,34,35)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34)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

"충분한 사랑이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충분한 사랑이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열 수 없는 문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건널 수 없는 해협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무너뜨릴 수 없는 벽도 없고, 충분한  사랑이 뉘우치게 할 수 없는 죄도 없습니다. 근심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 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앞날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는 지도, 매듭이 얼마나 단단한 지도, 저지른 실수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 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한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입니다. 충분히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늘 사랑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어서 행복하지 못하고 충분히 사랑할 수 없어서 불행을 느낍니다. 우리안에 사랑의 능력이 있다면 참 좋을텐데, 우리에게 사랑이 차고 넘쳐 흐르면 그 사랑이 우리 주변사람들에게 흘러가 그들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사랑이 차고 넘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시는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요즘 김수환추기경 선종 이후 장기기증에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죽어서 몸의 전부가 아닌 아주 작은 일부를 기증하는 것도 훌륭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살아서 당신의 몸을 일부가 아닌 전부를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며 영생을 얻도록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큰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열두시간쯤 앞의 상황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시는 장면을 13장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통상 발을 씻기는 일은 집에 처음 들어오는 때입니다. 주인이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습니다.  제자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고 저녁을 잡수시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서로 미루고 아무도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기 바빴습니다. 서로 자신은 그렇게 천한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니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만찬 도중에 가룟  유다는 식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이제 얼마 후에 가룟 유다가  군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잡으려고  몰려 올 것 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착잡했을 것입니다. 사랑할 여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심하고 이기적인 제자들이 밉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런 상황에서 사랑할 수 있는 이가 또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갖추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만한 여건이 이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완전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죽음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억울하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움을 감내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도 허황한 꿈만 꾸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손수 세숫대야에다 물을 떠다가 허리를 굽혀서  한 제자  한 사람, 한 사람, 이  철없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십니다.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은 그냥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 그런 긴장된 순간에 하신 말씀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사랑하라'는 말은 56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시는 13장에 서 21장 사이에 44회나 나옵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자기 제자들을 앉혀 놓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씀들 가운데 가장 핵심 되는 주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말슴하신 사랑하라는 말씀에 담긴 중요한 진리를 붙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은 먼저 우리에게 사랑의 표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가 그 표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무조건적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희생해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한 순간 사랑하다가 끝나버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한번 마음을 주셨으면 끝까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표준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말 사랑할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목사의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것만큼 어려운 게 없습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것도  어렵지만 실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운 사람을 피하면 되니까요. 억지로라도 그를 생각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제 아무리 목사라고 해도 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표준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우리를  찾아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해할 줄 아는 사람보다는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그의  참 모습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참 모습을 드러내시는 사람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제자훈련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줄줄이 꿰며 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해내는 것은 사랑할 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사랑을 실천해 보려고 애쓸 때 주님은 자기 모습을 밝히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여 사랑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머리로는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 입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안다고 할 지 모르지만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제자는 선생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놓 든지 간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절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종 해야 합니다.
  '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는  이 표준에 맞추어서 서로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을 내어주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손해보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감리교 선교사이면서 신학대학에서 가르쳤던 박대인 목사가 동남아시아에서 열린 외국 선교사 회의에 참석했을 때입니다. 그 모임에서 일본인 선교사를 한 분 만납니다. 일본인 선교사는 드문데 기이하게 여겨져서 '어떻게 선교사로 오게 되었는가?' 물어보았답니다. 그의 대답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도쿄에 살았는데 정부의 지시로 농촌으로 소개를 가게 되었답니다.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고 아는 이도 없는 낯선 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외롭고 불편하고 서글프겠습니까? 그런데 남달리 친절과 도움을 베풀어준 지방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분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달을 지내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도쿄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친절한 사람을 찾아가 작별의 정을 나누게 되는데 그 농촌사람이 그때 비로소 자기는 조선에서 온 사람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헤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은헤를 빌겠다며 위로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분은 도쿄로 돌아가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그 조선 사람의 사랑이 기억날때마다 교회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크리스찬이 되고 목회자가 되어 일본보다 후진국인 동남아시아에서 선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깨달아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감격하여 죄를 버리고 있습니다. 

  2. '서로' 사랑하라
  
다음으로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서로'란  일차적으로는 제자들 끼리를 뜻합니다.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인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구를 생각하기에  앞서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 상호간에 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거창한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옆에 있는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멀리 있는 사람,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라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로서의 개개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열렬히 사랑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적인 면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일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 역시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전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너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전 세계를 사랑하고,  너를 통하여 동시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내가 옆에 있는 남편을 보고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남편을 통해 전세계를 사랑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사랑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삶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늘 예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증명하신 참된 사랑의 감동에 빠져 살아야 합니다.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늘 본받고자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꼭 실천에 옮겨야 됩니다. 막연히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만 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사랑은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알고 믿는데 그쳐서는 불완전합니다.  믿는바를 그대로 실천할 때 온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는 율법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면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냐?'고 물으시고는 '가서 나도 그와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주간 카작스탄의 신학교에서 교회개척론 강의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강의를 끝내고 난 후 한 학생이 제게 와서 자기의 간증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본래 이슬람교를 믿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슬람종교의 지도자인 이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어려서부터 이맘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도 이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이 여섯이나 되는데 이슬람신학교에 들어가면 가족을 돌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남인 그는 먼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고 신학교입학은 가정이 안정된 후로 미루었습니다. 그래서 버스운전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넷이나 낳았지만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밖으로만 돌았습니다. 어느날 날이 추워 버스의 엔진이 얼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차 밑에 들어가 불을 가지고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버스의 기사가 그를 보지 못하고 후진을 하였습니다. 버스의 바퀴가 그의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고함소리에 그 기사는 다시 버스를 앞으로 움직여 다리를 또 한번 지나갔습니다. 그는 기절하였습니다. 깨어보니 병원이었습니다. 다음날 의사는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리를 보니 피부가 새까맣게 죽어있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내는 울었습니다. 아내의 입에서 듣게된 놀라운 소식은 그의 딸이 유방암에 걸려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내는 태어난지 3개월된 손자에게 우유를 먹이다가 잘못하여 아기의 식도가 막혀 위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며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집에 다녀오는중에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이 지나가다가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남편은 버스에 다리를 갈려 다리를 잘라야 하고 딸은 유방암 수술을 해야 하고 손자는 위수술을 해야 합니다. 어찌 될지도 모르고 집이 가난하여 세 사람을 수술할 돈도 하나도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일이 한꺼번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찌 하면 좋습니까?" 그 말을 들은 동네 사람은 "나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당신을 도와줄 수 있겠네요. 지금 교회를 가는 중인데 당신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겠습니다. 함께 교회가서 기도하지 않겠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교회를 따라갔습니다.  목사님은 카작의 여러 도시에 있는 교회에 전화를 해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습니다. 주일에는 수술하지 않는데 상황이 급해 다리 수술 일정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주일 아침에 감각이 없던 다리가 뜨거워졌습니다. 누가 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수술 준비를 하러 들어온 간호사에게 "내 다리가 이상한데 보시오."했더니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가 의사를 불러왔습니다. 의사가 깜짝 놀라며 기적이 일어났다고 썩던 다리가 회복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수술하지 않고 아무 이상없이 회복되어 퇴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도 손자도 수술없이 건강이 회복되어 일주일만에 퇴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자녀들을 열심히 예수를 믿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자녀들이 달라진 것을 보았습니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순종적이고 진심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그는 아내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는 것을 보고 다그쳤습니다. "네가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것 아니냐? 연애편지를 쓰는 것 아니냐?" 아내는 지금까지의 일을 상세히 말하며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자신은 지금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슬람의 이맘이 될 사람인데 네가 기독교인이 되면 안돼. 당장 그만둬." 그리고 성경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2년동안 무섭게 박해했습니다. 아령으로 내리쳐서 팔이 부러지기도 했고 다리미를 던져서 머리가 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일하던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그들은 더 강하게 핍박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는 휘발유 한 통과 술 한 병을 사들고 집에 왔습니다. 술을 반 병쯤 마셨을 때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아내의 몸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성냥을 들고 위협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불에 태우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냥을 그어 던졌습니다. 그런데 성냥이 부러지며 불이 없는 쪽은 아내에게 불붙은 쪽은 반대로 날아갔습니다. 순간 아들이 달려와 그를 안고 울부짖었습니다. "엄마를 죽이고 아버지가 감옥에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아들이 차라리 교회당을 태워버리겠다고 기름통을 들고 나가려는 것을 아내가 가로막고 말했습니다. "차라리 나를 태워라. 교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순간 아내의 눈을 보니 그렇게 평안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괴로와 울었습니다. 

아침에 아내 들어와 그를 붙잡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말하셨어요. '네가 승리했다. 네 남편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여보 함께 교회갑시다." "내가 어떻게 교회를 가냐? 하나님을 향해 나쁜 욕을 했고 예수 믿는다고 당신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데."  "예수님은 벌써 다 용서하셨어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세요." 그는 교회에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예수르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과 그 사랑을 본받아 자신을 내어주는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있기에 세상은 밝아지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기적을 일으킬 때입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아픔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은 다 감수하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사랑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주인공으로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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