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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또 하나의 현실을 보다 (행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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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현실을 보다 (행 18:1~11)
  

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경치 좋은 산 아래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의 입구에는 거대한 바위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마을이 들어서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 후 거기 마을이 생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바위를 쳐다만 보았을 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나그네가 그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나그네는 먼데서 바위를 바라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그네의 눈에는 바위가 바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는 거대한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흥분하여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저 바위를 맡겨 주십시오. 제가 호랑이를 만들겠습니다. 제 눈에는 바위가 호랑이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습니다. <저 바위가 어떻게 호랑이로 보인다는 말이요? 그리고 당신이 무슨 수로 바위를 호랑이로 만든다는 말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러나 결국 마을 사람들은 허락했고, 나그네는 망치와 정을 가지고 바위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밤낮 매달려 돌을 쪼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는 동안 바위는 서서히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해갔습니다. 드디어 산을 향해 고개를 들고 달려가는 호랑이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기가 막힌 조각상이 완성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나그네는 유명한 조각가였습니다.

동네 사람 모두가 흥분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위를 보아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바위를 호랑이로 조각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그런 눈이 없다면 어떻게 조각가가 되었겠습니까?> 평범한 사람과 조각가의 차이는 <사물을 보는 눈의 차이>였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바위를 바위로 보는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바위를 호랑이로 보는 사람>입니다. 바위를 바위로 보는 사람들을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그것은 바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위를 보고 <이것은 호랑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비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는 비현실적인 사람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을 보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눈앞에 있는 바위입니다. 또 하나는 바위 속에 있는 호랑이입니다. 눈앞에 있는 바위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바위 속에 있는 호랑이도 또 하나의 현실입니다. 눈앞에 있는 바위는 <오늘>입니다. 그러나 바위 속에 있는 호랑이는 <내일>입니다.

삶은 언제나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그대는 두 개의 현실 중에서 어떤 현실을 보는가? 눈앞의 현실인가? 아니면 현실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현실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인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인가? 오늘의 모습인가? 아니면 내일의 모습인가?> 성도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에게도 두 개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부딪힌 눈앞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현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현실은 매우 힘든 현실이었습니다. 우선 바울의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바울은 아테네(아덴)에 있었습니다. 아테네에서 바울은 많은 철학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그들과 철학적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상대방의 지적 호기심은 자극하였지만, 그들을 주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별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아테네에는 교회가 세워지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우 좌절된 모습으로 고린도에 도착했습니다. 

둘째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고린도라는 도시 자체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고린도는 한창 때의 인구가 60만 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로는 최대 규모의 도시였습니다. 본래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 장군인 <루이우스 뭄미우스>에게 패전하여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 후 무려 100여 년이 지난 주전 44년이 되었을 때, 그 유명한 <율리우스 시이저>가 고린도를 재건하였고, 퇴역 군인들을 중심으로 다시 화려한 로마식 도시로 가꾸었습니다. 고린도에는 로마 풍의 사치스런 삶이 가득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세속적 삶과 맞서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고린도는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높이 575미터의 산이 있는데, 산의 정상에는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신전에는 무려 1,000명에 달하는 여성 사제들이 있었는데, 이 여인들은 신전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로 종교적 매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고린도 출신>이라고 하면 <방탕하고 음란한 사람들>이란 의미로 쓰일 정도였습니다. 

방탕한 사람들, 음란한 사람들, 세속의 쾌락에 젖을 대로 젖은 사람들, 이들은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과연 이런 도시에 누가 복음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암담했습니다. 이게 고린도의 현실이었습니다.   

또 고린도의 유대인들도 바울에게는 엄청난 적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자 유대인들이 그에게 저항했습니다. 본문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본래 가는 곳마다 많은 적을 만나곤 했습니다. 한번도 쉽게 복음을 전한 도시가 없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제일 먼저 방해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는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옷을 턴다는 것은 완전한 포기와 저주를 말합니다. 상대방을 옷의 먼지처럼 취급하는 심한 표현입니다. 그가 그토록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두 번뿐입니다. 한 번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발에 먼지를 턴 경우이고, 또 하나가 본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처럼 극단적 반응을 보일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현실이었습니다. 너무도 어려웠습니다. 힘들었습니다. 고린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교회를 세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실로 암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마다 다 힘들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가장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긴 머리의 한 여인이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단정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뒷자리의 여인이 불평을 했습니다. 난 왜 이렇게 뚱뚱하고 못났을까? 그러나 그녀의 불평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얼마 후 앞의 여인이 내리려고 일어났을 때 보니,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뒷자리의 여인은 불평한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힘들지도 않으면서 습관적으로 힘든 것처럼 말해 왔다면 우리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분들이 있습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누가 보아도 힘든 이들이 있습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현실 때문에 절망하는 이들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이런 현실이 아닌, 또 하나의 현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도 또 하나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그 현실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본문 9절과 10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눈앞의 현실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십니다. 이게 바울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현실이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바위를 호랑이로 바꾼 예술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기 두 개의 현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위요, 다른 하나는 바위 속에 있는 호랑이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두 개의 현실 사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너무도 악하고 타락한 고린도입니다. 거기 하나님의 백성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의 현실은 비록 타락한 도시이지만, 거기 하나님의 백성이 많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보는 현실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 현실 사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현실을 따라 살아야 할까요?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도록 합시다. 그의 태도를 간단히 보여주는 말씀이 11절에 나옵니다.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만약 바울이 <고린도에는 그리스도인이 없을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여기서는 힘들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고린도를 금방 떠났을 것입니다. 눈앞이 현실에 따라 살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오래 머문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에베소에서 3년을 머문 것 외에는 고린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볼 때 가장 절망적인 도시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희망 없는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 당신의 백성이 많다고 하시니, 나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현실을 따라 살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을 보지 않고 감춰진 현실을 보는 사람, 오늘의 현실을 보지 않고 내일의 현실을 보는 사람을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현실 분석에 입각하여 살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삽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성령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땅 끝까지 가서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그 출발점이 예루살렘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최악의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빌라도의 세력, 헤롯의 세력, 대제사장들의 세력, 백성의 장로들의 세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루살렘에는 연고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북쪽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리했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현실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최악의 현실이 거룩한 역사의 출발지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최악의 현실로 보는 것은 사람의 판단인 반면, 그 곳이 위대한 복음의 출발지, 최초의 교회가 세워질 곳이라는 것은 우리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헌신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고 했는데, 그들은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자, 최악의 현실인 예루살렘이 최선의 현실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눈앞의 예루살렘을 보지 않고, 그 안에 감춰진 또 하나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바로 성령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숨겨진 현실을 보면서 삽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거울에 비친 오늘의 여러분을 보지 마십시오. 내일의 여러분이라는 또 하나의 현실을 보십시오. 오늘의 자녀들의 모습을 보지 마시고, 그 자녀들 속에 숨겨진 내일의 모습을 보십시오. 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에게 나타나 격려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격려해 주시길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 모두 오늘을 말하지 말고, 내일을 말하는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행동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으므로, 바울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힘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일 년 육 개월을 머문 것은 새로운 현실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여러분, 일어서십시오.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주어진 현실에 대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러면서 늘 마음으로 또 하나의 현실, 축복으로 주실 미래의 현실을 바라보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가 위치한 곳은 힘든 현실입니다. 인구도 줄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앞의 현실을 보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감춰진 현실, 미래의 이곳을를 보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과 부산에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의 현실을 보지 마십시오.  좋은 교회는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눈물과 땀으로 가꾸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도망치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의 믿음의 눈으로 교회의 미래를 바라보시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또 하나의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살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우선 그는 고린도에서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1절 이하에서 보듯이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바울 평생에 그의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고린도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인 회당장 그리스보가 복음을 믿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자신의 집으로 바울을 초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그가 세운 교회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교회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열매를 주셨던 것입니다. 희망 없어 보이던 고린도에 과연 하나님의 백성이 많았던 것입니다.

또 그는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써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또 12절 이하에서 보는 것처럼 후에 <갈리오>가 고린도 총독일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끌고 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기 갈리오는 세네카라는 유명한 철학자의 형입니다. 갈리오는 유대인의 충동에 넘어가지 않고,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였습니다.  

세상은 또 하나의 현실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습니다. 농부는 얼어붙은 겨울 땅을 보면서도 파종을 위한 준비를 합니다. 이는 그가 겨울의 삭풍을 맞으면서도 봄을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은 백인과 함께 버스도 탈 수 없는 현실을 본 게 아니라, 흑인과 백인이 함께 하는 또 하나의 현실을 보면서 살았고, 오바마가 대통령이 됨으로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 성령의 사람은 현실 너머의 현실을 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천국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이 얼마나 멋진 이야기입니까? 

우리 모두 성령의 사람이 되어, 현실 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살길 원합니다. 모두 힘을 내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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