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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남의 축복 (빌 2: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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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축복 (빌 2:19~24)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저는 오늘 설교를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인생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만남입니다.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를 이룹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팔자가 바뀝니다. 부모와 자식도 만남입니다. 잘못 만나면 평생 속앓이를 해야 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사위와 며느리를 들이는 만남이 있습니다. 
새 식구가 자식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짐을 하나 더 떠안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좋은 동료나 상사 후배를 만나면 직장 생활이 행복합니다. 어떤 때는 월급은 많지 않더라고 동료나 상사가 더 좋은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에서처럼 만리 길 가면서도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남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평생 좋은 만남, 축복된 만남을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자기는 지금부터 자기 배우자를 위해 기도한다는 후배의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쳐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장래의 비전을 위해서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나 기도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부터 그런 기도를 하느냐며 한심해 보여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인생에서 부부의 만남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더 일찍부터 기도해도 좋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쯤이면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도록 꼭 기도를 합니다.

사실 어린시절에는 새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기대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게 될까,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 싫은 친구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맘에 드는 친구는 함께 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리고 젊었던 시절은 여러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격이나 생활환경 가치관이 다른 다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이제 새로운 만남이라는 것이 흔치 않아졌습니다. 교제권이 뻔합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더욱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하려고 해도 주변에 전도해야 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깊은 만남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없을 뿐더라 자기라는 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시작하고 나서는 저에게는 다시 기대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보내셔서 또 어떤 만남을 갖게 하실 지에 대한 기대입니다. 만남은 힘들지만 거부하지는 마십시오. 만남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풍요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남은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러 나갔다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고 그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재수 없이 한 죄인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만남이 구레네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 마태 마가 누가 등 모든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결정적 만남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의 만남이 결정적이었지요.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친구와의 만남입니다. 이 친구는 대학교 동창입니다. 같은 학과를 다녔는데 지금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80년대 대학이 얼마나 시끄러웠습니까? 그때 막 반미 구호가 대학가에 등장할 때였는데 이 친구가 반미 구호를 외치며 건물 옥상에서 분신을 했습니다. 대학시절에 이 친구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같이 과 크리스찬 예배를 드리기도 했지만 신앙 노선이 달라 깊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죽기 바로 전날 밤에 꿈을 꾸었습니다. 이 친구가 옥상 난간에서 무어라고 외치는 꿈이었습니다. 그때 생각이 위험한데 왜 아무도 안 말리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깨었는데 그 날 오후에 분신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또 한 명의 신앙의 친구와 함께 몇 시간 동안 그 친구가 누운 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살려달라고” 그때 신앙으로는 꼭 살아날 것만 같았는데 그 친구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제 삶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도 자신의 이념을 위해서 이렇게 목숨을 버리는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영원한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면 그 친구와의 만남으로 저는 이웃에 대해서 눈이 뜨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회운동과 교회 개혁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금 제가 목회자가 된 것도 이 친구와의 만남이 결정적 요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제가 나태해질 때면 이때가 가끔 생각이 나서 정신을 차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만남, 그것이 우연이든 전혀 예상치 않았던 만남이든,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든지 만남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만남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슨 축복을 그 뒤에 예비해 놓고 계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

사도 바울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저는 2차 선교 여행에서 디모데와의 만남이라 생각합니다. 소아시아의 루스드라라는 곳을 지나다가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 이후 디모데는 쭉 바울 곁을 지켰습니다. 디모데는 바울 서신 6개에서 공동저자로 나옵니다. 오늘 말씀 22절에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하여 디모데를 아들이라 부릅니다. 디모데전서 1장 2절에서도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 하여 역시 아들이라 부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신앙 안에서 낳은 아들이었고, 아들처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가장 신뢰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 20절에서는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하여 디모데에 대한 신뢰를 표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17절에서는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라 하여 오늘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려 하는 것처럼 고린도교회에서도 디모데를 파송하였습니다. 바울이 갈 수 없었을 때 데살로니가 교회에도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하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편에서 바울에 대해서 대변해 줄 사람이 디모데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최후의 서신으로 추정되는 성경이 디모데후서입니다. 로마의 감옥에서 쓸쓸히 죽음을 준비하고 있던 바울에게 가장 필요했던 사람이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하면서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9),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딤후4:21)고 요청합니다. 디모데는 바울 인생의 최후 순간 간절히 보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선교사역을 다 마치지 못했지만 그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디모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에서 노래하는 만리 길 가면서 모든 것을 맡기고 갈 만한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현재 바울이 감옥에 있지만 기뻐하는 이유는 그 곁에 디모데가 있고 또 멀리는 자기를 생각해 주는 빌립보교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생각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그려집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좋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만 가지고 안 됩니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이미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셨던 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에덴동산에는 하나님도 계시고, 물질도 풍성하고, 할 일도 있었지만 아담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짝이 없거나, 함께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가정이 그런 행복한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직장도 마음을 같이 할 동료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위에는 이미 수많은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만남이 깊고 풍성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만남이 어떻게 하면 그런 깊은 만남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에서 그 비결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뜻을 같이하는’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20절입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는 이유는 바울처럼 빌립보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애쓰는 사람이 디모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기 일을 구하는 데 바쁘지만 디모데만은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처럼 빌립보교인들을 향하여 자기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사람이 디모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만남이 행복한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뜻이 같아야 됩니다. 뜻이 다른 사람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고 만남이 깊어질 수도 없습니다. 한 배를 타고 있지만 남남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는 부부가 서로 성격이 다르고 취향도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 됨입니다. 내성적이고 외향적이고, 소박하고 사치스럽고, 친절하거나 퉁명스럽거나 이런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같고 가치관은 같아야 합니다.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같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서로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한 사람이 원하는 삶이나 목표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되도록 맞추어가야 합니다. 여자는 주로 자녀 양육이나 가정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남자는 일이나 사업, 무언가 세상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 맞추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부부지만 진정 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친구이자 인생의 동지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누고 선교하는 교회의 본질은 모두 같지만 각 교회마다 처한 형편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다릅니다. 어느 교회는 사회봉사로 바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부흥하고 전도하는 데 바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성령의 은사와 기도로 바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훈련과 나눔으로 바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서로 맞추어 가고 뜻을 같이 할 때 깊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팔짱 끼고 있거나 방관자가 되어서는 그 만남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만남입니다.

깊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고생을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22절입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 연단이라는 것은 ‘시험을 견디어 냄’을 의미합니다. 22절 후반절에서는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수고가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보다 복음을 전할 때 쏟아지는 모든 수고와 핍박을 견딘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경험했던 핍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는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디모데는 바울과 많은 시간을 같이 했습니다. 바울이 고난 받을 때 디모데 또한 같은 고난을 겪었을 것으로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한 것은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고난을 함께 겪었고, 그 고난을 이겨내고 충실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을 빌립보 교회가 지켜보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람 사이의 정도 함께 고생을 같이 할 때 깊어집니다. 전우애, 동지애 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고생을 같이 하다가 정이 들고 그래서 형성되는 것이 전우애요 동지애입니다. 부부도 함께 고생할 때 정이 듭니다. 저희 부부는 개척교회 하면서 많이 정이 들었습니다. 교회 개척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향하여 새벽부터 깨어 함께 수고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함께 낙심하고, 좋은 일 있을 때 함께 기뻐하다 만남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따로따로 고생하지 말고 부부는 함께 고생해야 합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어담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강태공의 일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강태공이 주 무왕에 의해 등용이 되기 전에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강태공은 집안이 가난해도 돈을 벌어올 생각은 안하고 낚시질만 하였습니다. 낚시도 바늘도 끼지 않은 채 세월만 낚는, 그 아내가 보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남편이었습니다. 그 가난을 견디다 못한 강태공의 아내가 남편만 남겨두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다 그 후 강태공은 주 무왕에게 발탁이 되어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그 대가로 큰 땅을 하사받아 가는 길이었는데 그 아내가 그 도중에 나타나 다시 재결합하자고 요청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강태공이 그릇에 물을 떠오라고 합니다. 물을 떠오자 그 물을 땅에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그 물을 다시 담으라고 합니다. 담을 수가 없지요. 조금만 더 견뎠더라면 낙을 누릴 수 있지만 고생을 회피하다 그 축복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고생을 같이 해야 정이 들고 만남이 깊어집니다. 교회도 같이 고생해야 정이 듭니다. 여러분은 작은 교회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고생할 조건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함께 고생한다면 정도 들고 평생 잊지 못할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고생하기 싫어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보고 있다면 영원한 손님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제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가 여러분을 너무 편하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좀 같이 고생하도록 요청하고 그런 일을 주어야 정도 깊어지는데 그것을 못하는 것이 제 한계입니다. 고생을 나누어야 진정한 동역자가 됩니다.  

셋째는 ‘속히 가기를 바라는’ 만남입니다. 

만남은 자주 만날 때 깊어집니다. 19절입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23절과 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기를 바라고 자신이 갈 수 없으니 대신 디모데라도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것도 속히 보내기를 바랍니다. 슬픈 일 있을 때 찾아가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찾아가고, 즐거움도 나누고 하며 인간의 정이 깊어지는 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바울 서신서를 읽다보면 이런 바울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달려가고 싶은 것이 바울의 마음인데 형편이 허락하지 않아 보낸 것이 바로 편지입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그러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고전4:19) 라고 소망을 피력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문제가 생기자 그곳에도 부지런히 가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7-18)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서도 그렇고(갈4:20) 로마 교회를 향하여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롬1:11)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롬1:13)

사랑은 무어냐 하면 부지런히 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깊은 관계를 맺은 비결은 부지런히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슬프거나 기쁘거나 부지런히 찾아가 함께 있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만남의 비결입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책으로 읽거나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직접 그 땅을 밟고 그 땅의 냄새를 맡을 때 느끼는 경험의 깊이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정이 듭니다.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들은 애경사에 부지런히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도 그 발로 부지런히 찾아오는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교회에 대한 정도 깊어집니다. 현대는 전화로 인터넷으로 자꾸 사람 간의 만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정이 들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찾고 나눌 때 만남은 깊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좋은 만남을 통하여 축복합니다. 만남의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만남의 축복을 주시길 원합니다. 동시에 만남은 자신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축복의 만남이 되기도 하고 무의미한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뜻을 같이 함으로, 어려움을 같이 나눔으로, 함께 시간을 같이 함으로 만남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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