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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막 1: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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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른 사람들 (막 1:14~20)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사도 요한은 ‘어두움’으로 묘사했다. 인류의 역사는 어두움을 벗어나기 위한 고뇌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명의 발달과 산업화가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었는가? 솔로몬 왕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이렇게 증거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평생 땅 따먹기 해도 결국 모두 두고 가는 것이 인생이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죽으면 빈 손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고 슬프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경제 한파 속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든다. 근심과 염려가 없는 세상,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어디인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곳이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장망성과 같은 이 세상에 소망을 불어 넣어주는 메시지로 시작되고 있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비로소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해서 구약시대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세례 요한의 역할은 예수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헤롯대왕의 부도덕한 행동을 책망한 사건으로 인해 헤롯에게 목숨을 잃고 만다. 그는 비록 짧은 30년의 생애를 살았지만 짧고 굵게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한 선지자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길,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신구약시대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은 구약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선포는 새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훼손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한 그 사역이 시작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15절의 말씀이다.

막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은 이 복음 사역에 함께 동참할 사람들을 친히 찾아 나서셨다. 예수께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갈릴리의 어부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이란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을 걸어가시다가 그물을 던지며 고기잡이에 열심히던 두 형제를 부르셨다.

막 1:17.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 두 사람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좀 더 가시다가 역시 해변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깁던 두 젊은이들을 보셨다. 그들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을 부르시자 그들도 앞의 두 사람들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주님의 부르심에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따라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왜 그들을 부르셨는가? 
17절의 말씀에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제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년 전에,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예수님을 만났었고,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기 형 베드로에게 소개해서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자기의 생업을 포기하고 갈만한 때가 아니었다. 예수를 만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갈릴리 호수를 생업의 터로 삼고 열심히 그물 던지는 일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때가 찼을 때..’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우리는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1.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 직접 선택하여 부르신다.

세상의 기업들은 유능한 인재를 찾기 위해 혈안이다. 그것은 회사의 경쟁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인재를 유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다르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지역의 영재들을 선발하지 않으셨다. 그 지역의 유력한 인사도 아니었다. 예수께서 부르신 자들은 고기잡이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어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별로 유식하지도 못한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셨을까? 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까? 사도 바울의 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적으로 유명하지 못하고 유식하지 못해도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즐겨 등용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지난 수요일 어머니기도회 초청 강사로 류태영 박사가 오셨다. 투박하고 서민적인 외모에 특별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산골에서 토끼와 발맞추며 뛰놀던 소년이었다. 너무 가난해서 18살에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야간학교를 다니며 대학공부를 마쳤다. 어려운 농촌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되었고 건국대 부총장까지 역임했다. 근면 성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면 자신의 생업에 열심히 종사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열심히 그물을 던지고 있었고(16절), 야고보와 요한은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었다(19절). 예수님의 부름은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일에 열심을 다할 때 임하는 것이다. 일상 생활에 충실한 사람,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게 주님의 부름이 임하는 것이다.

2.비천한 그들에게 가장 거룩한 사명을 부여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7절)’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보통 전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세상 물에 젖어 있는 사람을 건져 내는 일이 쉬운 일인가? 

지난 화요일 합신 총장 이취임식에 참석하고 바로 동탄우리교회를 방문했다. 김목사님 부부가 많이 지쳐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그 지역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젖어 있어서 복음을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겨우 전도해서 양육해 놓으면 교회가 작다고 부담스럽다고 떠난다는 것이다.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위로해 주었다. 

베드로 역시 오순절 성령강림 전에는 소극적인 전도자에 불과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 다른 친구들과 역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역시 헛수고였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고 오순절날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설교할 때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때 베드로와 함께 했던 제자들은 처음 부름을 받던 날 주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을 것이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육신의 삶을 위해 그물을 던지든 사람들을 불려내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 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동역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아무리 비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면 가장 소중한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일은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가 존경받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더 위대한 일은 영혼을 살려내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이다.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내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주의 손에 붙잡히게 되면 삶의 목적이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쓰시기를 원하신다. 

3.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를 쓰신다.

오늘 본문에서 부름을 받은 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주의 부르심에 지체하지 않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막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막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물은 그들의 중요한 생업의 수단이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야고보와 요한은 한 술 더 떠서 아버지와 품꾼들까지 버려 두고 나왔다. 아버지하고 상의하지 않았다. 친구들하고 상의하지도 않았다. 주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따라 나선 두 사람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주 작은 일에도 망설이고 고민하게 된다. ‘시간 좀 주세요. 기도해 보고요 등등..’ 
제자들의 사역은 미미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는 오합지졸 패잔병 같이 주님을 버리고 배신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충만히 임하셨을 때 비로소 사람 낚는 어부로서 그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갈릴리 어촌에서 한 모퉁이에서 이뤄진 작은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밀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과 같이 오대양 육대주를 넘나들면서 확산되어져 갔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일이다. 그런데 제자 삼는 일이 쉽지 않다.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의 설교집에서 본 내용이다. 7-8년 전 교회당 이전 입당 선교축제에 대한 평가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생각보다 열매가 적었던 이유에 대해 한 스텝이 쓴 소리를 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난 4년 반 동안 사람 모으는 일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거는 제자들을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닙니까?’

그 말에 상당히 불쾌했다고 한다. 다음날 새벽 두시 반에 깨어나서 그 스텝의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한다. ‘우리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정말 목숨을 걸 수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 복음만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며 내 인생을 바꾸어 준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다고 고백한다면, 그 복음을 위해 목숨을 던질 있는 교인이 얼마나 될까?’ 

그 이튿날에도 똑 같은 시간에 다시 스텝의 말이 생각나면서 괴로웠다고 한다. 그때 마음 속에 들려오는 음성, ‘제자를 만들어라’ ‘나의 제자를 만들어라’ 마음에 결심한 후에야 평안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님의 부르심에 ‘쥐고 있던 것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제자들이 얼마나 될까? 주의 복음을 위해 정말 자신의 모든 것 포기하고 주를 따를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주님을 머리가 좋고 학력이 좋은 사람만 제자로 삼지 않으신다. 바쁘지 않고 한가한 사람을 원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 내려 놓고 포기하고 따를 사람들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 어두움의 세상을 밝히며 소망을 줄 수 있는 제자들이 필요하다. 적당히 헌신하는 것은 헌신이 아니다. 이 땅에 복음으로 변화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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