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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교제 (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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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교제 (몬 1:6)

(몬 1: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교회의 본질을 성도의 교제라 합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할때도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하는 축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하는 말씀에 따릅니다.

여기 ‘교통’(코이노니아’(Koinonia)이란 말이 은혜와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쓰였습니다.
이 교통(코이노니아)이라는 단어는 ‘은혜’, ‘사랑’과 함께 성경의 세 가지 기본적인 말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교회라는 한문 글자도 가르칠 교(敎)가 아니라 사귈 교(交)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강원도 예수원 대천덕신부) 이 주장이 옳든지, 옳지 않든지 간에 아무튼지 사람들은 교제(교통-코이노니아)는 중요합니다

교제는 가족과 관계됩니다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가 조그만 오두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를 본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작은 오두막을 무엇에 쓰시려고 짓고 계십니까?" 그 때 소크라테스가 대답했습니다. 
"이 작은 집 안에 진실한 우정을 나눌 친구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소원이 없겠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인생이란 누군가와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사는 것임을 가르쳐 주고자 했습니다. 이 인생의 오두막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그 사람들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불행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은 작은 오두막 속에 그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작은 오두막 속에 정말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두막 속에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면 우리 인생은 정말로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혼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군가와 함께 믿으며 함께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소크라테스 말처럼 우리네 신앙생활도 하나의 오두막 생활입니다. 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속에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더불어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생활이라는 오두막 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괴롭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가족끼리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핵 가족이 되며 가족간에 교제가 멀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핵가족 유머가 있습니다.

<김정일이 죽었다 깨나도 서울에 올 수 없는 5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1)서울에는 총알 택시가 너무 많다. 2)서울에는 골목마다 대포집이 있다. 3)남자들은 폭탄주를 마신다.
4)서울에는 비행 청소년이 너무 많다. 5)서울은 거의가 핵가족이다.(월간 조선에 발표된 글)

핵무기로 무장된 핵가족? 무시 무시 하지요? 그래서 김정일이 미사일 발사 한다고 하 는때에 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위로 받는 것은 좋겠지만 핵 가족인 우리네 삶은 날로 삭막해 지고 있습니다. 가족간에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져야 힙니다. 

교제는 사회와 관계됩니다

게리 스멜리(Gary Smalley)와 잔 트렌트(John Trent)가 공동으로 쓴 인간의 숨겨진 가치(The Hidden Value of a Man)라는 책에서 두 사람은 인간은 일생 동안 두 개의 칼을 휘두르며 산다고 주장한다 합니다. 첫 번째 칼은 은으로 된 칼로써 법이나 사회적 신분, 직책, 혹은 학위 등등에 기초한 힘이나 권위의 칼입니다. 두 번째 칼은 황금으로 된 칼로써 내면의 인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비와 사랑, 친절, 온유, 등등의 덕성의 칼입니다. 은칼과 황금의 칼이 모두 우리 인생에 필요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은칼만 무자비하게 휘두른다는데 있습니다. 은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때문에 사회적인 교제가 깨집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의 2000년 5월에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에 대해 소개한 내용이라 합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윌 헌팅이라는 청년입니다. 그가 보스턴 빈민가에서 건달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는 폭행을 일삼는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반항하는 반항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학자들도 풀기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고, 해박한 역사지식으로 하버드 대학생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삐딱한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메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중, 수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낸 노벨상 수상자나 풀만한 복잡한 수학 문제를 단숨에 풀어내면서 수학과 교수 램에게 발견되었습니다. 램교수는 윌에게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의 거친 성격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램보 교수는 절친한 친구사이인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에게 윌을 부탁합니다. 숀 교수는 윌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주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윌은 따뜻하게 대하는 숀 교수의 손길을 통해 마음을 열었고, 어렸을 때에 의붓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폭행을 일삼는 건달에서 미래를 향해 달리는 청년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사회적인 교제속에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됨을 상각하게 합니다
  

교제는 교회와 관계 됩니다

로버트 뱅크스 부부가 쓴 "교회,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책에 보면 종교개혁 시대의 한 침례교인이 노래한 가정교회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합니다

. "우리가 모이고 있는 이곳은 어떤 곳인가?/그저 하나의 집일뿐, 바닥은 흙/사람들을 보호하는 벽과 지붕/빛이 들어오는 창문, 열린문/하지만 우리 여기 모일 때/이 집은 살아있는 하나의 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이 가까이 계심을 아네/저 멀리서부터 오는 말씀과 떨어지는 별들/우리 안에 씨처럼 뿌려진 열정의 불꽃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예부터 전해온 하나님의 이름들/그리고 꿈과 징조와 표적들/이곳에서 우리는 이미 들은 것을 또다시 기억하고 또다시 이야기한다네/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그리고 그분의 식탁에서/우리는 떡을 받는다네/그 떡을 나누어 먹으며/살아있는 표적을 본다네/이 세상에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서로가 서로에게 떡과 포도주라네/우리는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전파해야 할 사람들/바로 여기 이곳에서 그 정의와 평화를 받는다네. 
  
초대교회에서 이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 성경이 말씀합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 교제(코이노니아)란 사도들의 교제가 아니라 성도간의 교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도의 가르침과 성도간의 교제가 동일한 비중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배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어서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들은 후에 그 말씀을 통해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한 삶의 나눔이 곧 교제 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교제에는 음식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준비도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한 가족처럼 더불어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힘썼다고 했는데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말씀을 들은 후, 음식과 함께 대화를 하며 교제를 했습니다. 아마 그 동안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간의 기도제목을 나누었을 것이고  그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인양 생각으로 기도로 교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는 하나님과 관계 됩니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하나님과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에 기초한 용서에서 비롯됩니다
용서라는 영어 "Forgive"를 가지고 용서하는 방법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첫째로, "Forbear(참으라)"입니다. 속상하다고 해서 화풀이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참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을 주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가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수 있는 용서의 첫 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용서는 참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Forget(잊으라)"입니다. 나의 오네시모가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하고 손해를 끼쳤다 할지라도 과감히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너라." 아들이 가더니 빈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그냥 오느냐?" "예, 빌려주지 않던데요."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 일 뒤에 그 집에서 호미를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호미를 가져다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항의를 했습니다. "아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에게 빌려주지 않았는데 우리는 왜 그들에게 빌려줍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애야!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빌려준다'라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그것은 증오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빌려주었든지 빌려주지 않았든지 지난 것은 잊어버리고 지금 그 집에서 필요하니까 빌려주는 것이 용서요, 사랑이다. 그러니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살아라."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갑니까?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증오의 마음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용서와 사랑의 정신으로 살아갑시다.

셋째로, "Forever(영원히)"입니다. 영원토록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서 말끔히 잊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잘못을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만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용서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게 잊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일 1:6-7]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용서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다윗도 침상이 뜨도록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베드로도 닭이 울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심한 통곡으로 회개 하였습니다
용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천국표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앨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차장이 열차 안 곳곳을 돌면서 차표에 구멍을 뚫어 표 검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 차례가 되었을 때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봐도 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장은 아인슈타인이 위대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표는 볼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인 것을 잘 압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정직한 분인 것도 안답니다. 차표 안 보여주셔도 괜찮습니다." 

몇 분이 지난 뒤 차장이 표 검사를 마치고 아인슈타인 곁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도 아인슈타인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좌석 밑을 뒤지며 열심히 잃어버린 표를 찾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안쓰럽게 생각한 차장은 다시 "아인슈타인 선생님, 차표 때문에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선생님 표는 제가 검사 안해도 됩니다." 하면서 만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꼭 잃어버린 표를 찾아야만 한다고 고집을 세웠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차장이 "왜 꼭 차표를 찾으셔야만 하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인즉, 
"내가 이 표를 찾지 못하면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의 기차표는 잃어 버릴 수 있을 지 모르나 우리에게 주신 표는 심령에 새겨준 것이어서 결코 잃을 수 없습니다  

(고전 1: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바울은 신실하여 많은 성도들에게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는 빌레몬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빌레몬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였던 것은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한다고 진술하며,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주인인 빌레몬에게서 주인을 떠나 도망하였으므로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용서하고 자신을 위해 다시 돌려보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가 도망쳤다가 잡히게 되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고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만약 그를 살려주더라도 그 이마에 화롯불을 가지고 "F"자를 크게 새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라는 라틴말(Fugitivus)의 첫 글자입니다. 영어의 "Fugitive"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그와 같이 가혹한 처벌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의 가족들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이 그를 받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성도는 빌레몬과 같이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감사를 주는 복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가능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문제를 놓고 부탁할 때 바울은 그의 순종을 확신하였는데  이는 그의 믿음으로 교제하는 신앙의 독실함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되 믿음으로 교제 하며 영광돌리고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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