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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욥 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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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욥 2:11~13)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꿀벌형’ 인간입니다. 이 사람은 열심히 꿀을 따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줍니다. 둘은 ‘개미형’ 인간입니다. 이 사람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무관합니다.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유익을 끼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만을 위해서 삽니다. 셋은 ‘거미형’인간입니다. 이 사람은 함정을 파놓고 숨어서 때를 기다립니다. 남에게 해를 가하고 고통을 줍니다.

위로도 세 종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꿀벌형 위로’입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가서 큰 위로를 줍니다. 둘은 ‘개미형 위로’입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위로했다는 자기만족만 있을 뿐입니다. 셋은 ‘거미형 위로’입니다. 위로하기 위해 찾아가서는 오히려 큰 고통만 안기고 돌아옵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위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위로했다는 자기만족을 얻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위로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정한 위로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위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난 당하고 있는 욥을 친구들이 찾아가 위로하는 이야기입니다.

욥기는 욥의 두 차례 고난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우선 욥 1:13-19를 보면 욥은 갑작스런 재난을 겪게 됩니다. 강도를 두 차례 만나고 또 두 차례 천재지변을 겪으면서 자식들과 재산을 모두 잃었습니다. 다음으로 욥 2:1-10을 보면 극심한 질병으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온 몸에 종기가 나는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나병의 일종인 상피병을 앓게 됩니다. 게다가 견디기 힘든 질병 중에 아내마저 욥을 저주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욥 2:11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이 이런 모진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들이 세 친구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이들은 정말 멀리서 왔습니다. 데만은 남부 아라비아 사막 지대의 한 성읍이고, 수아는 북아라비아 동부 지역의 성읍이고, 그리고 나아마는 아라비아의 북서쪽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욥이 살던 우스 땅과는 적어도 수백 키로는 떨어진 곳에서 왔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들이 서로 약속하고 왔다는 점입니다. 자기들끼리 막역한 우정을 이어온 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한다고 하자 자기들끼리 긴밀히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리고 그 먼 거리를 마다 않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욥을 찾아온 것입니다.

저들이 찾아온 것은 그 자체로 욥에게는 큰 위로가 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욥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욥과 대화를 나누면서 저들은 오히려 위로 대신 큰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욥기를 큰 틀에서 볼 때 욥은 이 세 친구와 3차례 논쟁을 벌입니다. 세 친구가 차례로 욥에게 논쟁을 걸어옵니다. 욥이 일일이 답변합니다. 그러기를 세 차례, 욥은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저들은 위로하러왔다가 오히려 더 큰 고통만 안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욥 19:19-22를 보면 욥이 세 친구들과 논쟁 중 너무 고통스러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박해하느냐 내 살로도 부족하냐” 

결국 욥의 세 친구는 처음에는 꿀벌형 위로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거미형 위로로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어떻게 위로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꿀벌형 위로를 초지일관 행할 수 있을 것인가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1. 공감대를 형성하라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와서 처음 보인 반응입니다. 욥이 몰라볼 정도로 참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며 울었다는 것입니다.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도의 슬픔을 나타낼 때 보인 태도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처음 욥을 만나서 보인 태도는 함께 울고 함께 슬픔을 나눈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눈 것입니다. 욥의 마음을 공감하고 그 마음을 어루만져 준 것입니다. 욥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그 마음이 충격을 받습니다. 마음이 짓눌려 무겁고, 슬퍼 힘이 들고,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우리 몸이 충격을 받으면 멍이 들거나, 피가 나거나, 상처가 생기는 것처럼 마음도 상처투성이가 됩니다. 

이 때 그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마음을 공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로써 그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위로가 시작됩니다.

가슴이 답답하다든지 자주 그리고 오래 배가 아파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아무리 검사를 해 봐도 다 정상이어서 원인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증상 때문에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며느리가 병원을 찾았습니다. 바로 며느리가 이런 환자였습니다. 시어머니는 마치 자기가 환자인 것처럼 며느리 증상에 대해 길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병원에서 이런 저런 검사를 다 받아봤는데 아무 이상이 없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답니다. 그러면서 며느리가 워낙 예민해서 그런 것 같다고 며느리 탓을 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환자와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잠깐 나가 계시라고 시어머니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말을 꺼냈습니다. “시집살이가 힘드시죠? 저런 시어머니와 사시느라 숨이 막히시겠어요!” 그 말을 듣자 며느리는 눈시울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공감의 힘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공감적 이해”(empathic understanding)라고 부릅니다. 마음이 힘들고 지치고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공감해 주는 것은 마치 천국을 선물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요 11:33-35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셔서 먼저 우리 마음을 어루 만져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알아주시고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우십니다. 바로 공감대를 형성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로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이 힘들고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2. 곁에 있으라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밤낮 7일 동안을 땅 바닥에 앉아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고통도 극심해서 잠을 청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몸까지 아픕니다. 온 몸이 가렵고 이곳저곳에서 진물이 납니다. 통증도 가시지를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 모진 고통과 싸웁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다 죽었습니다. 종들도 죽었습니다. 욥을 시중들 사람이 없습니다. 곁에 있던 아내는 오히려 욥을 저주합니다. 욥은 이토록 극심한 고통 중인데 철저히 홀로 남겨졌습니다. 혼자서 그 고통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때 욥의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슬픔을 나누며 마음을 어루 만져주었습니다. 그리고 욥이 가장 힘이 들 때 무려 7일 밤낮을 그 곁을 지켰습니다. 욥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요?

사람이 고난 당할 때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다면 그 고난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옵니다. 외로움이라는 고난 못지 않은 무거운 짐이 더 얹혀지기 때문입니다. 

한 교우가 했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목사님! 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통증이 견딜 수 없이 심해 옵니다. 너무 아파서 울었습니다. 그런데 통증이 진정이 되자 더 큰 마음의 고통이 다가옵니다. 이렇게 힘들 때 그 누구도 투정부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곁에서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혼자라는 것이 너무 서러워 막 울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외로움은 고통을 증폭시킵니다. 그 외로움을 덜어주는 것은 또 다른 큰 위로가 됩니다.

조셉 베일리라는 사람이 쓴 [세 명의 아들을 무덤에 묻고 나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실려 있습니다.

"난 슬픔에 잠겨 앉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내 곁에 와서 신의 섭리에 대해, 그리고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으며 무덤 너머에 어떤 희망이 있는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계속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진실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난 그가 그만 가주기를 바랄 뿐 아무런 감동을 받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자리를 떴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내 곁에 앉았다. 그는 그냥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앉아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말하면 귀 기울여 들어 주고, 간단히 대답하고,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준 다음에 내 곁을 떠났다. 난 그에게서 큰 감동과 위안을 받았다. 난 그가 떠나 는 것이 싫었다."

그렇습니다. 힘들 때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기댈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마 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이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실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 고달픈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 그들 곁에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곁에 있어주는 것 그 자체가 위로가 됩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그 곁을 지켜주십시오. 자주 전화라도 하시고 문자라도 보내시고 가끔은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주십시오.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위로를 전하라

욥기 4장을 보면 말없이 욥의 곁을 지키던 세 친구가 입을 엽니다. 4:1을 보면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8:1을 보면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리고 11:1을 보면 “나아다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라고 되어있습니다. 저들이 차례로 입을 열어 욥에게 나름대로 충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고가 욥에게 위로가 되기보다는 고통을 안겨다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욥이 보인 반응 가운데 하나가 16:1-3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헛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자극을 받아 이같이 대답하는가” 욥이 볼 때 저들이 위로한다고 하는 말들이 오히려 재난이 됐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지금까지는 잘 했습니다. 찾아와 공감대를 형성했고, 말없이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 큰 위로가 됐습니다. 그러나 이제 입을 열어 자기들의 생각을 털어놓으면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별로 큰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자기 딴에는 위로한다고 말하지만 때로는 큰 고통을 안겨 줄 때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성자라 일컬어지는 인도의 썬다싱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썬다싱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중에 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썬다싱에게 인생의 큰 시련을 겪고 있는 어떤 여인을 만나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썬다싱이 생각을 해 보더니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 여자 분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만나면 그것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을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직접 그분을 만나고 싶어하시고 직접 가르쳐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위로에는 사람이 할 몫이 있고, 또 주님께서 하실 몫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하실 몫을 가로챌 때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될 것입니다. 

고후 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로자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친히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눅 7:11 이하를 보면 주님께서 나인성 과부를 위로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죽어 큰 슬픔 중에 있는 과부를 주님께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은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과부의 슬픔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바로 주님의 위로입니다. 사람의 위로는 다만 전주곡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찾아가 곁을 지켜준 연후에는 주님의 위로를 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위로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 위로가 덧나게 됩니다. 그 위로가 오히려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가게 해야 합니다. 위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정말 힘든 시기를 맞고 있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우리가 꿀벌형 위로를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공감대를 형성해 주어 상처 난 마음을 어루만져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곁에 있어서 의지가 되어주고 외롭지 않게 해 주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위로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주님을 바라보게 해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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