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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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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마 5:43~48)


T.V에서 방영된 스피드 게임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한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천생 연분’이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무엇이라 하느냐고 할머니가 두 말할 것도 없이 ‘원수’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다시 ‘두 자 말고 네 자’라고 하니까, 할머니 왈 ‘평생 원수’라고 대답했다는 유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은 평생 원수와 같은 남편, 혹은 평생 원수와 같은 아내와 사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가하면 그 유명한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사모님에게 잡지사 기자가 “목사님과 살면서 혹 이혼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사모님이 대답하기를 “이혼은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죽이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은 없습니까?

어떤 목사님과 스님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이 오고 갔습니다. 스님이 “기독교는 우리 불교보다 저차원의 윤리를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데, 우리 불교에서는 아예 원수도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스님은 일생을 살면서 마음속에 미워하거나 싫어했던 사람이 없으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스님이 ‘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다시 스님에게 “그렇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을 원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현실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우리는 출발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지를 모색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일생을 살면서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죽이고 싶은 원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인정하시고 오늘 본문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 학자 몽테피오레는 본문 말씀을 산상 보훈 중에서 중심이 되며, 가장 유명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43, 44절에 있는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분문 말씀은 기독교 윤리의 극치라고 일컬어지며, 기독교 신앙생활의 절정을 소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동해 복수법에 대하여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수여자이신 주님께서 새롭게 가르쳐주신 이 법은 ‘동해 복수법’이 아닌 바로 ‘사랑의 복수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사랑의 법을 어떻게 보다 완전하게 하셨는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산상보훈은 최고도에 달하고, 모든 철학과 종교 위에 초연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여기에 율법과 선지자를 완성하는 길도 있고,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길도 있습니다. 

먼저 43절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에서 바리새인의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물론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는데, 구약 성경 어느 곳에도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오히려 레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으며, 잠 25:21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시정해주시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까지 심화시키고 승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신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 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되리니’라는 말씀은 1)원수 사랑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고 2)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녀, 참 그리스도인다운 인격을 갖추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인격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인격이 겨우 술 담배 안 하고, 주일 성수 하고, 십일조 생활 하는 정도에서 머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실천 가능한 말씀일까요? 아니면 도저히 실천이 불가능한 말씀일까요? 대답은 물론 실천이 가능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려면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 감정보다 의지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명령사인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느낌이 있느냐 없느냐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곧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주님의 명령이면,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명령에 관해서 소감이 어떠냐?” 라고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물으신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상대방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고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그 감정과 느낌의 원리에 의해 행동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셨어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는 말씀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실천해야지, 감정으로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방긋 방긋 웃는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감정과, 원수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 사람의 감정이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신의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이므로 순종하려는 동기에서 의지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감정이 뒤따라 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며느리를 모질게 구박하는 원수와 같은 시어머니일지라도, 그래서 사랑스런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의지적으로 순종하다보면, 나중에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서, 그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참 잘 돌아가셨다. 아하, 참으로 시원하다’ 그렇게 말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마음에 없는 짓은 하지 못해!”라고 하면서 주님의 명령을 피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아가페 사랑은 감정과 상관없는 의지의 결단에 근거한 사랑이라는 것을 꼭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의 성자인 이엠 바운즈는 기도에 관한 교훈에서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물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기도할 때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축복은, 기도하는 사람 자신이 변화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미움을 해결하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은 기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보기만 하면, 생각하기만 하면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십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관심입니다. 관심은 애정을 낳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참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기도는 놀라운 변화를 내 속에서 일으킵니다.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는,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중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으로 다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자신에게 많은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부터 꼭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의 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인간을 어떻게 대할 것 같습니까? 태양을 비출 때 예수 믿는 사람들 집에만 비추고, 안 믿는 사람들에겐 태양을 비추지 않게 할지도 모릅니다. 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이라면 김정일은 벌써 요절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 우리의 행동을 따라 대하시지 않고 그 분의 놀라운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사랑을 어디에서 나타내셨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그의 놀라운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 가장 위대하게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용서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타난 곳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6. 25 사변 직후 나병 환자 수용소에 미국 로터리 클럽 회원들이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미국에서 파견 나온 간호원 선교사 한 사람이 나병 환자의 고름이 흐르고 있는 상처를 간호하고 있는 뜨거운 인간애의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사진을 찍으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백만 불짜리 가치가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나에게 백만 불을 주어도 이 일은 못할 것이다.” 간호원 자매는 이 사업가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일을 못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사업가는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소?”라고 물었습니다. 자매가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향해 보여주신 조건 없는 그 놀라운 사랑! 나에게 놀라운 죄 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나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나에게 영생을 허락하시고, 지금 내 삶의 길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이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본을 따를 때 원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위대한 선교의 간증을 낳습니다. 우리의 원수를 사랑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놀라운 신앙의 간증이 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 하느냐?” 나와 가까운 관계가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 없는 사람, 성령 없는 사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의 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이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현대의 문명은 계속 발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달하는 첨단 과학도 결코 하지 못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학은 사랑을 만들지 못합니다. 또한 마귀가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는 성경이 소개하는 대로 대단히 능력 있는 존재입니다. 마귀는 기적을 행합니다. 마귀는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마귀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결코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귀가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마귀는 결코 사랑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기에서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최대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만 능력으로 아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앞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네가 메시아이어든 거기서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오셨다면 그 예수님께 더 많은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가 당당히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 예수님 앞에 박수와 환성을 질렀겠습니까?

그러나 십자가에 나타난 위대한 능력은 그런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용서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 놀라운 사랑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영원한 제물로 단번에 드리신,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러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 신앙은 진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는 상급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란 말씀은,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결국 상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위대한 보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반면에 사랑 없이 행하는 어떤 일도 주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봉사도 헛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전도도 헛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봉사, 사랑이 있는 섬김, 그것만이 주님 앞에 영원히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저들을 기쁘시게 받으실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랑은 우리의 인격을 완성 시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45절에서도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살아계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은 성숙해 가는 우리의 사랑, 점점 더 풍성해져 가는 사랑, 그 사랑 안에서 변화되어가는 우리의 인격을 바라보시며 만족해하시는 것입니다. 

미움과 복수는 일시적으로 우리 마음속에 시원함을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그 잠시의 시원함이 우리 인간의 부패성을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를 파괴합니다. 내 인격을 파괴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을 보십시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잡아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그 자신이 먼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의 인격이 먼저 비참하게 망가지고 파괴되어버린 것을 우리가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면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궁극적으로 그것은 ‘나를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의 인격은 보다 온전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온전하고 놀라운 인격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능력을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셨을 뿐 아니라, 주님 자신이 직접 이 사랑을 실천해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사죄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본받은 스데반 집사님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하였고, 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아들을 삼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운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은사, 최고의 능력을 주시기를 바라고, 그리하여 주님의 놀라운 인격을 닮은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사랑의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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