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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홍해와 요단 (수 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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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와 요단 (수 3 :14~17)


이스라엘은 요셉 때 있었던 7년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흉년으로부터 지켜내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요셉을 미리 애굽으로 보내어 대비하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으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총리 대신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총리 대신이었던 요셉 때문에 고센 땅에서 아주 편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7년 흉년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보다 애굽 땅이 더 살기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들은 애굽에서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는 것을 위기로 느꼈던 애굽 사람들에 의하여 저들은 결국 애굽 땅에서 종이 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신앙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세상의 종이 되고 결국은 죽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면 결국 그는 사람의 종이 되고 맙니다. 

죽고 망하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서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게 약 400년입니다. 창세기 50장과 출애굽기 1장 사이에는 약 400여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고 산 세월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보다 애굽을 더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산 세월입니다. 400년 만에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자마자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저들을 구원하십니다.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보냅니다. 그리고 결국 출애굽을 감행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출애굽 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에 가로막히게 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마병들이 좇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갈라놓으신 홍해를 눈으로 확인한 후 건넜습니다.

일종의 시청각 교육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그 믿음을 가지고 싸워 가나안을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을 눈으로 목도하고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저들은 절망했고 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위하여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훈련하셨습니다.

드디어 광야의 훈련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널 때에는 물이 많아 언덕에 넘칠 때였습니다. 홍해는 갈라진 후에 건너게 하셨지만 요단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들어간 후에야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은 디디자 그때 요단강 물이 끊어졌습니다. 저들은 그 요단을 건너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보편적으로 볼 때 초신자들에게는 홍해의 기적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들에게 성숙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볼 때 믿은지 오래 된 교인들에게는 홍해의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생활을 통하여 믿음의 연수가 쌓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단의 기적을 제시하십니다. 언덕에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하나님을 믿고 들어가라 하십니다. 들어가면 그 때 물이 끊어지는 기적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구원은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쉽게 생각합니다. 믿음보다 행함이 더 힘들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행함이 만만한 것은 아니나 믿음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행함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출애굽 한 사람은 많았으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많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떠나 온 사람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성공적으로 탈출하였으나 정작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들의 모습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의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홍해는 건너 출애굽에는 성공하였으나 정작 요단강은 건너지 못해 그냥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광야에서 죽는 것은 아닐까요? 애굽은 아니지만 가나안도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애굽에서 출애굽 한 것만도 대단한 것입니다. 최소한 종에서는 해방이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 죽여야만 하는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에서는 벗어났습니다. 비록 광야에서 고생은 하였지만 사실 애굽보다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애굽 탈출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 입성이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애굽탈출에서 끝납니다. 갈라진 홍해는 건넜지만 언덕까지 물이 넘치는 요단강에는 발을 믿음으로 내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했을 때에는 물이 언덕까지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강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제사장들이 믿음을 가지고 요단강에 발을 내딛자마자 즉시 물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물이 무릎에 찬 것도 아니고 허리에 찬 것도 아니고 목에까지 찬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들어가자마자 물은 끊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은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예수님 말씀하신 것과 같이 겨자씨만한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찬 후에야 요단이 갈라지는 수준의 것이라면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냥 요단에 발을 내 딛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단의 물은 끊어지고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홍해의 기적을 요구합니다. 갈라지는 것을 보면 들어가겠다는 것이지요.

오래 전 영국의 후배 목사 교회에서 집회를 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유학생 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국 집회 때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였었습니다. 그 설교에 나름 은혜를 받은 그 유학생 부인이 울면서 저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지금 십일조를 하면 애기 밥을 굶겨야 하는데 그래도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가 제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힘들고 어려운 삶에 대해서 참 많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질문에 저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애기 밥을 굶기면서까지 십일조를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성경에 없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잘 대답을 한 후 끝에 토를 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라면 한번 도전해 보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런 불경스러운 표현을 했었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을 궁지로 몰아야해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자든 다 상관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 여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늘 쪼들리는 삶을 삽니다. 100억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200억 원에 대한 욕심 때문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허리 띠를 조이며 200억 원의 재산을 향하여 전진합니다. 사람들은 다 욕심 때문에 가난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 모두에게 온전한 십일조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요단의 물이 끊어 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언덕까지 물이 넘쳐 흐르는 요단 강에 들어가는 행위입니다.

앞에서 십일조를 하면 애기 밥을 굶겨야 한다는 유학생 부인이 만일 저의 잔인해 보이는,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그 말을 곧이 듣고 정말 그렇게 하였다면 정말 하나님이 궁지로 몰린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 강에 들어서자마자 물이 끊긴것과 같은 일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게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여시고 땅에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쏟아 부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유학생 부인이 정말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요단 강에 발을 딛었다면 틀림없이 그 복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아이 밥을 굶겨야만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도 밥을 굶는 일이 없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아기 밥을 굶겨야 한다는 상황은 현재 자기는 밥을 굻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데도 밥을 굶는데, 십일조를 하면 애기 밥까지 굶겨야 되는데 어떻게 십일조를 할 수 있느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생각은 아닙니다. 너무 지나치게 들리실는지 모르나 그 유학생 부인이 밥을 굶고 있었던 것은 십일조를 겁이 나서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하겠다는 무모함이 없다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온전한 십일조를 평생하지 못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그 수준에 밖에 미치지 못하면 출애굽은 할 수 있으나 가나안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의 삶은 누릴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대충하는 십일조의 경우가 많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다 드리는 것이 힘들고 아까워서 정직한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요구하시는 온전한 십일조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섭섭하셔서 말씀하신 흠 있는 제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양 중에 가장 실하고 좋은 양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눈 멀고 다리 저는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온전한 십일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 온전한 십일조에 약속하신 하늘 문을 열고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시는 복을 내려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려고 노력했었습니다. 집을 사고 팔 때도 살 때의 가격과 팔 때의 가격을 계산하여 그 차익의 십일조를 뗐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모양의 재산에도 십일조를 떼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도록 나름 노력하였습니다. 주일 헌금 하나를 드려도 아무 돈이나 드리려고 하지 않고 은행 신권을 준비하여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제가 가진 돈과 재산을 가지고 보통 사람들이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 문을 쏟아 주신 복이라고 생각할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저와 제 자식들에게 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많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쌓을 곳이 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예배당을 먼저 짓지 아니하고 탈북자와 빈민들의 자활을 돕기 위한 열매나눔재단을 먼저 세웠습니다. 70억 원을 출연하기로 하였습니다. 20억 원은 현찰로 나머지 50억 원은 일 년에 10억 원씩 5년 동안 내기로 시와 약속하였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매달 8천 3백 만 원씩을 재단에 내고 있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재단은 생긴지 일 년 반 정도 된 신생재단입니다. 재단이 하는 사업 중에 마이크로 크레딧 사업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신용대출을 해 주는 사업입니다. 그와 같은 사업을 하는 재단이 우리나라에 몇 있습니다. 정부에서 그와 같은 재단을 심사하여 재원을 지원하는 일이 얼마 전 있었습니다. 저희 재단이 그 심사에서 일등을 하였습니다. 10억 원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정부가 지원해 주겠다는 돈을 사양할 때도 있습니다.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사양합니다. 정부나 다른 재단들이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실수하지 않고 천천히 차분히 가려고 합니다. 그래야 더 큰 것도 받을 수 있고 더 큰 일을 실수 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이 없어서 흩어지면서까지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을 고집하는 것은 나름 믿음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식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학교 강당을 비워 달라는 공문을 받았을 때 보이지 않는 성전건축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포기까지는 말고 잠시 순서를 바꿀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그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요단의 물이 끊어지는 것과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립을 통하여 오히려 더 건강해지고 부흥하고 있으며, 재단은 한 번도 일등을 욕심내고 경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지원을 받는 재단이 벌써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높은 뜻 교회와 열매나눔재단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시고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축복된 삶을 누리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믿으신지 몇 년이나 되셨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자리는 현재 어디이십니까? 애굽이십니까? 홍해이십니까? 광야이십니까? 가나안이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광야 아니십니까? 출애굽은 하였는데 아직 가나안은 들어가지 못한 상황은 아니십니까?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홍해의 기적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홍해는 출애굽용이지 가나안용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홍해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요단을 건너야만 합니다. 홍해를 건넌지 4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요단이 갈라진 후에 들어가려고 머뭇거리고 있는 여러분은 혹 아니십니까?

믿음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상식과 이성만으로 사물을 보고 판단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단은 큰 강이 아닙니다. 우리 표현대로 하자면 조금 큰 시내 정도 될 겁니다. 보통 때는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야 할 때는 추수할 때였고 그 때는 언제나 요단의 물이 넘쳐 언덕까지 차는 때였습니다. 걸어서는 절대로 건널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때 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됩니다. 남들은 그렇게 하면 죽는다고 말리지만 죽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밟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상식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는 식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평생 광야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고달픈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오늘 날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제사장이 법궤를 메었듯이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성경을 메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세상을 보고, 성경으로 교회와 교인들의 나아갈 바를 결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물로 들어가라 하면 물로 들어가고, 성경이 산으로 올라가라 하면 그냥 따라 올라가면 됩니다. 왜 물로 들어가느냐, 왜 산으로 올라가느냐 불평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그냥 따라 가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상식과 경험과 지식을 앞세워 법궤를 막으면 안 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평생을 광야에서 살다가 광야에서 죽은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고 믿음으로 언덕에 물이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믿음으로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 젖과 꿀이 흐르는 복된 삶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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