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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닮자! (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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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닮자! (빌 2;1~1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인 선구자 노래의 한 부분입니다. 이 가곡은 1930년에 일제 하에 있을 때 민족의 한을 달래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그 당시 우리 선열들은 나라를 잃었다고 절망에 사로잡혀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을 되찾겠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만주 평원을 달리던 충절의 선구자'를 노래한 것입니다. 
  
당시 우리 민족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민족의 광복을 위해 스스로 선구자가 되기를 바랐고, 또한 새로운 선구자가 일어나기를 열망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선구자들에 의해서 개척되고 발전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뜻을 역사 속에 드러내실 때 언제나 선지자를 불러서 한 시대에 선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즉 앞서 가는 개척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한 시대의 선구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구자의 길은 언제나 고독하고 위험합니다. 때로는 뭇 사람의 비난과 조소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개척자가 된다는 그 자체에 보람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미국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콜롬부스'입니다. 그가 대륙을 발견하고 몇 차례 탐사를 마친 후에 고국에 돌아온 '콜롬부스'는 말년에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가 10년을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는 새로운 거대한 땅을 발견했어도 한 평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콜롬부스'가 발견한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숱한 부자보다 '콜롬부스'를 더 위대하게 추앙하는 것은 그가 자기 것으로 땅 한 평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새 대륙을 발견하고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는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개척하는 선구자들입니다. 그런데 선구자들은 싸움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자신의 안일과 욕망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악과 싸워 이겨야 하고, 불리하게 전개되는 환경과 조건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그 다음 선구자들에게는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왜정 말기에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만주로 가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독립군에 자원을 했는데 그들은 세 가지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독립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⑴ 너는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⑵ 너는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⑶ 너는 추위에 얼어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한마디로 죽을 각오와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나라를 개척하는 순례자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까지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름 받은 선구자들이 연약해서 때로는 넘어지고 쓸어 지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자신도, 세상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닮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얼굴을 닮은 경우도 있고, 성격을 닮을 경우도 있고, 습관을 닮을 경우도 있고, 언어 즉 말을 닮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닮는 것은 순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할 때 닮아 가는 폭도 넓어지게 됩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10년 세월, 20년 긴 세월을 살다보면 성격이 닮아지고, 생활 방식이, 식성이 닮아 가는가 하면 어떤 부부는 얼굴까지 닮아 남매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닮는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아름답고 좋은 것은 닮을수록 좋겠지만 나쁜 버릇은 닮지 않은 것이 훨씬 좋습니다. 그런데 좋은 버릇은 닮기가 어렵고, 시간이 걸리는 반면 나쁜 버릇은 순식간에 닮아서 오염되기가 쉽습니다.
  
옛말에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충신은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시1: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과 가까이 하면 악인의 모습을 닮게 되는 것이고 죄와 가까이 하면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폐루시야 우화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여행객이 길을 가다가 점토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흙덩어리에서는 아주 좋은 향기가 났습니다. 이상히 여긴 여행객이 물었습니다. "이 고상하고 놀라운 향기는 어떻게 해서 나는 것인가?" 그러자 흙이 대답합니다. "그것은 내가 장미꽃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미와 함께 있던 그 점토는 장미의 향기를 품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언어 속에는 '끼리끼리 노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뜻 맞는 사람끼리',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자기네들끼리 어울리기 마련입니다. 도박꾼, 춤꾼들 역시 자기들끼리 어울립니다. 이것을 무리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끼리끼리 만나면 자기들만의 대화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끼리끼리는 서로가 서로를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과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삶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훌륭한 스승을 닮고, 부모를 닮고, 위인을 닮고, 친구를 닮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닮아야 할 영원한 얼굴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는 다는 것은 예수의 얼굴을 닮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닮아야 하는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제아무리 예수님처럼 얼굴을 성형을 하고, 수염을 기르고, 유대인의 복장을 하고, 발에는 샌들을 신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닙니다. 
  
닮는다는 것과 흉내낸다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닮는 비결을 본문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러분, 예수의 마음을 내 마음에 품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끊임없는 시기와 증오, 갈등, 거짓, 교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신 후에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넣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깨끗한 마음, 겸손한 마음이었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물을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 뱀으로 가장한 사탄이 아담을 유혹함으로 그 마음을 빼앗아 버리고 사탄의 마음을 넣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사탄에게 인간의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 속에 준 마음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⑴ 교만한 마음입니다. 인간은 이 마음 때문에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착각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도 사탄이 사람에게 주는 마음은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부정해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상한 일입니다. 어찌 피조물이 조물주를 대적할 수 있으며, 무시할 수 있습니까? 
  
나를 낳아 길러준 부모님에게도 효도해야 하거늘 세상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교만한 마음은 사탄이 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⑵ 다투는 마음입니다. 사탄이 준 마음 때문에 부부가 서로 다투기 시작했고, 형제가 다투게 되었고, 인간끼리 다투게 되었습니다. 이 다툼이 커지면서 지금 세계는 분쟁과 테러와 살상으로 피비린내가 그칠 날이 없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킵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이간질시켜 싸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평안이요, 일치요 한마음입니다. 
  
⑶ 거짓된 마음입니다. 우리 인간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거짓됨은 사탄이 준 마음입니다. 마귀는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좋은 것을 줄 수 없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귀가 인간의 마음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한 참된 행복, 참된 평안은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내 마음을 다시 찾으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영접하고 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품으면 교만한 마음이 겸손해집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습니다. 또 증오심과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가득한 마음이 예수의 마음을 품으면 사랑하는 마음이 됩니다. 시끄럽고 복잡하던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해집니다. 갈팡질팡 헤매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감을 갖게 됩니다. 

 
1.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예수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의미는 '너희 안에 예수의 영을 가져라. 너희 안에 예수의 생각을 가져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얼마만큼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마음을 닮을 수도 있고, 닮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만을 사모하고 생각하다가 일어난 병을 '상사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상사병이 날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내 속에 품는 것이요, 예수를 닮아 가는 방법입니다. 
  
주경학자 '바클레이'는 '이상하게도 우리는 때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일을 위해서는 신명을 다하는데 반해 참으로 중요한 것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오락(카드놀이, 바둑, 장기, 춤추러 가기 등)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 어떤 취미생활을 위해서는 시간과 정욕도 무한정 쓰고 있으면서도 생명과 직결된 신앙생활은 소홀히 하고 있다'고 현대인들을 지적했습니다. 
  
우리주변에는 급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돈 버는 문제, 사업문제, 직장문제, 가정, 자녀문제, 건강, 죽고 사는 문제 등 작은 문제에서 큰 문제에 이르기까지 급한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즉 예수를 닮아 가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를 닮아버리면 바로 이 세상은 예수님의 세상이 됩니다. 여러분 천국이 어딘지 아십니까? 예수님이 다스리는 곳, 예수의 통치입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 모두 천국을 이루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당부한 말씀이 있습니다. 

①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를 바라봐야 예수를 닮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라는 말은 '앞서 인도하는 자, 믿음의 창설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우리들 앞에서 믿음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분은 믿음의 대상이시오, 믿음의 창설자 시오,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인도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고 예수를 닮아 가려면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완성한다'는 의미로 '약한 자를 강한 존재로 완성해 주시고, 깨어진 것들을 싸매어 주시고, 찢어진 것들을 한데 묶어 하나 되게' 하십니다. 
  
②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히3: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여기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요, 깊이 기도하는 삶입니다.
  
③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벧전2:21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분만 닮아 가면 이 세상이 조용해집니다. 투기바람, 치맛바람 없어집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우리 모두는 예수를 닮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지, 닮아버린 사람은 아닙니다. 교향곡으로 말하면 연주가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 한창 연주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끼리 자주 만나서 교제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롬10: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 예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의 4대 옥중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두 차례에 걸쳐 헌금을 거두어 보내줄 정도로 바울의 선교활동을 지원하였고 그가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는 자기의 교회 지도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바울의 옥바라지를 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정성을 다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하고 격려하는 의미에서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잘 자라나는 모습을 칭찬하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 교회도 지상의 교회이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있는 일부 여성도 들에 의해서 불화와 다툼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자주 장사 '루디아'가 제일 먼저 믿고, 그 여자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다 보니 빌립보 교회는 여자의 주권이 매우 강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끼리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툼이 끊이질 않습니다. 바울 사도가 4:2절에서 "내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권하노니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을 할 정도입니다. 
  
유오디아라는 여자와 순두게라는 여자가 빌립보 교회에서 다 자기가 잘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여자가 각자의 패거리를 만듭니다. 그래서 절대 마음이 합해지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예배하러 교회에 왔다가 상처를 받고 돌아갑니다. 함께 모였다 하면 싸움질만 하고 헤어지니까 모였다 하면 오히려 괴롭고 믿음의 손해를 보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 사도가 '이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제일이다, 나 잘났다, 내가 일등이다 그러지 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유오디아는 순두게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고 또한 순두게는 유오디아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달밤에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 떼는 줄을 지어서 갑니다. 기러기를 연구하는 조류학자들이 그 이유를 밝혀냈습니다. 기러기 떼가 줄을 지어서 나는 것은 혼자 가는 것보다 70%를 더 멀리 날 수 있다고 합니다. 공동목표를 가지고 협동하면 훨씬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기러기가 함께 날 때 우는소리를 자주 내는 것은 앞서가는 동료에게 힘내라고 응원하는 소리입니다. 교회는 하나가 될 때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유명한 종교개혁자 '루터'와 '쯔잉글리'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한 나라 사람들은 아니지만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는 신념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모여서 의논만 하면 의견이 합해지는 법이 없습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싸움만 하다가 헤어집니다. 헤어지고 보면 또 아쉽습니다. 그러나 또 만나면 역시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자기만 잘났다고 하고 자기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양보가 없습니다. 
  
도무지 한 번도 의견일치가 되질 않으니까 스위스 깊은 산중으로 머리를 식히려 함께 갔습니다. 파도치듯 계곡의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걸어갑니다. 가다가 외나무다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외나무다리 양쪽에서 염소가 한 마리씩 건너오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서 만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염소들끼리 서로 받아 버리면서 외나무다리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외로 염소들이 마주 하더니 염소 중 한 마리가 통나무 위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더니 다른 염소가 너 죽으라고 힘껏 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처가 나지 않을까 하여 가만히, 살짝 밟고 가더랍니다. 그 염소가 건너가고 난 후에 엎드려 있던 염소가 자기의 갈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염소들의 양보, 무릎 꿇는 겸손'에서 루터와 쯔잉글리가 큰 교훈을 얻고 힘을 합쳐 종교개혁에 동반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한 마음이 되면 함께 살게 되고 무언가가 됩니다. 그때부터 루터는 기독교의 기본이 되는 덕을 겸손이라고 외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며, 하나가 되기 위하여서는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7장은 대제사장이신 주님의 기도문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교회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서는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고, 제자들과 교회를 위하여서는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요17:11,22).
  
본문 2절의 '한 마음, 같은 마음, 같은 사랑, 합하여진 뜻'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같습니다. 같은 마음 곧 한 마음이란 '나와 너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 초대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고,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이런 마음은 절대 분열이나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마음을 이루는 것은 평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누구와 마음을 같이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마음으로 같이해야 합니다. 
  
이 마음을 누가 품었습니까? 모세가 품었습니다. 모세를 가리켜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다윗이 그렇습니다. '마음이 합한 자'라고 불렸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만 하면 하늘 보고가 열립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마음을 품으십시다. 롬8: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① 2절의 '같은 사랑'은 '예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까지도 바쳤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칩니까? 이 땅에 자식이 부모를 위해 생명을 바칩니까? 부모가 자식을 위해 생명을 바칩니까? 남편이 아내를 위해 생명을 바칩니까? 아내가 남편을 위해 생명을 바칩니까? 
  
예전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살리기 위해 부인이 자신의 심장을 내어놓겠다는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할 때, 심장까지는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만 있다면 세상은 조용해 집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남편에게 이 사랑을 줍시다. 시어머니에게도 이 사랑을 주시고, 며느리에게도 이 사랑을 줍시다. 틀림없이 세상이 조용해집니다. 

②'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고구려 말기에 역사를 보면 그때 유명한 정치가 연개소문에게 아들 삼 형제가 있었는데, '남생, 남건, 남산'이라는 아주 잘난 아들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면서 삼 형제를 불러놓고 '내가 죽은 후에 어떻든지 너희가 마음과 뜻을 합하여 나라를 잘 받들라'고 간절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이 아들들이 한 것을 보면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큰 형 남생이 재상이 되니 두 동생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분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남생이 쫓겨났습니다. 자기 나라에 그냥 있지도 못하고 다른 나라로 가서 중국의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와서 고구려를 쳐서 고구려가 망한 것입니다. 형제간의 싸움으로 나라가 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한마음 한 뜻을 가지십시다. 한마음 한 뜻을 가진 교회는 부흥되어지고, 성도들은 복을 받습니다. 한마음 한 뜻을 가진 가정은 평화가 넘치고 하나님의 축복이 쏟아집니다.  목자와 양이 두 마음을 품으면 교회가 무너집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마음과 뜻을 품으면 그 가정은 깨어지고 맙니다. 

 
3. 다툼과 허영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여기 '다툼'은 이기적인 야망이요, '허영'은 '알맹이 없는 자랑'을 의미하는데 즉 공허하고 세상적인 마음을 표시합니다. 다툼과 허영은 다 자기 중심에서 생겨나는 결과로써 하나 됨을 방해합니다. 다툼과 허영은 자신의 이익과 특권을 요구하는데서 싹이 트게 됩니다. 
  
다툼과 허영은 그리스도인의 적입니다. 예수 죽으심은 원수 관계를 십자가로 둘이 화평케 하시기 위함인데 다툼과 허영은 하나 됨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다툼의 원인은 같은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저들에게는 화목이 없게 되었습니다. 아무 일이든지 다툼으로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다툼으로 허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요,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툼과 허영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다툼'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두 손바닥이 마주 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이 두 사람이 서로 자기를 내세울 때, 다툼이 생기게 됩니다. '허영'은 '겉을 치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부풀게 하여 허영을 불리게 합니다. 허영을 부리게 되면 시험이 다가오게 되고, 허영으로 자랑하다가 망신당하는 날이 옵니다.


4. 겸손한 마음이 하나되는 비결이요, 예수의 마음입니다(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의 낮아짐이요, 사람 앞에서는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히 없으면 성도가 하나 됨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데 어찌 싸움이 성립될 수 있겠습니까? 
  
롬12: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먼저 존경하지 못하기에 하나 됨이 깨어지면서 거룩한 공동체는 오염에 들게 됩니다. 롬12:16절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겸손한 마음은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덕목은 겸손입니다. 성경에는 '서로' 하라는 말이 많습니다. ▶서로 문안하라! ▶서로 화목 하라! ▶서로 발을 씻기라! ▶서로 용납하라! ▶서로 돌아 보라! ▶서로 짐을 지라! 고 하십니다. '서로'란 연대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서로 웃고, 서로 우는 사랑의 관계처럼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특별히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7:3절에서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을 모르는 것이 큰 단점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은 실수로 돌리고, 남이 잘못한 것은 죄로 몰아세우기 일쑤입니다. 
  
자신의 허물을 모르는 사람을 향하여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나보다 남을 더 높게 여깁시다. 남편을 높게 여기고, 아내를 높게 여기고, 교회에서는 권사님을 높게 여기고, 집사님도 구역장님을 대접해 주고, 또 구역장들도 각 구역의 식구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화목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남을 인정해 주는 사랑은 겸손한 사랑입니다. 
  
눅14: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이 주님을 닮을 수 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는 '겸손한 사람보다 힘이 강한 사람은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천로역정의 존번연 목사는 '겸손한 자, 자기를 낮추는 자는 떨어질 염려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약4: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한 자 높임을 받습니다. 겸손한 자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이 붙드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5. 겸손한 자가 이웃을 돌아볼 줄 알고 아름다운 봉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여기 '돌아보아'는 주의 깊게 남을 관찰하며 흥미를 가지고 돌봐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아 줄 때 비난하는 태도로 쓸데없이 간섭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그들과 동참해야 합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은 섬기는 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섬기러 오셨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6. 본문에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5)    

신앙이 좋은 권사님 한 분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담임 목사님이 달려갔습니다. 목사님은 그 권사님이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지'에 관하여 확인하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권사님, 예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랬더니 이 권사님이 주저 없이 "내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하시며 운명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입니까? 
  
여기 '너희 안에'라는 말은 '너희들 안에'인데 이 뜻은 '너희들의 마음들 속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품으라'는 뜻은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는 차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⑴ 겸손의 마음입니다. 6-7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여기 '근본'이라는 말은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써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존재 상태를 가리키고 말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자신의 신성을 내놓으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에서 떠나 자신을 낮추신 비하의 신분을 나타낸 말입니다. 
  
⑵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8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순종은 즐거움으로 하는 것이지만, 복종은 이해가 되지 않아도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복종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완전한 복종입니다. 
  
⑶ 희생의 마음입니다. 8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주님의 철저한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대속의 죽음으로서 죄인을 위하여 지는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악한 죄수로 죽음에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달린 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말씀 때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고, 당시 십자가는 노예들이나 강도들, 반역자들 같은 죄수들의 처형 대였기에 십자가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습니다(고전1:23).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의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고 사랑의 확증이기도 합니다.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요한일서 3:1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7.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눅18:16-17).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결단코'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린이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⑴ 순결한 마음입니다. 죄를 모릅니다. 성경에 법칙이 있습니다. '죄를 모르면 부끄러움을 모르고, 죄를 알면 부끄러움을 안다', '죄를 모르면 두려움을 모르고, 죄를 알면 두려움을 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발가벗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치마를 만들어 입고 숨어 버렸습니다. 죄의 결과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입니다. 어른은 순결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순결합니다. 
  
⑵ 정직한 마음입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축복하십니다. 
  
⑶ 단순한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앞에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엄마! 저기 더하기 표시가 있어" 십자가를 더하기로 봅니다. ▶무디가 전도하고 돌아오자 한 사람이 "몇 명 전도하였습니까?" 무디가 "두 명 반"했습니다. "두 명반이라니요? 어른 두 명, 어린이 한 명을 하였나요?" 이 말을 듣고 무디가 "아니요? 반대요. 어른 한 명, 어린아이 두 명을 하였습니다. 어른은 전도하여도 나올지 말지 하지만 어린아이는 나온다고 하면 나오거든요" 어린아이는 단순해서 하나만 압니다. 
  
▶어떤 중소기업 사장님의 고백을 썼습니다. 이 분은 열 살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분이 큰아들이었는데 그 때 도망가다가 한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자기 동생들을 하나씩 가슴의 안고 들쳐업고 중요한 물건은 머리에 이고 강을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문제였습니다. 아버지가 방법을 하나 제안했습니다. 큰아들에게 데리고 나왔던 소를 보이면서 "너는 이 소의 꼬리를 어떤 일이 있어도 놓지 말아라. 이 꼬리만 붙들면 너는 살 수 있다. 절대 소꼬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 사장님은 소꼬리를 붙들고 강을 건너갔습니다. 물을 좀 먹기는 먹었지만 이 소 때문에 자기는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 사장님은 소만 보면 인사를 한답니다. 자기를 살려준 소이기에 감사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릴 때 결심을 했답니다. 소고기는 '가급적이면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죽어도 꼬리곰탕은 먹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짓기를 "우리는 아무리 위험하여도 예수님의 옷자락만 붙들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 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 100년 역사에서 자랑스러운 한 여종이 있습니다. 그 여종이 백선행 집사입니다. 그는 16세에 자식도 하나 없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 먹고, 안 쓰고, 삯바느질하여 번 돈으로 재봉틀을 사서 방직을 하여 200냥을 벌었습니다. 200냥을 벌어놓고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시아버지, 남편 좋은 양지바른 곳에 무덤을 써서 잘 모실 수 있는 선산을 사야지' 하고는 모은 돈 200냥으로 선산을 구입하려고 먼 친척 뻘 되는 사람에게 산을 사달라고 했더니 대동강 변에 있는 산을 하나 사 주었습니다. 
  
산 문서를 받아 쥔 백 과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무덤을 이장하려고 산 구경을 가보니 이것은 산이 아니라 나무하나 살 수 없는 바위산이었습니다. 너무나 크게 실망하였으나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려니 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이 산을 샀더라면 그가 망할 것인데 이 손해를 나에게 돌리시니 감사합니다." 
  
백선행 집사는 예수님 마음으로 이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일로 백 과부는 망했다는 소문이 평양에 자자했습니다. 그 후에 일본 사람들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계획하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려고 석회암 지질조사를 하던 중 대동강에 있는 석회암산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주인을 찾으니 백선행 집사 땅이었습니다. 기업주 오노타는 소개 인을 넣어 300냥에 산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선행 집사는 팔지 않는다고 거절을 했습니다. 거절하므로 더 받으려는 줄 알고 나중에는 일천 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거절하자 나중에는 오천 냥을 준다고 했는데 또 거절했습니다. 
  
"이 산은 절대로 팔 수 없으니 절대로 오지 말라" 했습니다. 그들은 백과부가 석회암이라는 것을 알고 배짱을 부리는 줄 알고 산값의 백 배인 2만 냥을 준다고 했습니다. 또 거절했습니다. 드디어 일본 사람은 백집사가 목사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얘기를 듣고 도지사를 동원하여 백과부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에게 설득하도록 했습니다. 
  
목사님은 심방을 하여 산을 팔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백 집사는 "목사님,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백 냥에 이 산을 사 가지고 사람들이 나더러 망했다고 하는데 이 산을 이만 냥에 사간다면 그 사람은 망할게 뻔한데 그 사람이 망하는 것을 어떻게 봅니까? 믿는 내 양심으로는 나 혼자 망하고 말지 다른 사람 망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으로부터 자기 산이 석회암 산임을 알고 이만 냥에 산을 팔았습니다. 그는 그 재산으로 교회를 짓고,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회관 건물을 짓고, 평양신학교 재단 설립에 예산을 바쳤습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회 장을 치렀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한 집사를 위해서 사회 장을 치른 예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묻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지금 내 마음이 참으로 평안한가? ▶지금 내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이 예수님을 위한 헌신의 열심히 가득 차 있는가? ▶지금 내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진실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이 바로 축복 받는 삶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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