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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다메섹 직가 (행 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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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충렬 감독의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가 이 땅의 국민들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돈도 별반 들이지 않고 만든 기대하지 않았던 이 영화가 대박을 터트린 원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명한 인기 배우 하나 출연시키지 않고 등 굽은 여든 노인부부와 마흔 살 소의 출연만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비밀이 궁금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등 굽은 투박한 농부의 다 닳아 버린 그 손과 절룩거리며 생존을 이어가는 그 치열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을 새롭게 발견한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저의 뇌리에 줄곧 머물렀습니다. 팔순의 노부부가 소 한 마리 의지하여 한 많은 일생을 이어가는 유일한 목적은 자식들 교육이었습니다. 오직 자식들 하나만 생각하며 소꼴 뜯고 쇠죽 끓이고 소 먹이러 동네 산을 힘든 줄 모르고 오르내리던 이 노부부의 모습에서 그리고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는 비틀거리는 충직한 소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모 세대의 거룩한 희생의 가치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희생의 결과가 우리가 불평을 쏟아 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런 대로 살만한 오늘의 한국의 모습을 만든 것입니다. 

결국 내일의 한국의 모습은 우리가 다시 우리의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어떻게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선교의 개척자인 믿음의 사람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열두 제자 곧 하나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세우는 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말에도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없이 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절을 기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행스럽게 민족의 내일을 걱정하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일어설 수 있었던 애국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6.25전쟁의 잿더미에서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부모들이 논 팔고 소 팔아 자기 자녀들을 미래의 리더십으로 준비시킨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방금 회심한 젊은이 바울을 축복하고 기도하여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광경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그 통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비밀- 무엇일까요?

1.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일은 우선 하나님의 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에 하나님의 간섭이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기를 소원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만난 바울은 이미 다메섹 도상의 회심의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바울의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11절에 보면 눈이 먼 바울(사울)은 유다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새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부르십니다. 10절입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그래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만나러 갑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직가’란 ‘곧은 길’이란 뜻입니다. 이 길은 본래 바울이 살던 당시 동서를 가로지르는 1,600m의 곧은 길이었고 너비만도 15m이었는데 지금은 다메섹 시내 복잡한 시장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곳을 우리 교회 성지순례단과 함께 방문했을 때 지금도 이 시장 내에 남아있는 몇 개의 석주와 성문의 잔해로 미루어 과거의 아름다운 길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길의 끝머리 골목길 에는 유다의 집터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아나니아 기념교회(1973년에 세운 프란치스코 교회)가 서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로 아나니아와 바울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예로부터 사람과의 만남을 ‘신적 만남’(Divine encounter)으로 간주하는 것도 영성 훈련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주선으로 만난 것이라면 얼마나 의미 있는 만남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모든 만남은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낯선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이런 복음 성가를 부르며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야/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잊기엔 너무한 나(우리)의 운명이었기에/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아나니아 시대에 이 노래가 있었으면 아나니아와 바울은 틀림없이 이 노래를 이 중창으로 불렀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을 태우는 만남이었고 시대를 바꾸는 리더십의 출현을 예고하는 만남이었습니다.


2. 인간적 편견을 기도로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나니아 편에서 보자면 애초에 이 만남은 기뻐할만한 그런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70제자중(처음 12명의 제자를 전도하러 보내시고 다시 후에는 70명을 보내심)의 한 사람으로 후일 다메섹 교회의 첫 감독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 교회의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복음의 적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원수였기 때문에 그와 바울의 만남은 정확하게 말하면 원수와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시고 13-14절을 읽어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별수 없이 아나니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바울에 대한 편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 편견은 당연한 편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나니아에게는 이런 편견을 깰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아나니아가 자신의 편견을 고수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한 리더를 세우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의 편견, 나의 이데올로기, 나의 신념도 아무리 중요해도 하나님이 바꾸라고 하시면 언제든 바꿀 준비를 하고 사는 것-그것이 바로 아나니아가 쓰임 받은 이유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하나님의 음성,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17절에 보면 바울이 거하는 집으로 갑니다. 원수를 만나러 가는 겁니다.

그는 인간적 편견의 틀을 깨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버티시는 분들-이런 분들은 굳은 신념을 지닌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하나님 나라의 리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런 편견을 깰 수 있었던 것은 또한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그는 환상 중에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영적 민감성이 바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리더가 되게 한 것입니다.<BR><BR><B>3. 주께서 보내시는 사람을 축복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시리아 성지 순례 여정중 다메섹의 아나니아 기념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마당에 세워진 바울이 아나니아에게 안수 받는 모습의 동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동상이 서있는 마당의 좁은 지하통로로 내려가 자리 잡은 10평 남짓한 작은 지하 예배당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작은 지하 채플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감상에 젖었던 감회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나니아가 이 젊은 청년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할 때에 아나니아 자신도 아마 그가 역사를 바꾸는 인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들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까. 아나니아의 안수 곧 그의 축복으로 세상을 바꾸는 리더가 태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00년대 중엽 미국 보스톤의 한 교회에 에드워드 킴볼(Edward Kimball)이란 이름을 가진 주일 학교 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기 주일 학교 반에 한 소년이 등록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 학교에 삼촌의 권유로 나왔다고 했습니다. 킴 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자 했으나 그는 성경도 없었고 글자를 모르는 문맹이었습니다. 구두방에서 일하는 소년이었습니다. 킴볼 선생은 그에게 성경을 사주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주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가 바로 불세출의 세계적인 전도자로 백만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디가 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킴볼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이들을 축복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동일한 원리로 우리가 바울은 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바울을 축복하고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하던 아나니아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바울의 머리에 손을 얹었을 때 그는 앞을 보지 못하고 실명한 장애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인도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마음속 깊은 편견을 뛰어 넘어 그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했습니다. 그 순간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18절입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 일어나 침례(세례)를 받고”라고 했습니다. 아나니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새로운 세상을 보도록 도운 것입니다. 사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마당 언저리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사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은 오늘 누군가의 축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축복하는 순간 그들은 눈을 뜨고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3.1절 기념 주일입니다. 이 맘 때가 되면 우리는 신앙인 소녀, 민족의 누나 유관순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가 민족의 여인 하나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여러 도움의 손길이 있어서 가능할 수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그녀의 부친 유중권의 영향, 그리고 그녀의 공주 영명학교 시절, 이 믿음 좋은 소녀의 미래를 열고자 그녀를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도록 도운 선교사 앨리스 샤프(Alice H. Sharp), 그녀의 이화학당 시절 “십자가 신앙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십자가 신앙으로 민족을 섬겨야 한다”는 정동 교회 손 정도 목사님의 영적 감화 또한 그녀를 만든 정신의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에너지를 나라 사랑으로 실천할 것을 늘 강조한 이화학당 박인덕선생의 영향이 그녀의 믿음과 애국이라는 가치를 만들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전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찾은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 이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가 함께 다음 세대를 축복하는 일에 어떻게 헌신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오늘도 유관순 기념비에는 그녀의 3.1운동 거사 직전의 기도문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에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대한 독립만세! 대한 독립만세!” 우리는 그 기도에 빚진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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