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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만 분명하면 시험도 유익이 된다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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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만 분명하면 시험도 유익이 된다 (행 6:1~7)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오늘은 3.1절 기념주일입니다. 그러나 주일은 3.1절이지만 사도행전 연속 설교이니 절기와 상관없이 본문에만 충실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주 연속 북한을 향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지난 주 건축비 상환을 위한 특별 기도회가 있었지만, 북한의 도발이 건축비 상환 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기도임을 알게 하셔서 설교 시작하면서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다시 북한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다가 하나님께서 책 한권을 사게 하시고 읽게 하셨습니다. 주일설교 때문에 다른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전혀 없는데도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시고 ‘오늘 말씀이 나라를 위한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너지는 장벽]이란 책입니다. ‘무너질 북한을 위한 긴박한 부르심’ 이라는 부제목이 붙어있는 책인데, 데이브와 수스가 썼고 홍성사에서 출판하였으며 2월 출판된 책입니다. 내용은 북한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갑자기 들을 것이니 북한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문이 열리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입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남과 북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 될 수 없는 상황까지 와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지만 막상 북한 정권이 무너졌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준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 가장 악한 영이 사로잡고 있는 나락, 우상숭배의 극치인 나라가 북한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앞에 남한은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독교의 부흥이 있습니다.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한에 엄청난 영적 장벽을 만들어 북한을 막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북한이 무너졌을 때 남한 교회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준비해야 합니다. 
통일교가 이미 깊이 들어가 있고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평화자동차 공장을 가지고 있고 종교센터를 평양 큰 거리에 세우고 있고. 남한 교회가 정신차리고 준비하지 않으면 땅을 치고 후회하고 통곡할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한 교회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여러 가지 선교전략이 필요하지만 그 중심은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복음에 분명히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원망에서 시작된 교회의 시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휘청거리고 무너질 수도 있는 위기 중의 하나입니다. 초대교회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보다도 더 큰 무서운 위기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전혀 위기같지 않습니다. 구제 문제 때문에 교회 안에 원망이 일어난 것입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러분, 원망은 늘 있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나 원망, 불평이 없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내용을 심각하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성경이 말하는 기준과 많이 우리 마음이 떠나있다는 것입니다. 원망은 이렇게 무서운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끼리 원망이 일어났다, 교회가 무너질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두 개의 당파가 있었습니다. 일부러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고 서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히브리파 유대인이고 또 하나는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고향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다른 나라에 가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부릅니다. 그 흩어졌던 사람들 중에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와 정착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교회 안에도 자연히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았기에 말도 달랐고 문화도 달랐고 생각도 많이 달랐습니다. 
이런 뿌리에서 시험이 생겼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매일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랬는지 오해였는지 모르지만 고향에 살던 히브리파 과부에게는 배급이 잘 되는데, 외국에서 온 헬라파 사람들에게는 배급이 잘 되지 않는다는 원망이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망이 무서운 시험임을 알아야 바로 대처하게 됩니다. ‘불평과 원망, 늘 있는 일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큰 일납니다. 원망이 핍박보다 더 무서운 시험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핍박 못지 않게 심각하게 다룬 주제입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원망소리를 들을 때, 구제하던 사도들이나 재산을 바친 교인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실컷 도와주고 욕은 욕대로 먹은 겁니다. "우리는 땅도 팔아 바쳤어! 도와주는데 불평을 해? 작으면 작은 대로 받고 많으면 많은 대로 받는 거지. 내가 안 주면 어떡할 거야! 오늘부터 안 도와 줄거야."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남의 이야기일 경우에는 공평하게 나누어 주면 되지요. 이렇게 되지만, 자기 문제로 들어오면 원망 듣는 일처럼 우리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일이 없습니다. 나는 잘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도워주었는데 누가 나에게 불평하고 원망을 들으면 화가 납니다. 
시험이 생길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이 그만두는 겁니다. '집사 안해! 회장 안 해!' 부부관계도 문제가 생길 때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갈라서는 겁니다. 성도 간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떠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 원망 때문에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중단한 적은 없습니까? 부모와 자녀관계, 부부관계, 교우관계를 단절한 채 살지는 않습니까? “떠나면 되지 뭐!”
여러분, 그만두는 것, 갈라서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 같지만 이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탄이 의도한 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문제를 통해 우리의 일을 중단하게 만듭니다. ‘내가 희생했는데 이것 밖에 돌아오지 않는구나!’ '중단해라! 그만 두어라!' 마귀가 우리 속에 원망에 원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시험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우리가 힘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망이란 가시 때문입니다.


북극에 고슴도치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떨어져 있으면 너무 춥고 안고 있으면 너무 아픕니다. 이것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미워하고 싸우며 헤어져 있으면 그리움으로 목이 탑니다. 나만 찔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가시 때문에 찔린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언제까지 가시를 갖고 살 것입니까? 남의 가시만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의 가시도 보아야 합니다. 때문에 
 

어떤 부인이 아이 키우면서 속이 다 썩어 성질 버렸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본래 그 성질이 아이 키우다가 드러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고생하느라고 성격 다 버렸다고 말합니다. 착각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자기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성격은 그 성격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환경 탓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건드리지 않으면 누구나 온유합니다. 잘 대접해 주면 누구나 상냥합니다. 그것은 참된 온유가 아닙니다. 참된 온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타나야 참 온유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정말 경계해야 될 것들이 원망입니다. 원망은 망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민수기 14장 28절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하셨습니다. 
망하겠다 망하겠다 하는 자는 정말 망하게 하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 자들은 정말 죽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하는 말이 나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혹시 누가 원망하면 그냥 끌어안고 우십시오. “원망하면 죽는다! 그러면 죽습니다.” 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불편하면 원망이 나옵니다. 너무 쉽게 원망이 나옵니다. 주차하기 힘들어서 원망, 엘리베이터가 부족해서 원망, 아래는 추워서 원망, 위에는 더워서 원망하고. 그러다가 결국 직원 한 사람이 사임했습니다. 사람들의 말 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지금 북한은 남한에 대한 원망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온갖 위협과 협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동안 도와주다가 당신들이 안 변하면 안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이제는 미사일을 쏜다, 대포를 쏜다며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 북한을 보면서 “돕지 말자! 도와서 뭐해! 오히려 전쟁을 하자는 것이잖아! 도와줄 필요도 없다!”
저는 지금까지 북한을 도와줘야 한다는데 일관 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것 보니까 진짜 도와줘야 될 것인지 회의가 듭니다. 이번에 미사일을 발사한다, 대포를 쏜다고 위협을 할 때 솔직히 그런 기도가 나옵니다. 지난 주일까지만 해도 “주여, 아예 망하게 하소서! 이젠 도와달라고 해도 도와주면 안돼. 저러다가 원조 다 끊기고, 굶어죽으면 후회하겠지! 내부에서 폭동이 일어나야 돼!“ 지금 우리나라 정부도 갖고 있는 기본 생각이고 온 국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두 북한에 대하여 치를 떨고 모든 도움을 중단하자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북한은 우리에게 부담스런 존재, 증오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보게 하시면서 깨달았습니다. 원망을 듣고 같이 원망하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원망 소리를 들을 때, 같이 원망하고 극단적인 거부감으로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마귀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한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북한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은 단순히 물질만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안에 서있는 그 마음 중심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원망들을 때, 달랐습니다. 말도 안되는 원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인데도 사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원망할 때 “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불평 불만이 나오는 것 보니 말씀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교회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하려고 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정말 성령충만한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정말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도들은 십자가의 사람이었기에 시험 중에 오히려 자신들의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잘 섬겼는데 나는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했는데 불평이 나오고 원망이 나오면, 그 사람의 잘못이 더 크게 보이지 내 잘못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정말 십자가에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 그렇구나, 이것이 무슨 문제 때문에 생긴 것이구나!’하는 것이 깨달아진 것입니다.
기도가 줄어든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기에 구제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교회 같으면 부흥 된 것인데 일이 많다보니 기도가 우선순위에서 슬쩍 빠졌습니다. 결국 시험이 생긴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쉬면 안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쉬면 안되는 것을 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리실 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들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제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 쉬지 아니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그리고 우리 교회 일 다 나누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교회 일도 다 헌신이고 수고지만 내가 어떤 일을 맡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고 하면 그렇게 섭섭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것이 아무 문제가 안됐습니다.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가 다른 사역은 다 나누어줍시다.” 그 구제 사역이 재정을 맡고 있는 사역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여보, 내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래. 미안해! 집사님, 제가 기도 못해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이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남의 잘못만 보이고 섭섭하고 화가 나서 자기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원망 시험이 결코 저절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로 사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들은 과감히 자신들이 맡았던 구제사역을 교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사도들은 빠지고 교인들이 의논하여 일곱 사람을 세우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놀라운 감동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구제 사역을 대신 맡을 사람을 뽑지 않고 교인들이 뽑아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의논해서 성령충만한 사람 일곱 사람만 뽑아오십시오.” 교인들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사람을 뽑아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곱 집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일곱 사람의 이름이 공통점이 있는데, 다 헬라식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교회가 있을까요? 지금 교회에서 헬라파 사람들로 인하여 시험이 생겼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을 소홀히 여긴다고 불평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 일을 하던 사도들이 뒤로 물러가기로 했어요. 교회 안에 이런 일이 실상 벌어지면 쉽지 않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담임 목사님 손 떼세요!” 이렇게 된 것입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사도들이 아니고 교인들입니다. “헬라파 교인들 안에 이런 불평이 생겼는데 그러면 헬라파 교인들을 세웁시다. 그러면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습니까? 오해다 아니다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아, 그것 정말 지혜로운 생각이네요. 히브리파 교인들이 다 물러서고 헬라파 교인들이 주관해서 재정을 맡아서 하십시다.” 의논한 결과 일곱 명을 뽑아 양식 나누는 일을 다 맡겼는데, 모두 헬라파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분위기였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복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것 못해냅니다. 정말 감동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 정말 멋있습니다.  

이렇게 하니 교회가 갈라질 시험을 만나고도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많은 제사장들도 예수 믿었다면 단순히 전도해서 되었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감동받았으면 그리했겠습니까?  

바닷가에 가보면 파도는 끊임없이 강한 힘으로 밀려왔다가 밀려갑니다. 겉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멀리 있는 달의 인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닷가의 파도가 달의 인력 때문에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이 우리가 예수로 살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이고 또 하나는 성령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겉보기에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으나 영적인 힘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육신이냐 예수님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원망도 이길  힘을 갖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혼자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비한 끈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다 영향력을 끼치고 받고 삽니다. 바다에 가보면 섬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속으로 내려가면 서로 하나의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표면에서 보면 서로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깊은 내면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유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예수님 안에서 한 몸입니다. 성찬 때마다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도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나 자아가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다른 성도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기가 기뻐지는 비결인 것을 압니다.  


병으로 몸이 아프신 할머니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이 분이 성령의 안식을 얻었는데, 갑자기 고함을 질렀습니다. “억울하다 억울해.” 속에 있는 것이 터져나온 것입니다.

악한 영은 사람 속에서 항상 “억울하다!” 라고 외칩니다. 어떤 사람이 억울해하고 원통해할 때 그는 어둠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해 하고 또 감사할 때 그는 주님이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살그머니 당신 속으로 들이올 때 결코 그 생각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그것은 당신의 생각이 아니며 악한 영이 당신을 소유하려는 술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당신이 억울한 이유를 용서 못할 이유를 계속 분노하고 한을 품을 이유를 설명하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악한 귀신들린 자들이 얘기할 때 입 다물게 하고 꾸짖었습니다. 우리도 원망의 말이 나올 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탄아, 입 다물어!” 


[무너지는 장벽]에서 북한 사람들이 마지막 때 선교사로 쓰임받을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이 오히려 세계 어떤 사람도 들어가기 어려운 선교 현장에 그들을 쓰실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기 나름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준비할 것이 무엇입니까?
남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원망도 극복하게 되는 십자가를 붙잡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는 비난하기를 멈출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자기 연민을 중단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미워하기를 그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푸념을 늘어놓을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운이 없다고 하소연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 이유를 나열할 것입니까? 
언제까지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행복을 만들어 갈 것입니까?. 
언제부터 우리는 천국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만 붙잡으면 됩니다. 


은혜가 충만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간증에 은혜가 있고 찬양에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많은 예배에서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몹시 가난했기에 돈을 벌기 위하여 간병인의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환자의 대소변을 치우며 눈물이 났습니다. “오. 주님 .. 당신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남의 대소변이나 치우고 있어야 하나요?” 그 순간 주님이 말씀하셨다. “내 딸아, 네가 대소변을 치우는 것이 그 어떤 간증과 찬양보다도 나를 기쁘게 한단다.”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떤 환경에 가도 지옥같이 삽니다. 아무리 평화로운 곳에 가도 그는 원망거리를 발견하며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줘도 그는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천국을 소유하고 있어 어느 곳에 있든지 은총과 사랑을 발견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뜨겁지만, 마귀의 시험이라는 관점에서는 계속되는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마귀는 너무나 교묘합니다. 큰 은혜 중 순간에 넘어뜨릴 틈을 노립니다. 재산도 팔아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역사하고 어려운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렇다고 겁낼 것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시험이 한결같이 교회 부흥으로 결론지어졌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가만히 있어도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분명하면 시험이 내게 백 가지로 다가와도 그것이 다 감동이 되고 은혜가 되고 기적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분명하면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분명하면 시험도 곧 축복임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 성찬을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마음 깊이 있는 쓴 뿌리, 가시, 원망 다 오늘 해결하시는 시간입니다. 예수 안에 죽고 예수로 사는 놀라운 은혜를 성찬 때마다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그 역사를 여러분에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하시옵소서. 원망도 이기는 십자가 복음을 제가 사모합니다.”
여러분, 기도하시고 성찬을 받겠습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을 치료하시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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