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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된 자와 나중된 자 (마 1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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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된 자와 나중된 자 (마 19:23~30) 

 
어느 시골 교회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중들의 반응이 도무지 시원치 않았습니다. 더러는 졸기도 하고 시계를 보기도 하며 성경책을 여기 저기 들쳐보기도 하는 둥 대부분은 딴청을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님은 점점 맥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문득 앞좌석을 보니 어느 할머니가 계속 눈물을 닦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은 ‘그래, 단 한 사람만이라도 듣고 은혜를 받으면 된다.’ 싶어서 용기를 얻어 설교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은 그 할머니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합니다. “할머니, 오늘 설교 말씀이 그렇게 은혜가 되었습니까? 그런데 어떤 말씀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요?” 그러자 할머니는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목사님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아이구 목사님 설교는 뭔 말인지 잘 모르겠고요 며칠 전에 제가 오랫동안 키우던 염소가 죽었어요. 그런데 목사님의 수염을 보니까 자꾸만 그 염소 생각이 나서 그만...” 그러더랍니다.

흔히들 착각은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착각하는 바람에 그 상처가 클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착각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쉽게 하는 착각이 뭔지 아십니까? 아마 지금도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들인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먼저는 공짜는 결코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진리 중에 하나가 있다면 땀 흘리고 수고해서 얻은 것만 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공짜로 주어진 것은 내 손에는 있지만 내 의식, 내 능력 속에서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돈입니다. 그런데 항상 문제가 되는 것도 돈입니다. 돈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만 돈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돈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거나 혹은 부자가 될 만한 인격이 없는 사람이 공짜로 돈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겁니다. 우리가 심도 있게 한번 생각해 보면 돈이란 아무나 가져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공짜로 돈이 생기면 다 잘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 일확천금만 생기면 다 잘되고 이것을 정당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전혀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소위 공짜로 얻은 재산을 마치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평생 누릴 자기의 소유로 착각을 하고 땀 흘리지 않고 살아가다가 하루아침에 망합니다. 사실은 망해도 싸지요. 

두 번째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법칙 내지는 자연현상에 대한 오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무엇이든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성장하고 자라게 되어 있다는 자연법칙에 대한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고 늙어지고 죽게 되는 생장의 의미를 모든 것에 부여하는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인간의 생리적인 성장일 뿐이지 만사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성장이란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업이란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고 병들 때도 있는 겁니다. 항상 잘되고 항상 건강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 줄로 착각을 했습니다. 내가 하는 사업만큼은, 내가 구상하는 일들만큼은 무조건 잘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할 것입니까? 그 끝이 없는 겁니까? 이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착각했더라 말입니다. 계속 성장은 만사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땅히 그래야만 되는 줄로 생각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온 게 사실입니다. 이것이 착각입니다.

또 한 가지의 착각이 있는데 고진감래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진감래라는 말 자체는 정말 값진 것입니다. 고생을 참고 견디면 낙이 온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리고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지나치다 못해서 운명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인생은 고해” 라는 말은 인생 자체를 고통이라고 전제하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불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인생이란 이미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요? 운명이니까요. 그래서 불교문화의 배경을 받아서 어차피 고통당하게 되어 있는 세상 잘 참고 있으면 뭐든지 다 잘될 줄로 믿고 있습니다. 이거 착각입니다. 

감나무 아래서 누워서 입만 벌리고 있다고 홍시가 다 떨어지는 것 아닙니다. 또 떨어진다 해도 언제 떨어질 때까지 그러고 있을 것입니까? 근본적으로 자세를 바꿔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다시 새로운 원인을 제공해야 결과가 오는 거지 그냥 고진감래만 믿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불교적 배경에 의해서 <윤회적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좋은 때가 온다고 생각합니다. 

운명론적으로 받아들이고 가만히 누워서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 올 것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소리요, 그게 바로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제든 자발적이든 개혁을 해야 개혁된 결과가 오는 거지 거저 오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없고 정직함이 없이, 수고 없이 결코 산업이 될 수 없는 겁니다. 

마25장에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한 달란트를 되돌리고 와서 하는 말입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때 주인의 대답이 뭡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았느냐”고 책망합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것” 이 바로 게으른 자의 착각이요, 악한 종의 변명입니다.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는 일은 없습니다. 헤치지 않고 모으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런고로 우리는 합리적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비합리적인 이성적인 착각을 벗어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주목해야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또 한 가지의 착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여기에 무슨 착각이 있다는 것입니까? 먼저 된 자가 당연히 또 먼저 될 줄로 생각합니다. 먼저 된 자는 언제든지 무엇에든지 먼저 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고 계신지를 보면 비유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으로 보면 부자는 행복한 거 아닙니까? 또 돈이 돈을 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또 부를 낳는 거거든요. 이렇게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번다고 볼 때 경제적으로 먼저 된 자는 계속 먼저 된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오히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 어려운데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방법이 없을까요? 그 방법이 두 가지입니다. 한 가지는 바늘 귀를 낙타가 들어갈 만큼 크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낙타를 바늘 귀보다 작게 하면 됩니다. 물었더니 대부분이 첫 번째 방법을 말합니다. 그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인간들입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줄이거나 나를 희생할 생각은 전혀 없고 다른 것이 달라지고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답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에서 보면 옳은 방법이 무엇입니까? 낙타가 바늘귀보다 작아지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지만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그러면 지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는 이야기입니까? 마지막까지 부자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언제나 부자여야 한다는 착각을 깨트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가진 자 되었고, 많이 가진 자 되었다는 기득권을 버리기 위해서 뼈를 깎는 아픔을 견디면서 작아지고 낮아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정신으로는 힘들고 진정한 신앙인이라야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들인데 동시에 이 사람들은 부자였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먼저 된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금생에서도 부자로, 귀족으로 종교적 존경을 받다가 죽어서 천국까지 당연히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돈이 있다고 영성도 함께 있고, 신앙도 좋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세상에서 존경 받는 위치에 있다고 해서 신앙까지 앞서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은 기간이 오래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이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먼저 직분을 받았다는 것으로 영원히 먼저 되고 천국을 누릴 조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값을 지불하지 않고 공짜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언제부터 믿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제 바로 믿었든 몇 십 년을 믿었든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 믿음을 위하여, 영생을 위하여 치러야 할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해야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본회퍼]는 신앙을 위한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 안일한 가운데에서 예수 믿기를 바라는 사람에 대하여 값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봉사해야 할 시간에 봉사하지 않고, 헌신해야할 자리에 서 있지 않으려고 하고, 고난당해야 할 시간에 도망가고, 기도해야 할 순간에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잘못된 습관이 오래 믿은 사람, 먼저 믿은 사람일수록 늘어가는 요령이라면 오늘 주님의 말씀이 실감나지 않습니까? 
 
먼저 된 자의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뭐냐 하면 무엇을 봉사해야하고 무슨 헌신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무슨 일을 먼저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핑계하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일을 모릅니까? 신앙의 우선순위를 정말 몰라서 묻는 겁니까? 다른 것에는 먼저 된 자라고 자부하면서 왜 그런 것은 모른단 말입니까? 여러분 싸구려 은혜는 언제나 값싼 겁니다. 나 자신의 이러한 현실을 깨끗이 부정할 수 있는 값을 지불하고야 높은 은혜를 사모해야 될 것입니다. 

[피카소]의 작품 가운데 <황소몰이>라는 걸작이 있습니다. 그 값이 얼마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값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온 다 낡아빠진 자전거를 소재로 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합니다. 내버린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자전거지만 [피카소]의 눈에 띄고 [피카소]의 손에 들리어질 때 엄청난 값의 작품이 되었더란 말입니다. 먼저 되었건 나중 되었건 간에 중요한 것은 주의 눈에 인정받아 주의 손에 들리어질 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29절을 보면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했습니다. 버릴 때 오히려 여러 배나 받고 겸하여 영생을 얻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가장 낮출 때 높이시고 가장 겸손한 자에게 영광을 더하시고 철저하게 마음을 비울 때 하나님께서 큰 것으로 채워 주신다는 진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맨 먼저라고 자만하고 스스로 교만한 자를 맨 나중으로 보내시기도 할뿐만 아니라 맨 나중 된 사람으로서 맨 나중에 처져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을 맨 먼저 된 자로 높이시기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은혜를 아는 자의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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