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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과 롯의 이별 (창 1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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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롯의 이별 (창 13:1~18)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영원히 함께 살 수 없습니다. 만남이 있는 것처럼 이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과의 이별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너무 힘들어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해서 아내를 위해서 죽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저도 반드시 헤어져야 합니다. 제가 제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제 아이들과도 반드시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큰 아들 모세를 필리핀에 떼어놓고 오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혼났습니다. 
제가 우리 교우들 중에 어떤 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우리 장로님들 안수집사님들 그리고 권사님들과 서리집사님들 또 모든 성도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교우들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결국은 헤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 먼저 헤어지느냐 조금 나중에 헤어지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은 다 헤어지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도 서로 사랑하는 삼촌과 조카 사이였지만 이별을 하게 됩니다. 
창 13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조카 롯을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롯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롯으로 인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날 때에도 고아인 롯을 잘라버리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시니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던 롯도 덩달아 복을 받았습니다. 6절에 보니 그들이 얼마나 풍부했는지 그들이 거하는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가축은 많고 풀은 한계가 있으니 삼촌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7절에 보니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풀과 물 때문에 다투게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을 부릅니다. 
그리고 롯에게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말합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니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요단 온 지역을 선택하게 됩니다. 조카 롯이 좋은 땅을 선택했으니 아브라함 마음에 약간의 섭섭함이 있었겠지만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땅으로 가게 합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진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방을 바라보게 하시고 보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 아브라함의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땅의 티끌만큼 주시겠다는 말은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감사해서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게 됩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몇 가지 메시지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복을 확신하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었습니다. 2절에 보니 아브라함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다고 말합니다. ‘풍부하였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무겁다’는 말로서, 미처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롯에게 많은 가축을 주셔서 그들이 거했던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는 넉넉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과 건강에 있어서 이렇게 복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숱한 시험과 역경이 있었습니다. 그는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들어간 그해에 가나안에 흉년이 들어서 가나안 땅에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이 없고 풀이 마르니 가축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한 아브라함은 물이 풍부한 애굽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애굽으로 피난을 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사라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애굽의 왕인 바로가 탐을 내게 됩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아브라함은 그야말로 아내를 팔아먹는 부끄러운 남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크게 물질의 복을 받았는지 창 14장에 보면 집에서 훈련을 시킨 군인이 318명이나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숱한 시험과 역경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임한 하나님의 복이 우리들에게도 임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갈 3:14에 보니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에게는 아브라함의 복이 임한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것은 그가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브라함은 흉년을 만나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거하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또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 남자답지 못하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셔서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환경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도 하나님의 복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보면서 성공할만한 가능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너무나 조건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복주시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잠 8:21에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가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잠 10:22절에도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복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여러 가지 시험과 역경이 있지만 아브라함의 복을 반드시 받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부족한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부족함이 많지만 아브라함의 복을 반드시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2. 은혜를 아는 자가 되자

가축을 먹이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니 아브라함이 롯을 부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롯에게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롯은 그동안 고아인 자기를 삼촌 아브라함이 길러주었고, 삼촌을 따라다니다가 자기도 부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선택권을 삼촌에게 넘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롯은 삼촌에게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보기에 좋은 요단 지역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은 롯에게 몇 십 년간 자기를 사랑으로 보호해 준 후견인이요 보호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배신했습니다. 의리와 도리와 은혜를 저버리고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비옥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옥토입니다. 좋은 풀이 많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롯이 그 땅을 삼촌 아브라함에게 드려야 하는데, 롯은 자기가 그 땅을 택했습니다. 

은혜를 저버린 롯이 잘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평지를 선택했던 롯이 소돔까지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평지에 살던 그가 죄악의 도성으로 가면서 그 도시의 영향을 받습니다. 점점 그의 신앙이 약해져 결국 신앙을 잃어버리고 술꾼이 됩니다. 그러다 전쟁을 만나 전쟁 포로가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구해 주어 회복되었지만 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곳 생활에 깊숙이 젖어 삽니다. 소돔 고모라가 불 탈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두 딸과 함께 그곳을 빠져 나오게 되지만 그 집안에 불행은 더욱 커집니다. 두 사위는 불에 타 죽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됩니다. 알거지가 된 그는 두 딸과 함께 토굴에서 살다가 딸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자식을 낳는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은혜도 잊지 말고 감사하고 기회가 주어지면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목회자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에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고, 사람의 은혜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 생활을 할 때 바르실래라는 부자가 다윗과 다윗의 일행을 보살펴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압살롬이 죽게 되고 다윗이 다시 쫓겨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다윗은 자기가 은혜를 입은 바르실래를 잊지 못합니다.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다윗은 바르실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높여주려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던 것처럼 사람의 은혜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하나님으로 위로를 삼자.

아브라함이 자식처럼 키웠던 롯과 헤어졌으니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거기다가 롯이 삼촌의 은혜를 모르고 좋은 땅을 선택했으니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이게 뭔가.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이럴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보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아브라함을 위로하십니다. 바라보는 대로, 밟는 대로 땅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위로가 되었던 롯이 떠난 것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었던 사람이나 물질 혹은 좋은 조건이 우리를 떠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위로해 주셨던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요셉에게 유언을 하면서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리니”(창 48:21)라고 유언했습니다. 요셉에게 야곱은 떠나야 할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집도, 재산도, 건강도 다 떠나보내야 할 것들입니다. 결국 남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떠나보내야 할 것을 붙잡고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눅 12장에 보면 한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창고가 부족해서 걱정입니다. 그는 있던 창고를 허물고 더 큰 창고를 짓습니다. 그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자기 영혼에게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큰 창고와 그 창고에 가득한 곡식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가 어리석었던 이유는 결국은 떠나보내야 할 것을 붙잡고 그것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으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아브라함에게서 떠나보내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서 떼어내시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식을 떼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정말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을 떼어내실 때가 있습니다. 떼로는 돈을 떼어내야 합니다. 우리가 붙잡고 싶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것 때문에 힘들어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우리가 놓아야 할 것을 놓으면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것으로 주실 것입니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더 많은 땅과 더 많은 자식을 약속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복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롯이 은혜를 알고 의리와 예의와 도리를 지켜서 “삼촌, 삼촌이 좋은 땅을 가지세요. 저는 이쪽으로 가겠어요.”라고 했으면 하나님께서 그곳에 복을 주셔서 롯이 잘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에도 샘이 넘쳐흐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좋지 않은 땅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도 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황무지에도 꽃을 피우실 수가 있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셨습니다.

요즘 여러 성도들이 성전부지 매입을 위한 다솔헌금에 동참하시는데 감사합니다. 다솔헌금에 동참하신 분들의 헌신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복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솔헌금에 동참하신 분 가운데 강윤정 집사님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강집사님의 집 보증금이 700만원인데 얼마 전에 1,200만원 정도의 헌금을 하셨습니다. 그 정도면 집 있는 사람에게는 5-10억은 되는 돈입니다. 저는 강집사님을 보면서 할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어떻게든 하시게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려운 형편 중에도 그렇게 큰 돈을 헌금하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집사님의 딸이 냄새를 못 맡게 되어서 보험금을 1500만원 받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지면상 다 말할 수 없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강집사님 입장을 생각해 봤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1,200만원을 헌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돈을 떠나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의 경우는 갈등하다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 그 돈을 자기에게서 떠나가게 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강집사님에게는 돈보다는 하나님이 집사님의 위로자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4. 하나님은 역설적인 역사를 일으키신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했습니다. 조카 롯은 삼촌의 은혜를 생각지 않고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양보하고 손해를 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계산하기 힘든 물질의 복도 받았습니다. 창 21:22에 보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그랄의 왕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롯은 어떻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점점 그의 신앙이 약해지고 술꾼이 됩니다. 전쟁을 만나 전쟁 포로가 되고, 아브라함이 구해 주어 회복되었지만 소돔 고모라가 불 탈 때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알거지가 된 그는 두 딸과 함께 토굴에서 살다가 딸과 잠자리를 같이 하여 자식을 낳는 부끄러운 사람이 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16:25에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6,27에서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할 때 작은 유익을 위해서 은혜를 저버리거나 욕심을 내서는 안 됩니다. 좀 손해가 되어도 양보하고, 좀 억울해도 양보를 하십시오. 그 때는 속상하고 그 때는 억울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손해 보지 않게 하실 것이고, 억울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삭을 보세요. 그랄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100배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쫓아냅니다. 이삭은 우물을 놓고 그랄에서 나옵니다. 그 당시 우물은 지금의 기업체와 같습니다. 그런데 포기합니다. 사람은 억울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이삭을 도와주십니다. 이삭이 쫓겨났지만 또 우물을 팝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자 그랄 사람들이 또 찾아와서 우물을 빼앗습니다. 이삭은 계속해서 우물을 빼앗기고 빼앗기지만 하나님은 이삭에게 계속해서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랄의 왕이 이삭을 찾아와서 상호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손해를 보고 억울함을 당했던 이삭은  높여주셨고, 이삭에게 손해를 끼치고 이삭을 억울하게 만들었던 그랄 사람들은 이삭에게 무릎을 끓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아무리 속상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을 믿고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낮아져도 높여주시고, 섬겨도 섬김을 받게 만드시고, 잃어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상황에 감사하며 기쁘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일제시대에 국가의 지도자였던 조만식 장로님은 청년시절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매일 아침 주인의 요강을 깨끗하게 닦아놓곤 했습니다. 주인이 아무리 봐도 총명함이나 성실함으로 볼 때 머슴살이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학비를 대주며 평양에 있는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잘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정주로 돌아와서 오산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제자들이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마다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거든 요강을 닦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섬기는 자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낮추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섬기는 자를 때가 되면 높여주시는 분입니다. 역설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고 억울해도 손해가 되어도 섬기고 자신을 낮추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5. 자신의 욕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라. 

아브라함이 롯과 다투지 않고 롯이 원하는 땅을 준 이유 중에 하나는 주변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라고 말합니다. 만약 아브라함과 롯이 물과 풀 문제로 크게 다투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저 사람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인데, 저렇게 다투냐”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자식이 잘하면 부모의 얼굴에 빛이 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 못하면 부모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는 자들이 잘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믿는 사람들이 잘 못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수도 있고 드러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잘 살아야 합니다. 

바하는 위대한 음악가입니다. 바하의 작품 같은 위대한 곡을 일생 한 곡이라도 만들 수 있는 음악가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바하는 연필만 들면 곡이 착착착 나올 정도의 대가였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바하가 작곡한 음악을 다 베끼기도 어려운데, 바하는 그 위대한 음악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작곡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하의 모든 작품의 상단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이 있습니다. 바하는 작곡을 할 때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재적인 은사를 주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욕심대로 자기가 좋은 땅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조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주변에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는가 보자’라고 생각하고 보고 있으니 조카에게 좋은 땅을 양보한 것입니다. 그는 바하처럼 모든 일을 하면서 그의 머리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6.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자

아브라함이 잘 된 것처럼 롯도 잘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롯은 기질로 보나, 그릇으로 보나, 성품으로 보나 복을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과 함께 하므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나중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자기가 복을 받은 것이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부터 롯의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 1편에 보니 복 있는 사람은 사람을 잘 사귀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는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에 내게 복이 온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창 39장에 보면 요셉이 형통하였다는 말이 3번 나옵니다(창 39:2,3,23). 그런데 그 3절의 말씀을 보면 형통과 함께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이 형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사 55:6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는 내일부터 40일간 특별 새벽기도회를 갖습니다. 주제는 “기적의 40일”입니다. 40일 간 새벽에 하나님을 찾읍시다. 그래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안 된 분들은 이번에 새벽 사람으로 습관을 드리십시오. 집이 멀거나 새벽에 일어날 자신이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주무시면서라도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간절히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번 40일은 여러분에게 기적의 40일이 될 것입니다.
시 34:10에서는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약속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에게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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