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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시대적 사명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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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시대적 사명 (롬 12:1~2)  


지난 주간 사경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았다. 때때로 가족들과의 외식이 즐겁기도 하지만 매일 외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성회를 통해 받은 은혜를 잘 간직하고 자신의 삶에 잘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제는 평상의 마음으로 돌아와 집엣밥을 먹어야 할 때다. 

18년 전, 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런데 교회가 주변에 너무 많았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물었다. ‘하나님, 이 동네에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또 교회를 세워야 합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분명한 응답을 주셨다. ‘너 신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니?’
‘바른신학 바른교회 바른생활’이라는 학교의 설립 정신이 생각났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성경적인 교회 세우는 것이 나의 비전이다. 그것은 나의 비전일 뿐아니라 여러분의 비전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교회 지도자들의 과 구원함은 모든 성도들의 비전이다. 그런데 비전은 같으나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다. 

2주 전,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를 보면서 애도의 마음과 함께 씁쓸하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그것은 우리 개신교의 침체와 사회적 배척과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민족과 함께 수난을 세월을 보내며 이 땅에 개척자 역할을 감당한 교회가 지금은 천덕꾸러기 문제아로 전락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속화되고 무너져 가는 조국의 교회를 보면서 반성과 함께 원인을 분석하고 회복을 위한 분발을 다짐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해답을 찾고자 한다.

로마서는 전체 16장으로 되어 있고 두 개의 핵심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전반부 1-11장까지는 구원에 관한 교리에 대하여, 그리고 12-16장까지는 성도의 실천적 삶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다루고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절은 “그러므로”라는 결론을 이끄는 접속사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이 접속사는 로마서 전체를 둘로 나누는 분수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읽은 1-2절의 말씀은 12장 이후 16장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는 전체 내용의 서론이요 핵심되는 원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교리를 배웠으면 그대로 살아야 한다. 구원을 받았다면 삶도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구원과 삶은 나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신앙과 현실의 삶이 따로 놀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요. 교회가 세속화되고 타락하는 주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것이다. 
예)찬송가 257장,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오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그렇다면 속죄함을 받고 구원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 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삶의 원리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1.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1)거룩한 산 제사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것을 보통 ‘삶의 예배’라고 부른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는 곧 예배의 실패였다. 성전에서의 거룩함을 지나치게 강조 - 성전 안에서의 경건함이 성전 밖으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형식적 종교인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믿음은 있지만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2)거룩한 산 제사는 어떻게 드리는가?
1.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너희 몸’ - 옛날 죄짓던 몸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거룩한 몸이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시는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력한 이유는 먼저 자신의 정체성 문제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고후5:17)에 대한 무지, 불확실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이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소유권 이전이다.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일이다.

2.우리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내 영혼이 구원받을 때 나의 몸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의 몸도 거룩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몸을 어떻게 거룩하게 할 수 있는가? 초기 교회시대의 교부였던 크리소스돔은 산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삶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의 몸이 어떻게 산 제사가 될 수 있는가?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 이상에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한다. 손은 구제하고,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귀는 여가 있는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은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어휴, 나는 못해. 목사님이나 그렇게 사세요. 그냥 나는 적당히 죄도 지으면서 회개하면서 살래요.” 
동정이 가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이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당시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으로 위로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산 제사는 최선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최고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2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몇 년 이상 해본 사람이나 성경을 좀 읽어본 사람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과 세속적인 삶이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는가?

1)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이 죄에 대하여 열거했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 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 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 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삶 속에서 나타난 죄의 성향들을 거론한 것이다.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는 말은 그 악한 세대의 양식을 쫓아 가지 말라는 뜻이다. 

시대적 조류를 잘 반영하는 매체가 매스콤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영화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일 것이다. 요즘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주제는 불륜과 이혼, 그리고 재혼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파장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자식도 버리고 친구도 버릴 수 있는 세태를 보여 주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한탕주의, 쾌락주의, 황금만능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시대적 탁류에 휩쓸려서 쫓아다니다가 성공하면 사람들은 그를 우상처럼 떠 받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려서 진리를 따라 올라 가는 사람들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한다.

요일2:15-16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2)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마음은 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 자세와 행동을 주관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된다. 신학자 루이스 뻘콥은 인간의 마음은 신앙의 좌소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 마음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새로워질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자의 변화는 돌발적이지 않다. 말씀과 기도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은 신앙연조나 직분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루 하루 진리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결단과 기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비 없는 구름과 같고, 말씀 없는 경건은 핸들이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우리의 심령은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삶이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표시이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낼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접어 두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졌다.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는 밤 새도록 얕은 곳에서 그물을 던졌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이상하리만큼 잡히질 않았다.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얕은 해변가에서 계속 그물을 던졌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겠는가? 그는 계속 헛수고를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 없는 열심은 낙심과 탈진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가 무슨 일에든지 열심을 내야 하겠지만 열심을 내기 전에 먼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 먼저 분별해야 한다. 

그 분별력은 어떻게 생기는가? 강물이 탁하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심령이 어수선하고 육신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앞서서 언급한대로... 
첫째는 이 세대를 본 받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 경건에 힘쓰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영안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예배요 몸으로 드리는 거룩산 산제사인 것이다. 


오늘이 3.1 독립운동 90회를 맞는 날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기독교인이 반이었다. 당시 개신교인의 수가 적었으나 사회적인 영향력은 컸다. 독립운동, 문맹퇴치, 사회봉사와 구제등 사회전반에 선도적으로 그 기능과 역할을 감당했다. 민족의 수난의 시대를 교회가 앞장서서 감당했던 것이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교회는 변질되기 시작했다. 두레마을 대표인 김진홍목사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신앙자세를 “치병기복신앙”이란 말로 표현했다. 이 용어에는 두 가지 문제가 담겨 있는데 첫째는 기복주의요 둘째는 이적주의다. 신앙의 중심을 기복과 이적에 두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앙자세는 결국 탐심을 가리키는데 사도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다. 

신앙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짖밟히게 되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거룩한 성도들이 도리어 부정과 부조리한 사건에 연루되어 세상을 혼란케 하는 요인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점점 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사회를 이끌어 가는 선도적 기능을 상실했다.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기독교 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교회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였다. 교회가 부패한 세상을 개혁해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능력을 상실했다면 적어도 오늘날 우리 한국땅에서 니버의 주장은 공염불에 불과한 것이다. 
예)이영애 주연한 영화 ‘친절한 금자씨’ 전도사에게 ‘너나 잘하세요.’

그 대사 속에 오늘날 푸대접 받는 교회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현상들이 심화되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삶의 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1년도에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타임지가 격찬한 윤리학자가 있다. 미국의 듀크대학의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와스 박사인데 그는 니버의 주장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교회가 세상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 공동체로서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우어와스에 따르면 ‘교회는 기독교적 덕성의 훈련장이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며 윤리적 독창성과 탁월성을 지닌 존재로 만들어 가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교회공동체의 이야기 곧 예수의 복음을 통해 훈련받고 성숙하며,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교회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 자아와 인격이 형성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를 받고 있다. 세상을 향하여 무엇을 하려 하기 보다 먼저 복음으로 신앙 인격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말하길, ‘한국교회는 말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부족하다’라고 했다. 정확하면서도 뼈아픈 지적이다.

이같은 위기 시대에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윤리학자 스탠리 하우어와스 박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유원지에 가면 두 세 사람이 탈 수 있는 가늘고 긴 보트가 있다. 이 보트를 탈 때 허리를 굽히고 가능한 무게의 중심을 아래로 몰리게 해야 한다. 만약 뻣뻣히 서서 탄다든지 모서리 부분에 앉는다면 배는 중심이 흔들려 뒤집히고 말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배의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탄 사람도 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성도는 세상이 뒤집혀서 망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사람들이다. 사회적인 책임과 사명감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주를 위해 일생을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적당히 살면되지 꼭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가? 사도 베드로는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과 역할에 대하여 이렇게 증거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3.1절을 맞으면서 이전의 교회의 역할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세상이 점점 어두워지고 악해져 가는 세태 속에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시대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의 요약이 그 해답이다.

1)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실 - 하나님의 소유.
2)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는 것이다. - 주님과 항상 동행
3)영적 분별력을 소유하는 것이다. - 이 세대를 본 받기를 거절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최고의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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