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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관계의 회복 (요 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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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회복 (요 21:1~18)


오늘 본문말씀 중에 부활의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 속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세 번이나 질문 할 때 베드로는 17절에 [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십니다 ] 라고 답을 합니다. 
어느 교단 총회장 목사님이 한국 교회의 현실을 걱정하면서 오늘 교회의 위기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거룩한 물음에        
근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이 물음이 우리를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기 때문에
우리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이 물음에 신앙적 근심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 베드로는 실의에 차서 옛 직업 어부로 돌아와 다른 여섯 제자와 함께 디베랴 바다에 그물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옛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 내 양을 먹이라 ] 는 세 번이나 거듭된 대화 속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과 그 의미를 깨닫고 
3월 사역헌신의 달을 맞이하여 우리도 사역 이전에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 부인하고 옛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의 초라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1.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1절)
수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를 부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다른 제자들을 이끌고 옛사람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책망하고자 찾아오신 주님을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비록 제자들은 부인하고 실망하고 낙심하지만               
허물 많은 베드로를 용서해 주시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 시켜 주시기 위하여 
부활의 주님은 저들의 삶의 현장에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즉 실패한 자리에 찾아오신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실패한 사람 돌아보지 않습니다. 만나도 길에서 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신다면 나의 실패 얼마든지 예수 승리가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요한복음은 20장으로 이 책의 마지막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말씀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 21장이 없었으면 성경이 이상하게 될 뻔했습니다.
 20장으로 끝났다면 베드로의 삶은 실패의 삶으로 끝나는 것입니다.그러나 21장의 무대는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에 베드로가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고기잡이를 통해서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예수님께서          
실패한 그 베드로가 다시 고기나 낚는 어부가 되었을 그 순간에 다시 찾아오셔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던 처음의 부르심을 확증시켜 주십니다.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신앙과 삶을 회복케 하시는 주님 오늘도 실패한 자리까지 찾아오시는 주님께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 제 이야기 - 나의 실패 예수 승리 간증 - 패자 부활전 용 그릇 >
나의 삶에도 20장으로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찾아오셔서 회복케 하시는 21장의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옛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 
갈릴리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고기 잡는 데는 다 베테랑들입니다.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3절에 보니[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라 ]
< 영감 없이는 어떠한 위대한 일도 이루어 질 수 없다 >는 말과 같이
 낙심하고 좌절하는 마음가지고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마음에 예수 잃어버리고 세상 나가서 성공할 것 같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마지막 설교에서 당부하십니다. 
요15:5절 [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 ]
예수 떠나 될 것 될 것 같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헛방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날이 세어 갈 때 예수님이 오셔서 [ 애들아 고기가 있느냐? ] [ 없나이다 ] 하니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 고 합니다.  
이에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나중에 헤아려 보니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다고 합니다.

오늘 그 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주님의 153사건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2.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는 주님의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6절)
어떻게 하면 우리의 그물에도 고기가 찢어질 만큼 잡힐 수 있느냐?는 사업의 방법을 말하고 있느냐? 아니지요. 핵심은 예수님께서 실의에 차 있는 제자들의 감겨진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그 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한 것입니다.                        

전문가일수록 고집이 셉니다.전문가들이 예수 믿기가 더 힘드는 것 있지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순종할 때 눈이 뜨여지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셨는데 예수신 줄 알지 못했을까요? 
저들의 삶에 집착하다 보니 예수님이 찾아 오셨는데도 눈이 뜨여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럼 언제 눈이 뜨여집니까?  눅24:25절에                                 
[ 미련하고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 라고 책망했듯이 삶에 집착하고 말씀에 눈이 뜨여지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찾아오셔도 알지 못하는 미련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엠마오로 행하던 제자에게 주님이 말씀하실 때 눅24;32절에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면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이 믿기워 지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더라도 말씀에 눈이 뜨여져 그 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시기 바랍니다.
배 오른편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 편입니다.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더라도 하나님 편에 서서 하면그물이 찢어지는 153의 놀라운 축복이 있을 줄 믿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가방 회사 샘소나이트(Samsonite)의 회장은 
슈와이더(Jesse Shwayder)입니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뉴욕에서 잡화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업은 계속 실패했고, 아들 슈와이더가 아버지 대신 채소가게’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슈와이더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혜를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손님의 가방이 찢어져 물건이 쏟아지는 것을 보고, 
찢어지지 않는 가방을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연구 끝에 짐을 많이 넣어도 터지지 않는 튼튼한 가방을 제작했고, 가방 이름을 ‘튼튼하고 힘이 세다’는 뜻으로, 샘소(삼손)나이트(Samsonite)라고 붙였습니다. 
이 튼튼한 가방은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결국 세계 각국에 지사를 둔 세계 최대의 가방 회사로 발전했습니다. 사업을 하시더라도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시기 바랍니다.
오른 편은 항상 하나님 편입니다.  

그물이 찢어질 만큼 물고기를 잡고 보니 제자 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제자가 누구입니까?

3.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제자는 누구이며 베드로의 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7절) 
7절에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합니다. 바로 요한입니다.
어떻게 요한이 먼저 알아봅니까?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즉 예수님을 사랑하니깐 그렇습니다.
사랑의 모델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사람은 자기 몸을 제일 사랑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 몸같이 사랑하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국민학교 다닐 때 한 학년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수업 중에 쌍둥이 중 하나가 창문을 휘떡 넘어 
맞은편 운동장  철봉대가 있는 데로 막 달려가요 가만히 보니 누가 싸움을 하고 있는데 
자기 반쪽이 싸우고 있어요 그러니 다른 학생은 모르는데 쌍둥이는 알아보고 막 달려가서 같이 싸우는 것 있지요.
사랑하면 보입니다.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면 주의 음성도 들을 수 있고, 주님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주시라 하니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에 풍덩 뛰어 내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래도 베드로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의 헌신을 말합니다.헌신할 수 있는 사람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폭적으로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전문가일수록 햇까닥 하면 또 예수 믿는 것 끝내주는 것 있지요
왜냐하면 초 지식 위에 신비입니다.

제가 미국 뉴저지 어떤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너무 너무 은혜스럽고 좋은 교회입니다.
집회 중에 제일 앞자리에서 의사 장로님이 찬송을 하면서 춤을 등실 등실 춥니다.
그러니 온 교인들이 같이 춤을 춥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2단은 아니지만 소위 불건전한 신비주의 교회에요.
그러나 교인들은 의사 장로님이 그러니 그냥 따라하는 거예요,
이와 같이 전문가가 예수 믿으면 또 더 끝내주는 것 있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잇지요.
베드로의 장점은 했다 하면 물불 안 가리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배반한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대 합니까?

4. 예수님은 배반한 제자들을 어떻게 대해 습니까?(8-14절) 

예수님이 떡과 생선을 저희에게 주시면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아무도 말도 하지 않습니다.
왜 말이 없습니까? 제자들은 지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 모두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예수님을 포기하고 옛사람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들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떡과 생선을 준비하시고 기다리고 계셨다가 아침부터 먹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하고 우리 하고 다른 면입니다. 나 같으면 [ 니가 그럴 수 있나? ] [ 뭐 할말 있거든 해봐라 ] 이럴 건데 밥부터 먹고 이야기하자 고 합니다. 

코메디 가운데 밥 묵자 하는 코너가 있지요 관계가 불편지면 밥 묵자 고 합니다. 

왕상19:에 보면 로뎀나무 아래 낙심한 엘리야에게 찾아 오셔서
[ 야! 남자가 여자한데 못이겨서 꼴좋다 ] 하지 않고
[ 엘리아야, 일어나 정신 차리고 밥부터 먹으라 ] 고 하면서 
위로하고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 혹 자녀들 아니면 부부 간에도 [ 밥 묵자 ] 하고 싸우시기 바랍니다.

조반을 먹은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5. 왜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것도 3번이나 거듭하여 말했을까요?(15-18절)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하시며
두 번째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 내 양을 치라 ]  
세 번째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하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 내 양을 먹이라 ] 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 네 양을 먹이라 ] 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기 위하여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묻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것도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묻습니까?
그것은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일 보다 우선이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를 저버렸지마는 예수님은 찾아 오셔서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사랑의 관계만 회복되어지면 그 다음은 목숨 내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까?                                          
주님 사랑한다면 그 다음은 주의 일하는 것 문제없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은 자가 교회 봉사하고 전도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은 베드로에게 진지하고 의미 있는 사랑에 대한 질문을 통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다른 양들, 사람들, 영혼들과의 관계에 관계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사역도 모두 주님께 대한 사랑에 기초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일이니까, 의무감이나 습관적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찬양을 드릴 때 주님을 향한 사랑이 넘쳐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데 내기 집사이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이끌려 봉사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주님과 사랑의 관계 회복 속에 주님 대신한 손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제시대 우리 나라에서 하와이로 간 사람들 가운데 아주 신앙이 좋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주일이 돌아오자 성도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화가 난 농장 주인이 이제부터 주일에 교회 나가는 자들은 매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왔는데 
주일을 못 지킨다면 이민 온 이유가 없어지니 매를 맞더라도 주일을 지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농장 주인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이들은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기 전에 매를 맞고 가겠습니다` 라고 
농장주인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처음에는 협박을 하다가 안 되니 회유를 하면서
“ 주일날 일하면 삯을 더 쳐주겠다 ” 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은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 너희들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 ” 고 물으니
“ 우리는 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 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그들의 뜨거운 믿음에 감동을 받아 매주일 농장 일을 쉬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주인도 일꾼들을 멀리 교회 가는 것보다 
가까이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예배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먼저 회복하시기 바랍니다.그럴 때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고 합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 내 대신 내일 좀 해다오 ] 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이차 대전 후 독일 어느 마을에 교회 앞에 예수님 동상이 서 있었는데 
폭격을 맞아 팔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보기가 흉해서 철거를 하려다가 어느 조각가가 그 밑에 비문을 새겨놓았습니다. [ 예수님은 손이 없으시다 대신 우리의 손을 갖고 계신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손을 대신하여 주의 일 하기를 원하신다.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손과 발에 못 박혀 돌아갔습니다. 
주님은 손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손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거든 
[ 내 대신 나의 손이 되어 네가 일 좀 해다오 ] 라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 요청의 관계가 회복되고 주님과 요청의 관계가 회복되어 
축복의 통로가 열려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헌신된 일군이 되는데는 매우 제약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18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
유대인들은 활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겉옷에 띠를 띠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는 베드로가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지마는 
주님과 사랑의 관계 하에 사랑의 포로가 된 주의 일군들은 행동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통해석으로는 19절과 함께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사역의 길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이제는 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봉사하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앙으로 싫든 좋든 십자가를 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가만히 보면 교회 봉사나 아니면, 로이모스 전도대, 새벽기도회,  철야기도회 같은데
자신의 사명인 줄 알고 헌신된 일군이 있는가 하면 형편 되면 하고 안 되면 나오지 않는 일군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 일은 형편 따라 해야지 어떻게 한번도 안 빠질 수 있습니까?
맞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나도 그렇게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매일 자녀들에게 새벽밥을 해 줍니까?
어떻게 매일 출근하고 돈 벌려 나갑니까? 
내 가족이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사랑의 관계 하에 놓이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듯이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결론> 사랑의 관계 회복되어지면 봉사의 관계는 절로 되어집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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