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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으로 난 사람도 (요 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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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난 사람도 (요 3:4~10) 
 

우리는 지난주일,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이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직접 해석을 붙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신 후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그러나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남’, ‘위로부터 남’, ‘물과 성령으로 남’, ‘성령으로 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바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8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바람(to. pneu/ma)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선언부터하십니다]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설명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저,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기 전에, 소극적이긴 하지만, 거듭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십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니고데모의 말처럼, “늙어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생물학적인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 유심히 관찰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육으로 난, 육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육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그 육의 힘이 얼마나 크고, 강하고, 무서운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육의 힘이 歷史의 方向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時流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문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가치관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육의 힘을 거스르지 못합니다. 運命이라고 생각합니다. 八字가 그것밖에 안 되는 데 하면서 宿命적으로 삽니다. 

지난 1월 20일 제4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바마는, 미국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선거과정에서 보셨지만, 오바마는 흑인들로부터도 그가 진짜 흑인인가? ‘충분히 검은가?’(Is Obama black enough?)하는 의혹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바마는 스스로 자신을 흑인이라고 여겼지만, 미국의 대다수의 흑인들이 볼 때, 
오바마는 미국에 뿌리를 내린 奴隸의 후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白人입니다. 백인 조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하와이 푸나호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컬럼비아대학과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오는 등, 오바마는 미국사회에서도 어려운 엘리트 교육만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출신성분 때문에, 그가 과연 미국의 흑인들을 이해하는 인물인가? 그는 ‘충분히 검은가?’(Is Obama black enough?)하는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치명적인 또 하나의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제레미야 라이트 목사의 설교 문제였습니다(오바마가 흑인 빈민가에 들어가서 시민운동을 할 때부터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 오바마의 영적지도자, 결혼주례, 아이들 세례 줌). 라이트 목사님이 설교 중에 “미국은 저주 받을 나라(God damn America)다”고 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미국전역에 유포 된 것입니다. 그 사건이 터지자 결국 “오바마는 극단적인 反美정서와 反백인 정서를 갖고 있는 과격한 흑인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비난을 집중적으로 받고 맙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난 것이지요.

그때 오바마는 인종문제에 대하여 정면돌파를 결심합니다. ‘보다 완벽한 연합’(A More Prefect Union)이라는 연설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미국의 희망(hope)과 변화(change)와 가능성(yes, we can)을 주창합니다. 특히 자신과 같이 태생적인 흑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미국밖에 없다고 역설합니다. 그는 미국정치에서 가장 불편하고, 민감한 인종문제를 정면돌파하면서 국민통합과 희망과 변화와 가능성이라는 국민적 과제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그를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 되게 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 오기까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그의 흑인적인 배경은 얼마나 큰 장애요인이었습니까? 肉의 힘, 정말 무섭습니다. 

미국사회뿐이겠습니까? 육으로 난 육의 힘이, 인생을 左之右之합니다. 인도 같은 나라의 신분제도, 정말 무섭습니다. 인도 인구는 세계 인구의 16%를 차지합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여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인도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인도 인구의 16%(인도인 여섯 사람 중 한 사람)인 1억 6,500만 명이 不可觸賤民이라고 합니다(달리트). 神도 버린 사람들이라고까지 합니다. 

무려 3,500년이 넘게 인도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카스트 제도에 숙명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사회제도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던 것이지요. 불가촉천민들은, 스스로 이런 생각하며 삽니다. 천하게 태어나 한평생 변소청소부로 살아가면서, ‘前生에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 거야’ 그러면서 來世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희망을 가지고 현재에 주어진 변소청소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겁니다(‘다르마’ 의무&책임). 이 사람들은 모두 육으로 난, 肉의 힘에 짓눌려 사는 자들이지요(1947년 폐지).

타종교만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육으로 난 육의 힘에 지배당하며 사는 자들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人物이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하십니다. 바리새인 니고데모 속에, 유대교 지도자 니고데모 속에, 이스라엘 선생 니고데모 속에, 여전히 肉으로 난 肉적인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니고데모의 신앙이 육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교(Judaism)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육적인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가 가르치는 신앙교육, 삶의 방식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육적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듭남 곧 ‘성령으로 난 사람’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은 거듭남을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 “영으로 난 것”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은 ‘성령’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난다’고 하면 추상적이기 때문에 참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 마디로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을 규명하시기 위하여 ‘바람’(to. pneu/ma)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강한 태풍으로, 느낄듯말듯하게 살랑살랑 부는 산들바람으로도, 여름더위 나무그늘에 앉아 있으면 느끼는 시원한 바람으로도, 그런가 하면 뜨거운 열바람으로도, 분명한 실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 주목해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무슨 뜻일까요? 성령으로 난 사람(who is born of the Sprit)도 다 ‘바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하고 확실한 존재양식처럼, 그 누가 보아도 객관적으로 認識가능한 분명하게 변화된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절대로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바람의 존재가 보이지 않지만, 만질 수 없지만 확실하게 있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확실한 존재론적인 변화의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은 도대체 무엇일까요?(거듭남은 개념이 아니고, 존재론적인 실체임) 

(1) 바람은, 자유합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임의로 붑니다. 자유롭습니다. 어디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정체하지 않습니다. 더러 머무는 곳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곳에다 자신이 머물 견고한 城砦를 짓는 법 없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이와 같습니다. 자유합니다. 그 자유는, 방종이 아니지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眞理의 靈’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또 ‘眞理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유대교의 율법주의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의 무거운 멍에를 매지도 않고, 남에게 지우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손 마른 자를 회당 중앙에서 공개적으로 고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당시 유대인 중, 그 누구도 안식일 규례법, 39가지 금지법: 39ⅹ39=1,521가지 규례에서 자유하지 못하였지만, 예수님만은 자유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행동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뜻, 곧 眞理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이 자유합니다.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말씀을 모르고서는 여러분, 절대로 성령 충만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 나라 복음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 26).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합니다. 우리 집안은, 예수는 오래 믿었지만 유교가풍이 도도하였던 집안입니다. 94 연세로 돌아가신 예수 잘 믿는 권사님할머니께서 꽤나 어머니께 시어머니노릇 하셨습니다. 여름에 반바지(짧은 치마) 못 입게 하셨습니다. 손녀들 집에 들르러 오면, 반바지 못 입었습니다. 그런 할머니께서, 고모님들이 오셔서 편한 옷 입고 계시면, “야야, 시원하게 옷 잘 입었다” 그러시더라고요. 딸은 시원하게 입어도 괜찮고, 며느리와 손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셨던 거지요(며느리와 딸의 차이). 성령은 우리로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영이십니다.

(2) 바람은, 공간을 초월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공간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누리시던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어두움과 죄악이 가득한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또 이 땅에서의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는, 미련 없이 아버지의 처소로 되돌아가신 분으로 증언해 줍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나신 자(위로부터 나신 분)이신 예수님의 존재방식이었습니다.

모세로 말하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바로 궁을 떠남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신발을 벗음입니다. 내려놓음이지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상종하기를 꺼리고, 개 같이 취급하던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도 만나셨습니다(요 4, 1-54). 예수님은 인기가 높아져 사람들이 붙잡아 임금 삼으려고 하자, 즉시 그 자리를 피하여 혼자 산으로 들어가버리셨습니다(요 6, 15). 심지어 최측근들인 제자들조차도,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반문할 정도로 예수님은 공간에,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요 14, 5). 성령으로 난 자들의 존재방식, 삶의 방식이 늘 이렇습니다.

(3) 성령으로 난 사람은, 수난을 영광의 사건으로 받아들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 위로부터 난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방식이요, 존재방식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산헤드린에 잡혀가서 매도 맞고 능욕도 당했습니다. 

유대교당국자들이 사도들에게,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아줍니다.” 그 때 사도들이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凌辱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했습니다(행 5, 41-42).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 다 이와 같습니다.

(4) 성령으로 난 사람은, 생명 없는 자, 죽을 자에게 생명을 부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으로 난 자의 이미지 ‘바람’(to. pneu/ma)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코에 불어넣으셨던 ‘생기’(루아흐)와 동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의 지으시고 生氣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生靈이 되니라”(창 2, 7). 바람이 곧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죽을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잘못된 세속 문화로 죽어가는 사람들, 그릇된 신앙과 율법주의적인 멍에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다 살려냅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복음이 처음 전해질 때 양반, 상민, 천민이 있던 계급사회였습니다. 신분계급 문화가 지배하던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은 비록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그 문화의 벽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1897년 곤당골교회에 백정들이 예수 믿고 세례교인이 되어 나오자 양반교인들이 따로 나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1909년 연동교회에 갖바치 출신 임공진이라는 분이 장로가 되자, 양반교인들이 불만을 품고 나가 묘동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 안에 남아 있던 육적인 요소들이지요.

그런 아픔도 없잖아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백정출신이 독립협회 활동을 하였던 박성춘, 고아출신으로 독립운동가가 되었던 김규식, 마부 출신으로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식, 가난한 과부 출신으로 이화학당의 첫 한국인 교사가 된 이경숙 같은 분들, 다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종교였지만, 예수
님은 유대교가 죽이고 정죄하던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성령으로 나신,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위로부터 나신 예수님 닮은, 성령의 사람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더 이상 육으로 난 자로 살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이끄셔서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시고,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말씀에 順命하며 사는 자들로 삼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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