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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요단을 건너야 할 때입니다. (수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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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요단을 건너야 할 때입니다. (수 3:16)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영화는 본래 ABC TV에서 한 흑인 비즈니스 맨의 인생을 다큐로 내 보낸 것이 놀라운 반향을 일으키자 이것을 다시 본격적인 영화로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의 이야기는 계부의 폭력으로 어린 시절을 살아가는데서 시작됩니다.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가드너가 8살이 되던 해에 계부가 있던 집에 불을 지르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결국 가드너는 남의 집에 입양되어 어린 시절을 살아갑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정 폭력, 알콜 중독, 아동 학대등의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습니다. 세일즈 맨으로 청년 시절 새 인생을 향한 몸부림을 해보지만 생활고로 어느 날 세금도 못 내고 자동차 마져 압류 당하자 전세 집에서 쫓겨 나가 거리로 내몰리고 그의 아내는 아들을 아빠 곁에 놓아 둔 채 떠나 버립니다.

1980년대의 을씨년스런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서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때로는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때로는 노숙자 쉼터에서 처절한 생존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는 어머니의 유일한 유산인 기도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고, 그리고 기도하고 있는 한 그는 인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믿음 하나로 버티었다고 후일 고백합니다.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어느 날 그는 주식 중개인을 만나 인턴이 되고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가드너 앤 리치 컴퍼니 회사를 설립하고 1억 8천만 달러의 윌가의 신화적 사업가가 됩니다.

이 가드너의 성공 스토리를 취재하기 위해 온 한 기자에게 “당신이 현실의 좌절의 벽을 뛰어넘어 행복을 찾기 위해서 얼마큼이나 하나님이 필요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제가 노숙자의 삶을 살 때나 CEO의 삶을 살 때나 항상 저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저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하나님이 주실 꿈을 바라보고 있었고, 저는 항상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시련의 강을 건너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본문의 말씀은 온갖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시련의 장애물이었던 요단강 앞에 서게 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요단강을 방문해 보면 아주 폭이 좁은 샛강처럼 보이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는 달랐습니다. 특히 우기나 곡식을 거두는 수확의 계절이면 강의 수심은 매우 깊었다고 합니다. 3:15의 기록을 보십시오.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고 했습니다.

지금 가나안 땅의 길목에서 시퍼런 강물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 시기가 비가 안 오는 계절, 요단강이 말라버리는 계절, 그러한 계절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맥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을 건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는 얼음이 녹고 물이 가장 많아지는 때였습니다. 왜 하필이면 제일 요단강을 건너가기 어려울 때 건너가라고 명령하셨습니까? 그것이 믿음의 도전입니다. 요단강에 지금 시퍼런 강물이 출렁거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광야 여정의 최후 최대의 시련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자, 이런 시련의 강을 그들은 어떻게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그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인생 광야의 여정에서 우리도 이런 시련의 강을 건너가는 해법을 찾아야 합니다. 인생 시련의 강을 건너가는 그 해법은 무엇일까요?

1.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그와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과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 건너가기 전에 거기서 유숙하니라” 이제 싯딤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13km 떨어진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요단까지 200만이 넘는 백성들이 진군을 합니다. 여러분도 지난번에 보셨지만, 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 여리고성으로 두 정탐꾼을 보냈고, 기생 라합을 통해 여리고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떨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뭐, 더 이상 지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늘 보문에 보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요단강을 건널 때뿐만 아니라,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아침 일찍이 일어나 출정합니다. 아이성을 정복 할 때도 여전히 아침 일찍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성경은 시종일관 새벽의 기적과 축복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벽의 역사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엄청난 사건을 새벽에 이루셨습니다. 천지창조가 새벽에 이루어졌고 출애굽의 역사가 새벽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신 사건이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깨어있던 목자들이 탄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무엇이냐" 무덤 문을 박차고 우리 주님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새벽 일찍 향품을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마리아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예수님 만나기를 원하십니까? 은혜 받기를 원하십니까? 신앙의 신비를 맛보기를 원하십니까? 얽히고설킨 실타래같은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신비를 깨달아 보기를 원하십니까? 닫혀졌던 인생의 문들이 열려지기를 원하십니까? 기적을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새벽을 깨우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새벽을 드리겠다! 내가 새벽을 깨우겠다! 놀라운 각오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 발이 세상을 향하여 옮겨지기 전에 나는 하나님의 전을 향하여 옮겨가리라. 내 입이 세상을 향해 열려지기 전에 사랑의 하나님을 부르며 내가 기도하리라. 내 귀가 세상의 잡음을 듣기 전에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리라. 내 눈이 헛된 세상을 바라보기 전에 영광스러운 주님을 바라보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리라.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2.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다소 흥분된 마음으로 진군하여 요단강 앞까지 진군하더니 삼일 동안이나 멈추어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서 사흘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요? 지금 자기들 시야에 드러난 저 요단 건너편에 펼쳐진 가나안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새로운 감회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젖었을 것입니다. 애굽을 떠나 드디어 40년 만에 자신들의 눈앞에 강을 넘어 그토록 소망했던 약속의 땅이 펼쳐져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들뜬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이곳에서 3일을 머무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본문의 정황성을 살펴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 앞에서 사흘 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요? 하나님과 깊은 교제하는 중에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를 기다리는 영성 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고 바쁠 때일수록 오히려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재확인하며, 고요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영혼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린 다음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에게 새로운 원리 하나를 지시합니다.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을 뒤따라가라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자! 3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도대체 언약궤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명령에는 큰 비밀이 있습니다. 언약궤가 무엇입니까? 언약궤 속에는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갔습니다(민10:33~36).

또 행진을 하다가 쉬어갈 때도 언약궤를 진 한 복판에 세우고 그 주위를 둘러 진을 쳤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한다는 의미입니다. 언약궤는 구약에서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임재 혹은 하나님의 인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보고 행진한다는 것은 내 계획, 내 의지대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내 시선이 항상 주님께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절이 그것을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지금 언약궤를 메고 있는 제사장과 그들을 따르는 제사장의 사이를 이천 규빗으로 하라는 것은 상당한 거리(900m이상)를 두고 뒤 따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명령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법궤의 신성함을 존중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2백만 군중이 법궤를 다 볼 수 있는 적정한 거리였습니다. 무엇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까? 요단강 도하와 가나안 땅 정복이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만이 인생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여러분 중에 어떤 한 분을 붙들고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형제님 당신은 최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신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계십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들 가운데 상당한 사람들이 이 질문 앞에 당황할지 모릅니다. 왜 보편적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특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구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무의미한 반복적인 싸이클에 너무나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익숙해 져 있는 까닭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린 이렇게 사는 거에요, 그냥. 그냥 사는 거지 뭐. 살다가 죽는 거지. 삶에 대한 돌파구를 찾으려는 구체 적인 기도가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바꿔 말하면 그것은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있는 인생에 새로운 꿈이 발견되었다면 우리는 주 앞에 엎드릴 것입니다. 하나님! 좀 도와 주십시요. 주님 좀 인도해 주십시요. 이런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열망을 주 앞에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3. 자신의 내면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요단 도하를 위한 준비의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아주 특별한 요구를 백성들에게 주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요단 도하를 위한 기술적인 준비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5절을 보실까요?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여호수아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는 일이 기적이 요구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적을 믿었습니다. 여기 5절에서 그는 내일 우리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여기 성결이 요단 강 도하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결이 없이는 성결의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이 되려면 그릇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릇을 쓰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럽혀진 그릇만은 그대로 쓰실 수가 없으십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 후서 2장에서 특별히 인정받는 일군의 준비를 교훈하고 계십니다. 먼저 딤후2:16을 보실까요?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리고 이 문맥에 이어지는 딤후 2:21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망령되고 불경건한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성결의 수업준비는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선택 과목이 아닌 필수 과목이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주 고백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결은 행복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4. 순종(믿음)의 삶을 걸어라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했습니다. 15절입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아직도 물은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러 범람하는 강을 향하여 그들의 발을 물에 집어넣습니다. 상상이 갑니까? 여러분, 요단의 뜻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빨리 흐르는 시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 시사하듯이 요단강은 낙차가 커서 물살이 굉장히 급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무서운 강을 건너야지만 그토록 숙망했던 가나안 땅에 진입할 수 있다는 냉엄한 현실입니다. 더욱이 지금은 모맥을 거두는 봄철입니다. 따뜻한 봄기운이 이스라엘의 북쪽 레바논 산과 이스라엘의 최북단 헐몬 산의 눈이 녹아내리며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해서 여리고 성 근처까지 흘러내려오는 동안 엄청난 강수량을 동반하기 때문에 배라도 있어야 건너지 그냥은 건널 수 없는 그 물에 발을 담근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물가에 닫자마자 물이 두 토막 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16-17절을 보십시오.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여기 ‘마른 땅’을 주목해 보세요. 이는 요단강이 사막처럼 바짝 말라버렸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물이 갈라진 다음에 제사장들이 발을 들여다 놓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발을 들여다 놓았더니 물이 갈라졌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에게 뭐라고 얘기합니까?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내가 믿을 거예요. 하나님 내가 사업을 시작했어요. 사업이 번창케 해주세요. 그러면 충성도 하고 헌신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내가 충성해 볼께요. 하나님 살아계신 증거를 내게 보여주세요. 그래야 믿을 것 아니예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으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기 동사가 두 개 나옵니다. "믿으라" "보리라"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바꾸기 원합니다. 하나님 보여 주세요 믿을께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우선순위가 똑바로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우리는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세요. 그러면 믿을께요. 아니요.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입니다

여러분! 삶을 살아가다 보면 희망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절망만이 내 인생에 가득 차 희망이 없을 때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될 그것이 있다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의 신실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다시 한번, 우리 역시 믿음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삶이 되냐 되지 않으십니까?

오늘 우리는 3.1운동 90돌을 맞는 자리에 있지만, 지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이 한반도에는 어둠이 짙게 깔리지 않았습니까? 한국인의 철학 속에 깊게 잠재된 불교도, 조선왕조500년을 이어온 유교도 열강의 패권다툼 앞에 이 한반도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합방이 시작되고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나라의 이 소망은 이 땅에 절망한 젊은이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당시 교회가 3·1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역사적 자료에서도 보게 됩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인사였고, 3·1운동 후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룬 사람의 통계를 보더라도 전체 6417명 중 기독교인은 24.4%(1561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가 22만명이었는데 이는 전체 인구 2300만 명중에 1.3%에 불과한 수치였습니다. 왜 저들의 총칼 앞에서도 목숨이 달아나고 고통이 와도 굽히지 않은 이유가 있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그것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 땅위에 순교의 피를 쏟았고 그의 피의 거름이 오늘의 복된 자리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표현을 잘 알고 있습니다. BC49년 1월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느냐, 혁명가가 되느냐는 선택이었습니다. 시저는 갈리아 지역 정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로마에 돌아가 집정관에 취임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저보다 봄페이우스를 더 선호한 원로원은 그가 무장해제를 하고 돌아오도록 결정을 내립니다. 시저는 그러면 자신의 라이벌 봄페이우스와 함께 동시에 군사 지휘권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이 이를 최종적으로 거부하자 1월 10일 그는 1개 군단을 거느리고 갈리아 지역과 로마의 경계선상을 흐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전우들이여, 이 강을 건너면 세상은 바뀐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격하라!” 이렇게 해서 시저는 봄페이우스를 제압하고 위대한 대 로마제국의 기초를 놓게 되는 전기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루비콘 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되는 순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소위 전환점의 시간들을 어떻게 직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지 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답답한 오늘이지만 그 다음 내일을 바라볼 수가 있다면, 이 슬픔 저 건너편에 우리를 기다리는 기쁨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나를 붙드시사 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내일의 손길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다시 벌떡 일어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루어야 할 비전이 있습니까? 정복해야 할 비전의 땅이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까? 건너야 할 강이 있습니까? 오늘 비전의 사람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가나안의 정복자 여호수아를 배우십시오. 아무리 우리 앞에 높은 산이 가로막혀 있어도, 아무리 출렁거리는 강이 막고 있어도, 비전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하십시오. 주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날마다 주님 마음에 합하도록 성결을 유지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전진하십시오. 우리는 요단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비전의 땅은 정복될 것입니다. 그 땅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비전은 반드시 성취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요단을 건널 때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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