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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기도하는 사람들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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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 (행 4:23~31)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해서 보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고,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편이라면, 사도행전은 후편입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써서 보낸 이유는 성령님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셨고, 제자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는지,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확장되었으며,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가 하는 내용이 사도행전의 내용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사도행전의 사람, 즉 성령님의 사람이 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후편의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어 왔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사람이 된 후 복음서에 등장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를 찾아볼까요? 마가복음 1장 3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새벽기도회의 원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때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기도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편안히 집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1장 36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 홀로 기도하러 가셨고, 제자들은 집에 있다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오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전해주러 갔음을 알게 됩니다. 

이게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종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곳에 따라갔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변화산에도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하는 예수님 곁에 있었다는 말씀일 뿐, 베드로가 기도하러 갔다든지, 요한이 기도하러 갔다는 구절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예는 겟세마네 동산의 일입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깨우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은 아무런 능력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 산 아래 있던 제자들에게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후에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 아이를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그 후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는지를 질문합니다. 마가복음 9장 28절을 보면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하지 않는 제자들에 대한 경종을 울리신 것입니다. <너희가 제자다운 제자가 되려면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데, 어떻게 능력의 사람이 되겠는가?> 준엄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기도에 관하여 숱하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비유를 들어가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기도생활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사도행전에 오면 달라집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훌륭한 기도의 사람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제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붙잡혔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을 당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풀려난 후에 성도들과 함께 기도한 것을 보여줍니다. 23-24절을 보세요.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풀려난 후 축하 파티를 열거나, 잘 버틴 자신들을 스스로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소리 높여 부르짖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첫째 본분이 기도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업무가 점점 많아져서 제자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을 때, 일곱 명의 집사님들 세우게 되었는데, 그 때 제자들이 집사님들을 세워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제자들은 돈 관리나 구호물품 나누는 일은 집사님들이 할 일이며, 자신들의 임무는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도가 본분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던 사람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기도의 사람으로 변했을까요? 

우선 위기 의식이 작용했을 때 예수님께 기도를 배웠습니다. 제자들에게 걱정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은 승천하셨고, 자신들이 모든 것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능력 있게 행하신 비결이 무엇일까?> 그 때 떠오른 것은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자!>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을 기도로 감당하셨습니다. 메시아로서 사람들과 함께 하신 3년 간의 사역의 출발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드림으로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의 마침도 기도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시작도 기도, 마침도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치게 되길 원합니다. 하루를 그렇게 하고, 한 달을 그렇게 하고, 중요한 일, 사소한 일, 우리의 일상사 모든 것을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늘 기도로 당신의 메시아의 사명을 겸손히 유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5장 15절 이하를 보면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와 열광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박수를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오셨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손을 흔들며 화답하기보다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면서 겸손한 메시아로서의 모습을 재확인하셨습니다. 우리도 기도로 늘 겸손을 유지하고, 늘 기도로 사명을 자각하길 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겸손한 사명자로, 자기 자리를 이탈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누가복음 9장 28절 이하를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변화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근심하면서 혼자 해결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얼굴이 어둡습니다. 근심이 얼굴을 어둡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평온하고,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을 빛나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비결입니다. 그렇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은 기도로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시던 그 날도 주님은 떡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의 하나님을 향하여 축복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려낼 때도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능력을 얻는 비결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기도에 정비례합니다. 신학적 지식이나 교회 생활의 연륜이 아니라 기도가 능력을 얻는 근원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위기 의식 속에서 기도했습니다. 또 두 번째로 제자들이 기도하게 된 것은 막상 기도를 해 보니, 기도의 능력이 엄청남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경험이 다락방의 성령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 오직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 1장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이처럼 기도에 힘쓴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 강한 능력으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바람 같은 모습으로, 불이 혀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 내부에 새로운 기운이 넘쳤습니다. 이런 체험은 과거에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과 용기가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당장 나가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날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울 수가 있는가? 아, 이게 기도의 힘이로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음식도 맛을 본 사람이 더 잘 먹게 되어 있습니다. 해 본 사람이 더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가 가져오는 엄청난 능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예루살렘의 교인들은 모이면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제자들도 더 많이 기도했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 장애인이 일어난 것도 기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을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기도시간에 성전에 가다가 그 장애인을 보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칠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자들은 더 이상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은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 능력을 얻고, 능력을 얻으면 이적을 행하고, 말씀을 전하고, 또 기쁨을 얻어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기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우선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능력자이기 때문에 기도가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24절을 보세요. 그들이 어떤 하나님께 기도했나요? <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기도는 우리와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전능자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들으십니다. 본문 31절을 보세요.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의 기도가 끝났을 때, 그들이 모인 곳이 진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들으실 것입니다. 지난주일 이미정 집사님은 기도하여 얻은 치유의 체험을 간증했습니다. 지난번에 집회를 인도했던 김해 모 교회의 목사님은 찬양대 구성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했는데, 얼마 후 세 가정이 등록하고 그 중에는 음악을 전공한 분이 있어서 찬양대 지휘자가 되고, 남편은 찬양팀 리더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IMF의 어려움 속에서 가장 많이 부흥했습니다. 빚더미 위에서 가장 많이 부흥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불치의 병을 기도를 통해 고침 받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새벽기도에 나오십시오. 금요기도회에 나오십시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십시오. 목표를 정하고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하십시오. 힘을 다해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깊은 묵상으로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맛을 알면 더 많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경쟁적으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그런 간증이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기도의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을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또 기도의 사람은 더 큰 성령의 역사를 맛보게 됩니다. 이런 연쇄적인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3.1절 90돌을 맞아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기도는 개인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애국 교회였습니다. 나라가 기울던 1896년 9월 2일 고종 황제 탄신일에 서대문의 독립문 앞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정부의 고관 대신들이 모두 참석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거기서 이런 기도가 올려졌습니다. <당신의 전능하신 힘으로 우리 국왕 폐하는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당신의 성령께서 우리나라를 지켜 주시며 당신이 붙들어 국왕으로 만수무강케 하옵소서. 조물주요 하늘의 왕이신 유일하신 주님 당신께 우리는 찬양을 드립니다. 모두가 당신께 경배드릴 때, 당신의 웃음 밑에서 우리나라는 행복해질 것이며, 부강하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애국심과 신앙심은 하나였습니다. 1895년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 북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스피어(R.E.Spieer) 목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흥미있고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의 애국심이다, 우리가 탄 볼품 없는 배는 어느 주일날 한국의 북부 어느 곳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대동강변을 따라서 널려 있는 동네에, 대나무 끝에 작은 한국 깃발이 매달려 휘날리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 깃발은 그 곳이 기독교인의 주택이거나 혹은 교회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주일에 그들의 주택이나 교회에서 애국적 표현을 한 행위였다> 

교회는 1905년 을사늑약 후에도 기도운동을 벌였고, 1907년 정미 조약이 발표되고 고종이 퇴위할 때도 기도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기도하는 사람은 애국자라고 생각하고 탄압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8월 22일자 <만국기도(萬國祈禱)>란 기사를 보면 <내부에서 십삼 도에 훈령하되 기도하러 간 사람이 있거든 거주, 성명을 자세히 탐지하여 속히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기도하는 사람이 애국자요, 애국자는 기도하였습니다. 애국자와 기도하는 사람이 동일시되었습니다.   

여러분, 후편의 사람, 사도행전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 기도를 우리 자신과 교회와 조국을 위해 끝까지 계속하길 기원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한 축복기도회가 있습니다. 자녀들을 데리고 다 참석하셔서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베푸시길 바랍니다. 기도로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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