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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 (눅 10: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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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대한 사랑의 회복 (눅 10:25~32)


유명한 소설가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우 추운 겨울날 그가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는 길가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한 걸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걸인에게 뭔가 좀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걸인은 반가워서 뭔가 받으려고 손을 펼쳐 내밀었습니다. 그 때 톨스토이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 주머니에 있는 줄 알았던 지갑이 없었던 것입니다. 빈손을 빼면서 너무 민망스러워서 그 걸인의 손을 꼭 잡아줍니다. “형제여!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다음에 내가 만나면 꼭 두 배로 주도록 하겠습니다.”하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걸인이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선생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돈보다 더 뜨거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보고 형제라고 부르는 분을 처음 오늘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오히려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물질을 주어서 기쁘기도 하지만, 그 마음을 나눌 때 거기에도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가톨릭의 수장인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과 장례식을 통해서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정말 그 수십만의 가톨릭 성도들이 조문을 하고 행렬을 이루는 모습이 참 대단하였습니다. 아마 가톨릭 교인들이 마치 다 동원한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그는 절대적으로 가톨릭 교인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가톨릭의 수장이었습니다. 70년~80년대에 독재시대에는 독재자들에게 쓴 소리도 하고, 바른말을 했던 이 시대의 양심이고 예언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분은 참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자리에 늘 함께 했던 분이기에 우리 모두는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분은 많이 순진합니다. 이런 고백도 하셨습니다. 자기가 빈민가를 방문해서 하룻밤을 자고 오도록 되어 있는데, 도저히 그 공중화장실이 너무 지저분해서 도저히 거기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잠을 자지 않고 돌아왔다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얼마나 솔직하고 단순한가 하는 생각에 저는 그분을 더욱 존경하고 흠모하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결국 청빈이고, 또 안구를 기증해서 두 사람에게 새로운 빛을 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사랑의 유산을 남겨준 것입니다. 아마 성서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던 한 인간의 일대기를 보면서 또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중심된 사상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북한 어린이 돕기를 위한 저금통을 나눠드렸는데 솥 모양입니다. 이 솥 안에 성경 66권을 넣고 거기에 물을 좀 붓고, 불을 떼서 푹 삶으면 뭐가 나올까요? 두 글자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두 글자가 남습니다. 구약성경도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신약성경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표현하고 있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과제로 안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사랑의 책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신앙인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사랑하지 못한다는데, 아니 일회적으로는 사랑하지만, 지속적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상실한 기독교인의 모습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아서 결국 길가에 던져지게 되고, 발로 밟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여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 1서 3장에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마태복음 5장 46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도 그같이 할 수 있다. 이방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해 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게 사랑을 값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고 그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입니다. 또 물질이 필요하고 참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나눔을 함께 나누는 것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 속에서 신명기서는 사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 14장에 보면 아주 귀중한 이야기들이 소개가 됩니다. “너희가 혹 남의 것을 저당잡거든”, 내가 남에게 뭔가 꿀 때 뭔가 담보물로 맡겨놓고 돈을 꾸게 됩니다. 돈을 갚으면 담보물을 돌려받게 됩니다. 그런데 “너희가 남의 것을 저당 잡힐 때 혹 겉옷을 저당잡거든, 밤이 되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어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불이 따로 없습니다. 낮에는 덥고 밤이 되면 춥기 때문에, 자기 입던 겉옷을 이불로 삼아 덥고 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 외투를 저당잡고 돈을 꾸었는데 옷을 돌려받지 못하면 그는 밤새 추위에 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적으로 비록 돈을 갚지 못하더라도 외투는 다시 돌려주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곡식을 털 때에는 벼이삭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은 다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버려두면 지나가는 객과 고아들이 벼이삭을 주어서 연명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포도농사를 지어서 포도를 딸 때에도 다 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뭇가지에 한 두 개쯤은 남겨두라고 하십니다. 지나가던 객과 고아들이 그것을 먹고 연명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성탄절 전 주일에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실천에 대해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셨고, 우리의 이웃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이제 이 성탄절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무언가 사랑을 베풉시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변장을 해서 거지행색을 하고 교우들 가정을 성탄절 아침에 방문했답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다 달랐습니다. ‘저분은 참 믿음이 좋아서 구제를 잘 하려니.’하고 생각했더니 웬걸, 찬밥신세였습니다. 쫓겨났습니다. “이 거렁뱅이가 성탄절 아침부터 재수 없게 와서는…….” 어떤 분은 믿음이 별로 없어 보였는데 오히려 따듯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퍼서 “얼마나 고생하세요? 이것 먹고 힘내세요.” 이렇게 해 주었습니다.  저희 선배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참 재미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님이 걸인의 모습으로 방문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을 대하셨을까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바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소외된 자의 모습으로, 병든 자의 모습으로 너희를 방문하고 있다.” 여러분이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지나치는 사람들 바로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니 구체적인 사랑의 수칙에 대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할 수 있느냐? 너희가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헐벗고 가난한 자를 보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을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그런 본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율법사의 질문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주 율법에 능통한, 그리고 약간은 교만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되묻습니다. “당신은 율법학자니까 율법에 능하지 않느냐? 성경에는 뭐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신명기 6장 5절에 보니까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8장에 보면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했습니다.” 당당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그래, 맞다. 그러면 그대로 행하라.”

그 때 이 율법사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또 한 번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을 내 자신같이, 내 몸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도대체 이웃이 누구입니까?” 유대인들은 자기 동족을 이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동족이나 같은 유대인만이 이웃이지, 이방인이나 외국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런 잘못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불리는 성경구절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비유가 아니라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입니다. 여러분 이 비유를 잘 아시는데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죽어 가는데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그냥 못 본체 지나갑니다. 레위인이 못 본체 지나갑니다. 그들은 다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너무너무 싫어하고 상종도 하지 않는,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쓰러져있는 유대인을 보고, 자기 동족도 구해주지 않는 이방인이 가서 상처를 싸매어주고, 그를 구해서 자기 나귀에 태우고 주막집까지 데리고 갑니다.

 자! 이야기는 유대인이 들으면 몹시 자존심이 상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지어서 했다면 아마 거기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런 일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이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사랑하자고 하면 “우리 같은 교인이니까, 같은 가족이니까, 친척이니까 사랑해야지.” 혹시 불교인을 만나면 “아이고 저 원수, 우리하고 상관없지.” 타종교인 들을 만나면 어디 다른 사람 보듯이 하고, 외국인을 만나면 전혀 다른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분들은 집안에 있는 자녀이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집 밖에 있는 자녀일 뿐입니다. 우리는 외국인이라고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타종교인 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냉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 하나님은 아프리카인들 하나님, 유럽인의 하나님이고, 아시아인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인종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이웃이 누구냐?” “너희가 진정한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느냐?”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사장을 한번 주목해 보십시오. 제사장들은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주로 자신들의 거주지가 여리고였다고 합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좀 시간이 걸립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다가 길가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시간이 바빠서 그냥 갔을지도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기 때문에 제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저 사람이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피를 흘리고 있는데 저를 만지면 내가 부정해져서 내가 한 주간동안 예배에 참여할 수 없을 거야.’ 아마 그런 생각 때문에 그냥 외면하고 지나쳐갔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피 흘린 사람을 구출해주는 것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옳은 일일까요? 물론 다 옳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을 섬기듯이 하나님의 자녀 된 이웃과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제사장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예배란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예배란 삶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오늘 예배를 잘 드렸느냐 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는 모릅니다. 오늘 축도가 끝나고 예배실 문을 나가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예배의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가다가 계단을 올라가는데 누가 나의 발을 밟았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야! 기분 나쁘게 아침부터 발을 밟아!” 이러면 예배 잘 못 드린 것입니다. “뭐 밑에 눈이 없으니까 밟을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지하주차장에 가서 차를 빼다가 옆의 차와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잘 드린 분들이 서로 원성을 높이며 싸운다면, 그건 예배에 실패한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찬양을 해도, 아무리 훌륭한 기도를 해도 그것은 예배를 잘못 드린 것입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잘못 했네요.” “그럼 우리 보험으로 처리하던지 합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배란 여러분이 이 예배가 끝나고 예배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여러분의 예배는 평가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예배가 그 때부터 시작되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제사장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포기하고 제사에 혹 참여하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그만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도 아마 자신의 안위가 우선되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놓고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 성서연구시간인데 누가복음 10장 25절 이 본문을 가지고 성서연구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전 주에 교수님이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여러분이 이 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해 오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이 과제대로 살아야 할 지 고민해서 리포트를 써 오십시오. 그리고 이제 월요일이 되어서 학생들이 학교에 오는 날입니다. 그런데 학교 앞에 보니 어떤 노인이 자전거를 타려다가 넘어져서 다쳐서 그만 피도 흘리고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오늘 누가복음 10장 25절을 가지고 시험을 쳐야 하는데 큰일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를 도와주고 싶지만 시험에 늦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만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다 교실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교수님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시험에 모두 빵점을 맞았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진 노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오늘 시험에 100점 맞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이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도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줘야 한다면 정말 그의 생명을 촌각을 다투는 자리라면 우리는 어느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인가를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의무에서 예수님은 바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그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비록 자신과 상극의 관계에 있는 유대인이 쓰러져 있지만 그는 그를 보았습니다. 보았다는 것은 마음에 이미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어려운 광경을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볼 수도 있습니다. 관심의 문제인 것입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몰입되어 있는 사람은 남의 처지와 환경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보다도 남에게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은 남의 고통과 아픔까지도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쓰러진 사람을 보았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그것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나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긍휼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서로를 향한 이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샘솟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입니다. “아! 불쌍하다.”하고 보기만 하고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까이 갔습니다. 그에게는 행동할 수 있는 발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가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그의 상처를 싸매어주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귀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를 끌고 주막에 가서 밤새도록 그를 돌보고 주막집 주인에게 맡겼습니다. “내가 이제 먼 여행에 가는데 돌아올 때까지 돌보아 주었습니다.” 하고 2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하루 품삯이 10만원이라면 약 20만 원가량의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내가 당신에게 더 드리겠습니다.”하고 약속을 하며 떠났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드렸습니다. 자신의 물질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 쓰러져 있는 유대인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때에 율법사는 말합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렇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고 그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를 위해 우리의 이웃이 되기 위해서,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피 흘렸듯이 우리도 그 받은 사랑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눠야한다는 것입니다.

올 해 우리 교회 표어가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섬기고 이웃과 함께하는 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랑으로 섬길까요? 주님을 배우면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주님의 섬김의 모습입니다. 

우리 이웃이 누구일까요? 무언가 도움이 필요로 하는 우리 이웃입니다. 우리가 그 이웃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새해에는 정말 이런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한 시간, 두 시간이라도 꼭 누군가를 위해서, 나보다 뭔가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 친구가 필요한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 물질을 공급해주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크리스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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