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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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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이 마음을 품으라(5)

한 늙은 인디언 노인이 자기 손자에게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싸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얘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데, 두 늑대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 놈이 가진 것은 분노, 시기, 슬픔, 후회, 탐욕, 오만, 자기 연민, 죄의식, 원한, 열등감, 거짓, 허영, 우월감,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선한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인내, 겸손, 친절, 자비, 이해, 아량, 진실, 동정, 믿음이란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현명한 인디언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우리 안에서도 싸움이 있습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입니다. 빌립보 교인들 안에 있던 악한 마음이 무엇이었습니까? 2장 3절의 말씀대로 다툼이나 허영의 마음이었습니다. 선한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겸손이고 긍휼이고 뜻을 합하고 협력하는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마음이 자라도록 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선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수록 우리 안에는 선한 것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부패하며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자아가 꿈틀대고 있지만 이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기준이 달라졌습니다. 우리 인생의 기쁨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될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지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요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지만 마음 중심이 다른 곳을 향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늘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욕망을 생각하고 품는 사람은 세상이 주는 죄와 갈등 사망의 포로가 되게 마련입니다. 세상 가치관이 들어오려고 하면 털어 버리고 귀를 씻으십시오. 오직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그리스도의 선한 마음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인지 본문을 묵상하며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

6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6절부터 11절까지는 그리스도의 찬가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 보면 찬양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지 사도 바울 혼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찬양하던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내용은 그리스도의 선재,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심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 중에 ‘자기를 비었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케노시스’ 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찬가를 케노시스 기독론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상이 있습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지식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어디든 없으신 곳이 없고 변함이 없으신 무소 불변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며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피조물인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상을 조정해야 합니다. 그동안의 하나님 상은 권력자의 모습이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곳에만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은 한없이 낮아지며 비우며 섬기는 하나님입니다. 전자가 구약의 하나님이라면 후자는 신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 두 모습을 이해할 때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 이해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자기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6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마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될 영광과 전능함, 영원불변함을 포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 권리를 내세우기에 빠릅니까? 누가 자기 위치에 맞는 대우를 해주지 않을 때 곧 화를 내고 맙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장로이기 때문에, 권력자이기 때문에, 상사이기 때문에, 어른이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7절 상반절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우리는 충만한 것을 좋아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자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텅 비어 있습니다. 항아리가 쓸모 있는 것은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비웠기 때문에 자유롭고 가벼운 것입니다. 일이 많고 재산이 많고 권력이 높고 인기가 많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 번 이사할 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비어 있으면 누가 건들지 않습니다. 가득 차 있으니까 훔쳐가려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자기를 낮추시는 하나님입니다. 7절과 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피조물이라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8절에도 이어집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예수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며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노예의 자리에 앉으신 것입니다. 한없이 높아지고 섬김을 받으려는 우리의 모습과는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보다 더 낮은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상상해 보았습니까?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거룩하시고 무한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영원불변하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벌레같은 인간이 되신 것도 황송한데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정말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 됨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이고, 더 큰 하나님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우리 인간들의 어리석은 입들은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은 욕심과 자기주장은 더 이상 설 곳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난과 불의와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모든 부조리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고통당하시는 모습으로 보며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심을 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릴 정도로 인간의 죄와 불의는 심각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까닭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낮아지셔야만 했습니까? 지극히 거룩하시고 높으신 하나님이 왜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셔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그 높은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을 보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아아 나는 님의 얼굴에 눈 멀고 귀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눈먼 분이십니다. 사랑에 눈 먼 사람은 주위의 환경도 자신의 처지나 위치가 보이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보십시오. 성경에는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99 마리는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이 들에 놔두고 그 한 마리 양을 찾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잃어버린 그 양의 불쌍한 모습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결국은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낮아지심으로 그 결과 우리는 살아났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렇게 낮아지신 예수님을 보면서 저는 마치 예수님은 물과 같은 하나님이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은 어떻습니까? 한없이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구름에서 비가 되어 산으로 들로 내리고, 시내에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흘러내립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들을 촉촉이 적시며 살려냅니다. 물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내려 가지만 결국 바다를 이룹니다. 세상에 바다처럼 크고 넓은 것이 또 어디 있습니까? 모든 것을 받아주고도 모자람이 없는 것이 바다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불기둥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면 감히 누가 그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성자 하나님은 물로, 영원한 생수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목마른 영혼을 영원한 생수로 채우시면서도 겸손하시며 우리 모든 것을 받아주십니다. 장마진 뒤 강을 따라 흘러내리는 검붉은 황토물과 쓰레기들을 바다가 받아 삭이고 진정시키듯, 우리의 시커먼 죄악의 강물도 모두 받아 정화시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비었다고 하는데 정말 우리 예수님은 속이 빈 분이십니다. 속이 비었기에 우리의 투정도, 우리의 연약함도, 우리의 불평도 “그래 그래, 오냐 오냐” 하며 다 받아주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속이 꽉 차 있었더라면 아무도 그분 가슴속에 들어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웠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진정 낮아지는 것만이 모두를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우주에 평화가 오고 인간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고전 중에 주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삼경 중 하나이지만 요즘은 점술이나 사주팔자를 볼 때나 이용되는 책으로 전락했지만 이 주역에는 우리 선조들이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태극기에도 주역의 문양과 기호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주역은 막대기 세 개로 한 괘를 이룹니다. 태극기에서 끊어짐 없는 작대기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괘를 건(乾)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늘을 뜻합니다. 반대로 구멍 난 것처럼 잘린 막대기 세 개로 이루어진 것을 곤(坤)이라 하는데 이는 곧 땅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뜻을 이룹니다. 

이중 ‘지천태’ 괘와 ‘천지비’ 괘가 있습니다. ‘지천태’는 하늘(건) 위에 땅(곤)을 올려놓은 형상으로 길하고 형통한 괘입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하늘 위에 땅이 있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길하고 형통한 이유는 하늘은 위로 솟는 경향이 있고, 땅은 밑으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음으로 서로 만나고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길한 괘가 됩니다. 반면에 ‘천지비’ 괘는 땅이 밑에 있고 하늘이 위에 있는 형상입니다. 이 괘는 흉하다고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 모양이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하늘은 자꾸 높아지려 하고 땅은 자꾸 아래로 내려가려 하여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에 흉하다는 것입니다. 

서로 통할 때 조화가 있고 화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될 때 화해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심으로 원수된 관계였던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도 흐름입니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야 평화롭습니다. 많이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자기 성을 쌓으며, 그렇지 못한 자는 자꾸 저소득층으로 몰리는 양극화 사회는 위험합니다. 불만이 가득해 언제 폭발할지 모릅니다. 한국사회가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때에 높은 자와 부한 자가 위에만 있으려 하고 자기 것을 고수하려 하면 사회에 갈등이 있고 위험하게 됩니다. 높은 자들이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울 때 사회가 하나가 되고 그래서 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정부 권력자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한 정책을 우선할 때 국민이 통합되고 불만이 없어집니다. 

- 만물 위에 뛰어난 이름

그런데 성경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버릴수록 가득하게 되고, 낮아질수록 높아지며, 비울수록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11절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저는 예전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사해 바다를 보면서 이런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해바다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흔히 사해바다가 죽음의 바다가 된 것은 물을 받기만 하고 내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반면에 갈릴리 호수가 늘 푸르고 아름다운 것은 물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보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랑이나 은혜를 받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면 사해바다처럼 썩어 버리고, 받은 만큼 내보내면 갈릴리 호수처럼 늘 맑고 풍요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감동적인 교훈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사해 바다는 요단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요단강을 통해 사해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 수면 높이가 얼마나 되는 줄 아십니까? 해저 212m입니다. 해수면보다 200m나 낮은 곳에 있습니다. 해저 200m 정도의 호수면 어디로 물을 흘러 보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갈릴리 호수가 깨끗한 이유는 사해 바다가 그 물을 다 받아 주기 때문입니다. 사해 바다 수면은 갈릴리 호수보다 더 낮은 해저 394m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의 더러운 물이 다 사해바다로 흘러갑니다. 만약 사해바다가 없었더라면 갈릴리 호수가 사해바다처럼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온갖 썩고 더러운 것과 시체들과 갈릴리 호수의 모든 독기를 받아주었기 때문에 갈릴리 호수가 살았습니다. 이것이 섬김의 위력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저는 위대한 일들을 한 사람들이나, 큰 교회 목회자들을 보면, 그 사모나 아내가 참 고생했겠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인류 역사에 흔적을 남긴 사람들은 그 살았던 과정이 얼마나 험난합니까? 또 대부분 인격이 훌륭하지만 성격들이 괴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좀 모질고 독한 면이 있어야 큰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독기를 누가 다 받아서 중화시키느냐 하면 그 배우자나 주변 사람들입니다. 인물은 혼자 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 사람들이 받아주니까, 주위 사람들이 견뎌 주니까 나옵니다. 한 인물을 키우는 대신 주변 사람들은 대신 그 모질고 독한 기운에 상처받고 죽어갑니다. 이것이 섬김의 위대함입니다. 주변에 섬기는 사람이 있을 때 인물도 나고 큰 일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해바다는 죽음의 바다로 끝나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 호수를 섬겼던 사해바다를 높이셨습니다. 사해바다는 이제 이스라엘의 보물 창고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물로 씻겨 내려온 광물질을 축적하다보니 지하자원의 보고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브로마인이라는 광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플라스틱이나 농약, 페인트 등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전 세계 소비량의 26%가 이 사해에서 생산됩니다. 전문가들의 추산에 의하면 앞으로 1,000년은 더 쓸 수 있는 브로마인이 사해에 녹아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 마그네슘 매장량은 220억 톤이나 됩니다. 이외에도 사해 진흙은 미용에 좋아 화장품으로 사용되며, 사해 물은 피부병 치료에도 좋아 수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사해입니다. 그 동안 사해가 말없이 수고하고 온갖 더러운 것을 받아 준 대가를 하나님께서 보상하시고 존귀케 만드셨습니다.

자기를 비운 예수, 사람이 되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이시고,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들을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그 입으로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섬기고 겸손히 살아야 되는 이유가 나중에 대접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겸손히 사는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높이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섬김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상은 섬기는 사람이 더 큰 사람이요, 복 있는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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